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칼레 해전과 영국 경제사의 연관성에 대한 고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적함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혹자는 이를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이 아닌가 할 것이고, 혹자는 이를 과거 스페인의 해군, ‘아르마다’가 아닌가 할 것이다. 물론 모두 맞는 말이지만, 이 글에서는 후자에 해당하는 아르마다가 무적함대라는 명예로운 이명에 흠집을 낸 사건인 칼레 해전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과 해전의 또 다른 주인공인 영국에 끼친 영향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칼레 해전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당시의 시대 배경에 대해 알아야 한다. 1492년, 이탈리아 출신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 유럽에는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대항해시대가 열린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신대륙을 침략하여 부를 축적했다. 그렇게 금은보화를 싣고 다니는 배가 늘어난 만큼 필연적으로 지중해와 대서양에는 해적들이 넘쳐났다. 16세기 당시 스페인은 자신의 선박들을 지키기 위해 항상 해군을 함께 보냈는데, 그런데도 스페인의 선박을 집요하게 노리는 해적들이 있었으니, 바로 ‘드래곤’이라는 이명의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Sir Francis Drake, ?~1596)였다. 프랜시스는 당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뒷배로 두고 해적질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 스페인의 처벌 요청에도 여왕이 이를 무시하자 스페인은 자국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영국으로 출항시킨다.

아르마다는 16세기 유럽 전역에 있어 공포의 상징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바로 영국의 철학가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탄생 비화다. 당시 홉스를 임신 중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아르마다가 영국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공포에 홉스를 미숙아로 조산했다고 한다. 홉스는 추후 이 일화를 가리켜 “자신은 공포와 쌍둥이로 태어났다”라고 말했다. 그런 무적함대가 자국에 향한다는 소식에 여왕은 급히 프랜시스에게 해군의 지휘를 맡겨 전쟁을 준비했다. 승리를 확신한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작전을 허술하게 세웠지만, 영국군은 철두철미하게 전쟁을 준비했다. 전쟁이 시작된 1588년 8월 8일, 스페인 해군은 무적함대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철저하게 영국군에게 패배하고 만다.

이 전쟁의 의의는 대서양의 제해권을 쥐고 있던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굴욕적인 패배를 겪은 것과 칼레 해전 당시 약소국가였던 영국이 승리한 것이라고들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칼레 해전의 승리가 이후에 일어난 혁명에 중요한 주춧돌이 된 것이 진정한 의의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도대체 칼레 해전과 시민혁명이 무슨 관련성이 있느냐?’라고 말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선 이후 영국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논해야 한다. 승전고를 울린 후 대서양의 제해권을 쥐게 된 영국은 양털로 만든 모직물을 수출하는 해외 무역 중심의 경제 구조를 확립한다. 이는 영국에서 양을 기르던 농민들과 모직물을 만드는 공장을 지닌 자본가들이 떼돈을 벌어 중산계층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탄생한 중산계층이 추후 명예혁명과 같은 영국의 시민혁명에 크게 일조하게 된다.

이렇듯 칼레 해전은 단지 유럽에서 있었던 하나의 전투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영국의 경제적 발전과 그로 인한 명예혁명에 이바지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명예혁명 또한 이후의 산업혁명에 영향을 끼치니, 결국 칼레 해전은 현재의 영국 경제에도 이바지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세상에는 조금만 관점을 달리해도 그 내용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야기들이 많다. 가끔 삶에 대한 회의와 허무함을 느낄 때 한 번쯤 관점을 바꿔 보는 것이 어떨까? 자신의 일상뿐만 아니라 역사나 문화와 같은 것에서도 말이다. 이러한 사고를 통해 평소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기분을 체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SNS 기사보내기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

하단영역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