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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미얀마를 생각하며 본 <1987>(2017)

우리에게는 과거인 역사가 미얀마에서는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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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5월 초였다. 보따리 취재를 위해 기자실에 취재 수첩, 카메라를 가지러 가는 길이었다. 기자의 자취방에서 학교로 가려면 홍대 ‘걷고 싶은 거리’를 경유해야 한다. 당시 걷고 싶은 거리에서는 시위대가 일렬로 서서 미얀마 쿠데타 반대 시위를 하고 있었다. 기자는 잠깐 서서 시위대를 바라봤다. 사진 찍을 카메라를 들고 있지 않음이 한스러웠다. 돌아올 때 카메라로 찍으리라 다짐했지만, 돌아왔을 때는 이미 시위대가 돌아간 후였다.

다음 날, 영화 <1987>(2017)의 막을 연 남영동 대공분실에 가기 위해 시내버스를 탔다. 어제 목격한 시위대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핸드폰으로 미얀마 쿠데타 반대 시위 관련 기사들을 찾아봤다.

 

강민창(치안본부장): 경찰의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는 건데요, 가혹행위는 결단코 없었습니다.

기자: 아니, 그러면 어쩌다 죽었다는 겁니까?

강민창(치안본부장): 그게, 그 조사받는 와중에 조사관이 책상을… 그 책상을…

박처원(대공수사처장): 그 학생이 겁이 잔뜩 질려가지고 조사관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으이? 쓰러졌답니다.

 

▲현재 휴관중인 민주인권기념관(구 대공분실)
▲현재 휴관중인 민주인권기념관(구 대공분실)

영화는 물고문을 받다 질식사한 대학생 故박종철 열사의 사망 사건으로 시작한다. 버스에서 내린 기자는 사건 현장인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았다. 해당 장소의 첫인상은 섬뜩함이었다. 높은 담장, 날카로운 철조망과 굳게 닫힌 대문이 기자를 압도했다. 박종철 열사가 고문받았던 509호에 들어가 추모하고 싶었지만, 올해 3월부터 2023년 6월까지 휴관 중이여서 내부로 들어가지 못했다. 기자는 아쉬운 마음에 외관이라도 찍고자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팔이 찌릿해서 얼굴이 찡그려졌다. 며칠 전 넘어져 오른팔을 다친 탓이었다. 조그만 상처에도 이렇게 아픈데, 기자와 비슷한 나이에 혹독한 고문을 겪은 박종철을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더 안타까운 점은 죽은 박종철을 대하는 경찰들의 태도이다. 경찰들은 박종철의 죽음이 자신의 안위를 해칠까 봐 노심초사한다. 결국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거짓말까지 동원한다. 박종철의 죽음에 대해 당국이 발표한 내용은 “조사관이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답니다”였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 민주화 운동을 한 대학생의 존엄성을 이렇게 존중해주지 않는다니 씁쓸했다.

예부터 국가기관이 거짓말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1980년 당시 언론은 5·18 민주화 운동을 한 투사를 폭도로 몰았고, 1987년 경찰은 박종철 군의 사인을 조작하려 했다. 그리고 2021년 현재 미얀마 군부에서는 사망자 수를 축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군부는 쿠데타 이후 숨진 민간인이 250명 정도라며 인권단체가 집계한 700여 명은 과장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SNS상에 624번이 적힌 미얀마 군부의 사망자 발표 장면이 올라와 군부가 의도적으로 진실을 가리고 있다는 의혹은 커졌다.

윤상삼(동아일보 기자): 선생님,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입니다. 고문 흔적 있었죠? 화장실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시신에 물기 있었다 하셨잖아요. 시신 상태가 어땠는데요? 보신대로만 얘기해주시면 됩니다. 선생님!

오연상(중앙대학교병원 의사): (화장실 밖에서 감시하고 있는 경찰들에게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세면대 물을 틀며) 바닥이 물로 흥건했습니다. 욕조가 있었고요. 폐에선 수포음도 들렸습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건물(위)과 동아일보 사옥(아래)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건물(위)과 동아일보 사옥(아래)

영화는 전반적으로 박종철 열사 사망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데에 각계각층의 노력이 있었음을 부각한다. 대공처장의 압박에도 시신 보존명령서를 발부한 ‘최환’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 시신을 목격한 의사와 인터뷰하기 위해 화장실에서 잠복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은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 그리고 신상의 위협이 있을 수 있음에도 진실을 알려준 중앙대학교병원 ‘오연상’ 의사가 있었다. 기자는 영화에서 느꼈던 감동을 다시 느끼기 위해 위 인물들이 당시 다녔던 직장을 찾았지만, 현대적으로 바뀐 건물은 영화 속 장소의 분위기를 내지 않았다. 더구나 이들의 직장은 서로 떨어져 있어서 북적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시간이 많아 기자는 금세 피로해져서 허탕을 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피로 속에서 기자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많은 구성원의 고된 노력이 필요하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찰이 대공처장의 지시에 따라 시신을 화장했다면, 언론사가 국가로부터 받은 보도지침을 준수해서 이 사건을 알리지 않았다면, 박종철 군의 죽음은 민주화의 물꼬를 트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현재 무용론이라는 평을 받는 UN 안전보장이사회(이하 안보리) 상임위원회에서도 볼 수 있다. 시민을 학살 중인 미얀마 군부대 제재를 위해 안보리가 열렸지만, 상임위원국인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직접적 제재는 수포가 됐다. 연대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요즘이다.

 

김승훈(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신부): 故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은폐, 조작되었다. 

(중략)

그리고 인간화와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중대한 관건이 이 사건에 걸려 있다. 1987년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명동성당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명동성당

김승훈 신부는 명동성당에서 열린 미사에서 박종철을 죽인 범인을 밝히는 깜짝 발표를 한다. 기자는 버스를 타고 역사적 현장인 명동성당으로 갔다. 성당 안에는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었다. 성당 내부를 사진으로 담을까 했지만, 셔터음이 그들의 기도를 깨울까 싶어 단념했다. 기자는 의자에 앉아 내부를 둘러봤다. 영화 속 모습이랑 똑같아서 영화 내용을 떠올리기 쉬웠다. 김승훈 신부는 신변의 위협이 있음이 명백한데도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기자는 작게나마 미얀마에도 평화가 찾아오길 기도했다.

이한열: 고문살인 자행하는 군부 독재 몰아내자!

대중: 고문살인 자행하는 군부 독재 몰아내자!

이한열: 4천만이 단결했다! 살인정권 타도하자!

대중: 4천만이 단결했다! 살인정권 타도하자!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정문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정문

민주화의 또 다른 주역인 이한열 열사는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시위 현장에서도 위와 같은 구호를 외친다. 이에 시위 진압대는 더 과격해져서 허공이 아닌 사람을 향해 최루탄을 쏘기 시작한다. 불행하게도 이한열은 시위 진압대가 쏜 최루탄이 머리를 강타해 사경을 헤매게 된다. 기자는 사건이 발생했던 연세대학교 정문을 찾았다. 당연하게도 정문은 과거 시위 현장이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말끔했다. 

▲신촌에 있는 이한열 기념관.(위) 이한열 열사가 시위 당시 입었던 옷과 신발 등을 배치해놨다.(아래)
▲신촌에 있는 이한열 기념관.(위) 이한열 열사가 시위 당시 입었던 옷과 신발 등을 배치해놨다.(아래)

당시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아쉬운 마음에 신촌에 있는 이한열 기념관을 찾아갔다. 기념관은 이한열 열사가 썼던 편지, 시위 당시 입었던 옷과 운동화 등 그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중, 운동화가 눈에 띄었다. 영화에서 운동화는 ‘연희’와 ‘한열’이 서로에게 도움을 줄 때 등장한다. 한열은 시위에 휘말린 비운동권 대학생 연희를 돕다가 신발을 잃어버린다. 연희는 고마운 마음과 호감을 표시하기 위해 한열에게 운동화를 사준다. 한편, 그 이후에 연희의 삼촌이 민주화 주요 인사인 김정남을 도와줬다는 의혹으로 잡혀가서 고문당한다. 이에 연희는 항의하러 대공분실을 찾아가지만, 경찰에 의해 납치당하고 대중교통도 없는 변두리에 패대기쳐진다. 비 오는 날 신발도 잃은 연희는 한열에게 도움을 청하고 한열은 연희에게 새 운동화를 선물한다. 연희와 운동화는 영화의 극적 전개를 위해 등장한 인물과 소품이지만, 한열이 신었던 운동화를 실제로 보니 오묘했다. 언젠가 연희가 이곳에 방문해 눈물을 훔칠 것 같은 상상이 들었다.

이한열 기념관에는 압수‧수색 검증영장이 있었다. 영장에는 “압수할 물건: 이한열의 사체 1구”라고 쓰여있다. 당시 학생들, 인턴, 레지던트들이 온몸으로 시신을 압수해 가려는 경찰을 막았다고 한다. 경찰들이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몇 달 전 미얀마의 사례에서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얀마 군부는 정확한 사인 파악을 위한다며 시위 현장에서 사망한 19세 태권소녀 ‘찰 신’의 무덤을 도굴하고 검안을 실시했다. 군부는 “외부 세력이 사용한 무기에 희생됐을 가능성이 있다”라는 검안 결과를 냈다. 하지만 사인을 조작했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만약 이한열의 사체를 수습하지 못했다면 경찰이 박종철의 사인을 조작하려 했던 것처럼 경찰은 진실을 숨기려 했을 것이다.

보따리 취재 전날 봤던 시위대의 모습은 취재 내내 머릿속에 남았다. 그래서 이동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관련 기사를 찾아봤고 방문한 장소에 미얀마의 상황을 대입해보기도 했다. 그래도 아쉬움이 가시지 않아 기자는 이한열 기념관에서 나온 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홍대거리로 향했다. 하지만 평일이여서인지 시위대는 없었다. 미얀마 현지시각 5월 6일(목)을 기준으로 미얀마에서 772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 기사가 나갈 때는 5월 17일(월), 다음날은 5월 18일(화)이다. 미얀마에서는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으로 끝난 1980년 5월의 비극이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의 민주화 체제를 만들어낸 1987년의 6월이 되길 바란다. 다음에 시위대를 만나면 응원의 한마디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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