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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과 소리를 따라간 청춘의 사랑 이야기 <봄날은 간다>(2001)

계절이 지나가듯 사랑 또한 지나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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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웠던 날씨가 점차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씨로 바뀌자 문득 기자는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온다는 것을 느꼈다. 대학생들에게 여름의 더운 날이 지나가고 가을이 온다는 것은 곧,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강이 다가온다는 의미다. 방학 동안 인턴십으로 바쁜 나날들을 보낸 기자는 개강하기 전 외로운 마음과 바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멀리 떠나고 싶다는 마음을 핑계 삼아 청춘의 사랑과 이별을 담은 허진호(1963~)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2001)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은수: 여보세요.

상우: 네, 여보세요.

은수: 네.

상우: 네, 여기거든요, 여기요. 예, 제가 걸었어요. 안녕하세요, 저 아람 녹음실에서 나왔습니다. 이상우라고 합니다.

은수: 한은수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추운 겨울,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지방 방송국 라디오PD ‘은수’와 함께 작업을 하기 위해 정선 여객버스 터미널에서 첫 만남을 가진다. 첫 만남이지만 오랜 이동에 피곤해서인지 새침한 은수와는 달리 상우는 옅은 미소로 인사를 나눈다. 이 둘은 작업을 위해 첫 번째 녹음 장소인 대나무 숲을 찾아간다. 기자도 삼척의 대나무 숲으로 향했다. 대나무 숲 촬영지가 관광지로 지정되지 않았고, 인터넷에 대략적인 위치만 남아있어 해당 마을 주민분들께 여쭤 겨우 찾아갈 수 있었다. 대나무 숲에 들어가려면 한 민가를 통해 들어가야 했다. 기자는 댁 주인이신 할머니를 마당에서 마주쳤다. 혼자 온 기자에게 할머니는 대나무 숲에 찾아왔냐면서 흔쾌히 지나가라는 허락과 함께 다음에는 여자친구와 함께 사탕 한 봉지 사오라는 농담을 하셨다. 대나무 숲에 들어서자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 잎들이 부딪히는 ‘솨아아’ 소리가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때만큼은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시원한 가을이 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에어컨 바람 때문에 추웠던 사무실과 높은 빌딩이 빽빽이 들어서 있던 뜨거운 거리를 벗어나 자연을 느끼니 거짓말처럼 머릿속이 상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고 그 자리에 앉았다. 상우와 은수는 이곳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기자는 문득 아까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떠올라 괜히 대나무를 흔들어 보았다. 그때마다 대나무는 ‘솨아아’ 소리를 내주었다.

 

▲대나무 숲의 모습
▲대나무 숲의 모습

 

상우: 오늘 소리 따기는 좀 그럴 거 같은데요?

은수: 그러게요. 내일까지 기다려야겠는데?

상우: 아까 뭐 빌었어요?

은수: (미소를 지으며) 까먹었다.

 

상우와 은수는 절에서 들리는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신흥사로 갔다. 하지만 목탁 소리는 커녕 절 내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그들은 절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다음날을 기다리기로 한다. 한밤중 눈보라가 몰아치자 절에 달려있던 풍경 종이 딸랑딸랑 소리를 내기 시작해 녹음을 시작한다. 기자도 신흥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대나무 숲과 도보로 10분 남짓한 거리에 위치해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기자가 신흥사에 도착했을 때, 매미가 우는 소리만 귓가에 들렸다. 상우와 은수가 묵었던 절의 설선당 마루에 걸터앉아 풍경 종소리를 듣기 위해 풍경 종을 가만히 올려다보았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 끝내 종소리는 듣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영화에서 은수가 절을 하고 소원을 비는 모습이 생각 나 대웅전으로 향했다. 대웅전엔 아주머니 한 분이 절을 하고 계셨다. 기자도 조용히 올라가 절을 하고 기자의 작은 소망을 하나 빌었다. 아마 영화 속의 은수도 기자와 같은 간절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신흥사의 모습
▲신흥사의 모습

 

은수: 태워다 줘서 고마워요.

상우: 고맙긴요, 뭘.

은수: 라면 먹을래요?

(중략)

은수: 재밌는 얘기 좀 해봐요.

상우: 라면에 소주 먹으면 맛있는데. 나 재밌는 얘기 몰라요. 원래 썰렁해요.

은수: 재밌다. 자고 갈래요?

 

신흥사에서 녹음을 마친 날 밤, 상우가 은수를 집 앞까지 데려다준다. 은수는 상우에게 라면을 먹고 갈 거냐고 물어보며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 그들은 하룻밤을 같이 보내며 연인이 된다. 상대에게 마음이 있다는일종의 신호를 보내는 말이 된 “라면 먹고 갈래?”가 이 장면을 통해 시작됐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라면 먹고 갈래?”라는 말이 어디서 생겨났고, 왜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 장면을보고 이보다 그 상황과 마음을 잘 전하는 말이 없는 것 같다는 것을 느꼈다. 기자도 숙소로 돌아와 허기진 배와 적적한 마음을 라면 한 봉지로 달래보았다.

 

상우: (상우가 정국의 택시를 타며) 아저씨 강릉!

정국: 이 XX 취했네. 많이 마셨구나?

상우: 정국아,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 강릉 산다.

(중략)

정국: 너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지?

상우: 보고 싶다.

정국: 진짜 멀리도 산다.

 

상우는 회식이 끝난 후 택시 기사인 친구 정국에게 은수가 보고 싶다며 강릉까지 가달라고 부탁을 한다. 정국은 상우가 술에 취했어도 진심인 걸 느껴 강릉까지 데려다준다. 새벽까지 차도에서 상우를 기다린 은수는 상우가 택시에서 내리자 포옹하며 반겨준다. 그들의 연애가 시작되자 계절도 사랑과 같은지 봄이 시작된다. 그들의 옷차림은 한결 가벼워졌다.

 

은수: 상우씨, 이제 뭐 할 거야? 이 일도 끝나 가는데.

상우: 무슨 말이야?

은수: 그냥 끝나 간다구.

상우: 뭐가 끝나는데?

은수: 끝나 간다고, 내 말 못 들었어? 어휴 답답해.

상우: 나 어디 좀 갔다 올게.

은수: 빨리 와서 라면이나 끓여.

(중략)

상우: 은수씨, 내가 라면으로 보여? 말 조심해!

 

여느 연인처럼 행복하게 만나고 있던 어느 날, 상우와 은수는 차 안에서 아무 이유 없이 신경전을 벌였다. 상우는 미안한 마음에 떡볶이를 사들고 은수 집에 왔으나 은수는 아무 말도 없이 상우의 짐을 정리해 두어 둘의 관계가 변했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했다. 상우도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짐을 챙겨 본가로 향했다. 본가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은수의 목소리가 담긴 라디오가 흘러나오자 상우는 자동차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당시 상우와 은수의 옷은 반팔로 변해있었다. 여름이었다.

기자는 상우와 은수가 연인이었을 때 바닷소리를 녹음했던 장소 중 하나인 상맹방 해변으로 향했다. 기자는 약 10년 전 초등학생 때 상맹방 해변에 방문한 적이 있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상맹방 해변에 도착하니 해변에는 거대한 굴삭기와 흙먼지를 날리며 흙을 실어 나르는 덤프트럭, 바다에는 흙을 가득 실은 바지선뿐이었다. 한 공사장 인부께 여쭤보니 부두를 건설 중이라고 하셨다. 기자는해변 모래사장에 발도 들이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공사 중인 상맹방 해변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 들은 상맹방 해변의 시원한 파도 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쇠 부딪히는 소리와 중장비들의 엔진 소리뿐이었다. 상우와 은수의 관계가 변하듯이 상맹방 해변도 같이 변하는 것 같았다.

 

▲공사중인 상맹방 해변의 모습
▲공사중인 상맹방 해변의 모습

 

상우: 잘 지내지?

은수: 어, 하나도 안 변했네. 기억나?

상우: 뭐가?

은수: 그냥.

(중략)

은수: 우리 같이 있을까?

상우: 갈게.

 

상우와 은수는 오랜만에 다시 만난다. 이미 상우는 은수에 대한 마음을 정리했기에 다시 은수를 붙잡지 않았다. 그럼에도 상우는 은수가 붙잡자 아직 일말의 미련이 남았는지 가만히 서서 착잡한 마음으로 생각에잠긴다. 상우는 집으로 돌아와 은수가 불렀던 노래를 들으며 또 한 번 소리를 녹음하러 갈대밭으로 떠난다. 상우의 옷차림새는 긴팔. 가을이 찾아왔다.

기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발을 옮겼다. 버스 정류장에 향하는 중, 기자가 타야 할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고 있었다. 배차간격이 긴 시골이기에 버스를 잡으려고 뛰려는 찰나 상우의 할머니가 상우에게 말해준 대사가 기억이 났다. “버스하고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란다” 기자는 다음 버스를 기약하며 버스를 떠나보냈다. 기자의 옷은 아직 반팔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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