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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폴리테이아)

‘공화정(공화국)의 역사적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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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가나 정치학자처럼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진 최초의 철학자이다. 정체에 관한 그의 사유는 기원전 4세기에 정치·군사적 쇠퇴와 경제적 혼란에 처한 아테네의 상황을 타개하는 데 일조하려는 바람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해결책은 과거에 있었다. 즉, 그는 기원전 6세기 아테네의 정치가 솔론(Solon)과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가 시행했던 개혁에 주목했다. 

<솔론>/출처: 위키피디아
<솔론>/출처: 위키피디아

기원전 7세기 말 아테네는 사회·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귀족과 빈민의 대립과 반목이 극심했다. 소수 귀족의 대토지 소유와 토지의 생산성 하락으로, 농민의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다. 게다가 귀족에게 빌린 부채를 상환하지 못한 농민은 노예와 다름없는 신분으로 전락했다. 문제 해결의 책임이 있는 귀족은 권력 다툼에만 열중하고 하층 계급에 자의적인 권력만을 행사했다. 기원전 594년경 아테네의 최고 정무관인 아르콘(archon)으로서 비상대권을 부여받은 솔론은 사적 권력에 제동을 걸고 공적 권력을 확립하는 개혁을 시행하였다. 먼저 그는 ‘세이삭테이아’(seisachtheia, ‘부담을 덜다’라는 의미)라는 빈민 구제책을 실시했다. 부채를 갚지 못해 노예가 된 자들을 해방하고, 그들의 부채를 탕감하였으며, 부채노예제 자체를 폐지했다. 그는 귀족이 권력과 경제적 부를 무기로 농민을 노예화하는 것을 중단시켰다. 하지만 솔론이 빈민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그는 빈민의 토지 재분배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힘의 균형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국가적 혼란이 발생할 것으로 판단했던 솔론은 중도 노선을 취했다. 귀족이든 빈민이든 어느 한쪽의 사적 권한이 비대해지는 것을 막으려는 그의 입장은 정치적 개혁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아테네 시민을 재산 상태에 따라 4개의 계급으로 구분하여, 서로 다른 정치적 권리와 군사적 의무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최하층 계급인 빈민은 민회(ecclesia)에 참석하고 시민 법정(heliaea)의 배심원으로 활동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공직에 나가는 것은 여전히 금지당했다. 

귀족과 빈민 모두의 불만을 사게 된 솔론은 아테네를 떠났으며,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가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여 참주(tyrannos)로서 권력을 장악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들이 참주정을 계승하였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참주는 귀족에 대항해서 다수의 이익을 보호하는 정치가를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권력을 잡은 비정상적인 형태의 정치가를 지칭한다)

<클레이스테네스>/출처: 위키피디아
<클레이스테네스>/출처: 위키피디아

반참주 운동을 주도한 클레이스테네스는 기원전 508년 귀족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전통적인 4개의 부족을 폐지하였다. 대신 그는 아테네의 도시지역, 해안지역, 내륙지역을 각각 10개의 트리티스(trittys)로 구분한 뒤, 각 지역에서 한 개씩의 트리티스를 추첨으로 뽑아 세 개의 트리티스를 하나의 부족으로 구성함으로써, 거주지에 기반한 순수한 행정적 의미의 10개의 부족을 창안하였다. 또 클레이스테네스는 새로운 부족에서 추첨으로 각각 50명씩을 선출하여 총 500명으로 구성된 새로운 500인회(Boule)를 발족하였다. 500인회는 당시 1년에 대략 40차례 정도 소집되는 민회에 상정할 안건을 미리 조정하고,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공무의 담당을 위해 추첨제를 도입했지만, 여전히 최하층 계급에는 참여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개혁을 민중의 지배를 의미하는 ‘데모크라티아’(democratia)가 아닌 법 앞에서의 평등을 의미하는 ‘이소노미아’ (isonomia)라 명명했다. 모두에게 똑같은 법을 적용하는 것은 어느 한쪽의 지배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지배의 부재는 권력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간의 균형을 의미한다. 솔론과 마찬가지로 클레이스테네스도 국가를 구성하는 어느 한쪽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던 것 같다.

<‘도편추방법(ostracism)’에 따라 일종의 투표용지로 사용된 도자기 파편>/출처: 위키피디아(클레이스테네스가 제정했다고 하는 ‘도편추방법’은 참주가 될 가능성이 있는 정치가를 아테네에서 추방하는 제도적 장치로 이해되고 있지만, 그것에 관해선 논란이 많다)
<‘도편추방법(ostracism)’에 따라 일종의 투표용지로 사용된 도자기 파편>/출처: 위키피디아(클레이스테네스가 제정했다고 하는 ‘도편추방법’은 참주가 될 가능성이 있는 정치가를 아테네에서 추방하는 제도적 장치로 이해되고 있지만, 그것에 관해선 논란이 많다)

현대 학자들은 솔론을 민주정의 토대를 제공한 입법가로 클레이스테네스를 민주정의 아버지로 평가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들의 개혁에서 민주정과 과두정이 합쳐진 혼합정(폴리테이아)의 모습을 발견했다. 물론 그가 과거를 단순 모방한 것은 아니다. 과두정과 민주정을 혼합한 그의 방법은 독특하다. 1) 민주정은 시민 법정에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빈민에게 수당을 지급하지만, 참여하지 않는 부자에게 벌금을 부과하지는 않는다. 반면 과두정은 시민 법정에 참여하지 않는 부자에게 벌금을 부과하지만, 참여하는 빈민에게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다. 두 정체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추출하여 결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은 시민 법정에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빈민에게 수당을 지급하고, 참여하지 않는 부자에게는 벌금을 부과하였다. (민회 참석에 관해서도 같은 원칙을 적용한다) 2) 민주정은 정치 참여에 재산 자격을 두지 않는 반면 과두정은 빈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산 자격에 관한 두 정체의 규정 사이의 중간 부분을 채택하여 정치 참여의 자격에 광범위하지만 중간 정도의 재산 자격을 두었다. 3) 민주정에서는 공무를 담당하는 정무관이 추첨으로 선출되지만, 과두정에서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또 민주정은 정무관의 재산 자격을 정하지 않지만, 과두정은 재산 자격을 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정체의 헌정적 규정을 그대로 혼합하여, 정무관의 재산 자격을 철폐하는 대신 정무관을 선거로 선출하게 했다. 

중간 또는 중용을 최고의 가치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재산의 소유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에 의하면, 귀족은 계속 권력을 남용하여 빈민을 예속하려 했고, 빈민은 사소한 이익 때문에 귀족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거나 때론 지나친 요구를 했다. 이때 귀족과 빈민의 과도한 주장을 제어하고, 그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계층이 바로 중간층(hoi mesoi)이었다. 중간층이 많은 국가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부를 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탐낼 수 있는 부를 소유한 사람들이 없는 ‘동등한’ 국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중간층이 국가를 안전하게 만든다고 생각한 이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은 민주정과 과두정을 단순하게 결합한 정체만은 아니다. 그는 분명 두 정체의 이념을 정교하게 혼합하려 하였다. 그는 민주정과 과두정 어느 한쪽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혼합함으로써, 오히려 조화를 증진하고 시민 간의 투쟁(stasis)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혼합정을 강조했던 진정한 이유는 그것이 다른 정체와 달리 한쪽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국가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는 어느 한쪽의 주장만을 수용해서도 또 어느 한쪽을 차별하거나 배제해서도 안 된다. 차별과 배제는 구성원 간의 극단적 대립을 초래해 국가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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