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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로마 공화정의 대두와 신분 투쟁

‘공화정(공화국)의 역사적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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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Republic)의 라틴어 어원은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다. 그것은 도시(국가)를 의미할 때 또는 왕정이 폐지된 후 나타났던 로마인의 특별한 헌정 체제인 공화정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하지만 로마는 성문 헌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의 공화정이 어떤 정치체제인지를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사실 로마인은 자신들의 헌정 체제를 성문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정체가 하나의 입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조들이 축적한 지혜를 통해 수 세대에 걸쳐 발달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로마 공화정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역사적 사건은 신분 투쟁(Struggle of the Orders)이다. 그것은 기원전 494~287년에 발생했던 귀족과 평민 두 신분 간의 치열한 정치 투쟁이었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있는 로물루스와 레무스>/카피톨리니 박물관 소장
<늑대의 젖을 먹고 있는 로물루스와 레무스>/카피톨리니 박물관 소장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물루스(Romulus)가 자신의 쌍둥이 동생 레무스(Remus)를 살해하고 건국한 도시 국가 로마의 처음 정치체제는 왕정이었다.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L. Tarquinius Superbus)가 축출되자, 권력은 귀족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은 토지 분배, 부채, 정무관의 억압, 군 복무의 부담 등과 관련된 평민의 불만을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평민과의 약속을 계속 어기는 등 그들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했다. 기원전 494년 결국 평민은 로마시에서 3마일 정도 떨어진 아니오(Anio)강 건너편의 성산(Mons Sacer)으로 철수함으로써, 귀족의 양보를 끌어냈다. 그 결과 평민의 이익을 대변하고 옹호할 평민만의 정무관인 호민관(tribunus plebis)이 선출되었으며, 평민으로만 구성된 회의체인 평민회(concilium plebis)가 설치되었다. 

<12표법>/출처: 위키피디아
<12표법>/출처: 위키피디아

하지만 평민의 집단행동으로 허용된 평민 조직이 처음부터 평민에게 완전한 정치적 자유를 제공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평민은 법 앞에서 여전히 불평등하였다. 당시 로마에는 성문법이 없었다. 그 때문에 문서화 되지 않은 불문법에 평민이 접근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던 반면, 귀족은 법을 자의대로 해석하고 집행할 수 있었다. 평민은 제2차 철수의 방법을 통해 기원전 450~449년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Twelve Tables)을 제정하는 데 성공하였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Titus Livius)에 의하면, 시민의 권리와 의무 등을 명시한 12표법이 동판에 새겨져 로마의 광장인 포룸(Forum)에 게시되었다고 한다. 12표법은 이전에 존재했던 불문법을 편찬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성문법의 제정은 귀족이 법을 독점하던 관행에 제동을 걸음으로써, 비록 형식적이지만 법 앞에서의 평등을 선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기원전 445년 호민관 가이우스 카눌레이우스(Gaius Canuleius)가 귀족과 평민 간의 통혼을 금지하는 조항을 철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리비우스의 로마사>
<리비우스의 로마사>

 

공화정 초기에 평민은 정무관직에 입후보할 수 없었다. 사실 호민관은 평민만 선출되었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해서 로마의 정규 정무관은 아니다. 기원전 367년 호민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Gaius Licinius)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Lucius Sextius)가 로마 최고의 정무관인 두 명의 콘술(consul) 중 반드시 한 명은 평민 중에서 선출되어야 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평민이 정치 무대에서 귀족과 동등할 수 있다는 원칙이 확립되자, 모든 정무관직이 차례로 평민에게 개방되었다. 심지어 기원전 300년 호민관 오굴니우스 형제가 통과시킨 오굴니우스 법(lex Ogulnia)은 귀족이 끝까지 양보하려 하지 않았던 성직마저 평민에게 개방하게 하였다. 평민 정무관의 선출로 평민 지도자들이 지배 계층에 편입됨으로써, 평민 운동은 혁명적인 성격을 상실하였다. 그들도 귀족과 마찬가지로 일반 평민의 경제적 빈곤과 불평등에 관한 관심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민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평민 대중의 적극적인 지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부채나 농지에 관한 법안들이 계속 제안되었던 이유다. 

현재의 야니쿨룸 언덕/출처: 위키피디아
현재의 야니쿨룸 언덕/출처: 위키피디아

기원전 287년경 경제적 상황이 다시 악화하였다. 평민은 자신들의 개혁 요구를 귀족이 거부하자, 로마시 서쪽에 있는 야니쿨룸(Ianiculum) 언덕으로 다시 철수하였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귀족은 사태 해결을 위해 평민인 퀸투스 호르텐시우스(Quintus Hortensius)를 딕타토르(dictator)로 임명하였다. 그는 평민회에서 의결된 사항, 즉 평민의 결의(plebiscitum)가 원로원의 동의 없이도 로마 시민 전체에 대해 법적 구속력을 가진다는 호르텐시우스 법(lex Hortensia)을 통과시킴으로써, 귀족과 평민의 투쟁을 종식하였다. 호르텐시우스 법은 평민회의 독자적인 입법권을 보장함으로써, 평민조직의 법적 인정을 위한 오랜 투쟁을 마무리했다. 평민회를 소집하고 주재하는 권한을 지닌 호민관은 로마 정체의 정규 정무관으로 인정되었다. 또 평민은 정치적 참여를 법적으로 보장받았다. 그들은 정무관을 선출하는 것 말고도, 법률을 제정하고, 범죄 행위에 대한 사법적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거의 200년에 걸친 신분 투쟁을 통해서 귀족과 평민 간의 완전한 정치적·경제적·법적 평등이 실현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신분 투쟁은 귀족의 권력 독점을 제어함과 동시에 평민에게 정치적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각각 소수와 다수의 지배를 함축하는 귀족정도 민주정도 아닌, 특정 계층의 지배가 없는 체제인 공화정을 창출하였다. 또 로마의 신분 투쟁은 귀족과 평민의 갈등을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호 간의 타협과 양보를 통해 현명하게 해결함으로써, 로마인을 공동체적인 일체감으로 견고하게 결속하였다. 특정 세력의 권력 독점을 방지하고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화한 신분 투쟁으로 인해 로마는 국가의 ‘필연적 팽창’(마키아벨리에 의하면, 국가는 이익과 생존을 위해서는 팽창할 수밖에 없었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신분 투쟁의 시기와 로마가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는 시기가 거의 일치하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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