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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공화정의 쇠퇴와 키케로의 합정체론

‘공화정(공화국)의 역사적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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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 후기 로마 제국의 판도 (출처, Khan Academy)>
▲<공화정 후기 로마 제국의 판도 (출처, Khan Academy)>

기원전 146년 지중해의 서쪽과 동쪽에 각각 위치한 카르타고와 코린토스가 몇 달의 간격을 두고 로마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이제 도시국가 로마는 명실공히 지중해제국이 되었다. 하지만 제국의 열매는 원로원을 장악하고 있는 귀족과 부유한 에퀴테스(equites) 계층이 독차지하고, 제국 팽창의 근간인 중소 자영 농민층은 오히려 급격하게 몰락하였다. 하지만 로마의 지배계층은 당대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원로원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지키려는 옵티마테스(optimates, 귀족파)와 평민의 힘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려는 포풀라레스(populares, 평민파)로 분열되어 치열한 정권투쟁만을 벌였다. 설상가상으로 로마를 위협하는 대외적 위기까지 발생하면서, 마리우스(Gaius Marius)와 술라(Lucius Corenelius Sulla)와 같은 군인 정치가들이 사병화된 군대를 가지고 정치무대에 대거 등장하였다. 공화정 후기는 이른바 내전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최종적으로 승리함으로써,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공화정은 무너지고 제정이 시작되었다. 

▲<키케로(출처, 위키피디아)>
▲<키케로(출처, 위키피디아)>

이 혼란과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겪었던 자가 바로 로마의 정치가이자, 뛰어난 웅변가이며 철학자인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다. 기원전 106년 로마에서 대략 100km 정도 떨어진 소도시 아르피눔(Arpinum)의 기사계층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로마와 그리스에서 수사학, 법률, 철학 등을 수학하였다. 30세에 콰이스토르(quaestor)로서 정치적 경력을 시작하여 기원전 63년에는 로마의 최고 정무관인 콘술(consul)에 선출되었다. 그는 로마 정부를 전복하려는 카틸리나(Lucius Sergius Catilina)의 음모를 사전에 차단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부(pater patriae)’의 칭호까지 부여받는 명예를 누렸다. 하지만 키케로는 카틸리나 사건의 공모자를 로마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재판 없이 처형했다는 이유로 기원전 58년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이듬해 원로원의 도움으로 로마로 귀환했지만, 정치무대에서 더는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로마가 철학적·정치적 문제로 쇠퇴하고 있다고 진단한 키케로는 저술 활동을 통해 로마를 국가적 위기에서 구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특히 기원전 55년부터 51년 사이에 플라톤의 대화체를 모방한 『웅변론(De Oratore)』, 『국가론(De Re Publica)』, 『법률론(De Legibus)』을 집필함으로써, 로마의 전통적인 정치적 가치를 회복하는 방법에 관하여 논하였다. 

 

정치에 관한 그의 논의는 국가에 대한 정의에서 출발한다. 키케로에게 국가는 정의(justice)와 공동선을 위한 협력에 동의한 ‘인민의 재산(res populi)’이었다. 여기서 정의는 법을 통해 인민의 권리를 그리고 공동선을 위한 협력은 정치 참여를 통해 인민의 이익을 보장한다. 그 때문에 국가의 목적은 인민의 사유 재산과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는 왕정, 귀족정, 민주정을 인민의 자유와 재산을 보장하는 올바른 정체로, 참주정, 과두정, 중우정을 그렇지 못한 잘못된 정체로 구분했다. 하지만 키케로는 올바른 정체의 장점뿐만 아니라 약점에 관해서도 서술한 뒤, 올바른 정체도 자체적으로 정치적 안정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타락된 형태로 변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런 국가의 근본적인 불안정을 해소하는 해결책은 혼합정이었고, 로마의 공화정은 세 가지 순수한 형태의 좋은 단순 정체가 혼합된 가장 이상적인 정체였다.

키케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위시한 그리스 학자들 특히 폴리비오스의 주장을 수용해서 발전시켰지만, 단순하게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폴리비오스와 키케로의 주장은 비슷하면서도 분명 다르다. 국가의 기원을 인간의 약점에서 발견했던 폴리비오스와 달리 키케로는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사회성에서 찾았다. 또 폴리비오스는 세 개의 단순 정체 간의 견제와 균형을 로마 혼합정, 즉 공화정의 강점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키케로는 이 단순 정체들의 각 요소가 각각의 능력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데서 강점을 찾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폴리비오스는 이상적인 정체인 혼합정도 생물체처럼 탄생, 성장, 번영, 그리고 쇠퇴와 몰락의 과정을 거친다고 보았지만, 키케로는 로마의 혼합정은 조상들이 물려준 완전한 형태의 정부로 영원히 지속할 것이라는 애국주의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키케로는 공화정 후기에 발생한 위기를 분명하게 목격한 정치철학자로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였지만, 윤리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그의 이론은 로마의 정치적 현장에서 외면받았다. 실제로 자신의 시대에 일어나고 있던 공화정의 헌정상의 구조적 위기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그는 그라쿠스 형제 이전의 공화정을 전통적인 가치를 지닌 완전한 형태의 혼합정으로 파악하여, 그 시대의 혼합정을 회복하면 로마는 국가적 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 있다는 다소 도식적인 해결책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 정치가였던 그가 실제로 선호한 정체는 원로원에 기반을 둔 귀족정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이것도 귀족의 자질과 덕성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게다가 인민의 자유를 보장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것이 중우 정치를 초래할 위험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순을 보이기도 하였다. 

물론 당대 키케로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심지어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의 영향력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현재에도 유효하다. 그는 혼합정체론 뿐만 아니라 국가와 정치를 구성하는 자유, 정의, 평등, 재산, 자연법 등과 같은 핵심 개념들을 발전시켰다. 특히 완전한 형태의 혼합정을 회복하는 데 필요하다고 강조했던 그의 두 가지 전제는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키케로는 견제와 균형이 아닌 협조와 통합을 강조하였다. 동등한 권력의 분할 가능성을 의심한 키케로에게 견제와 균형은 국가의 각 요소가 전체의 이익보다는 자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키케로의 공화정은 국가의 각 요소가 서로 경쟁하지 않고 권력을 공유하면서 소통하고 협조하여 통합을 이루는 혼합정이었다. 두 번째 전제는 단순 정체 간의 성공적인 통합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덕을 갖춘 정치가의 필요성이다. 정치는 열정이 아니라 도덕적인 책임이라고 믿는 키케로에게 정치가는 단순히 권력이나 직책을 보유한 자가 아니다. 국가의 다른 요소들이 위임한 역할을 담당하는 자로서,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정치적 이익이 아닌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활동해야 하는 책임을 인식하고 있는 자가 진정한 정치가였다. 

현재 대한민국은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조만간 코로나 백신 1차 접종률이 70%에 이를 것이라고 하지만, 상황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경제적 양극화, 주택 가격의 급등, 인플레이션과 같은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북핵 문제, 주변국의 민족주의, 미국과 중국 간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 등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우리도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수많은 장점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국민의 정치의식과 도덕적 기준은 상당히 높다. 소통과 협조에 의한 통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희생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정치가가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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