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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에서 싹튼 사랑 <미술관 옆 동물원>(1998)

천천히 스며드는 우리들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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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사랑이란 서로가 첫눈에 반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하루 만에 연인으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보통 우연히 사랑에 빠지는 것은 로또 당첨만큼 어렵다. 우리들의 사랑을 떠올려보자. 처음에는 진전이 없고 운명이 아닌 것 같다고 자책하지만, 결국 서로에게 스며들며 사랑이 싹튼다. 이처럼 이정향(1964~) 감독의 <미술관 옆 동물원> (1998)은 상극이라고 생각하던 남녀가 여러 사건을 함께 겪고, 서로를 배려해가며 성장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군 복무 중인 ‘철수’가 마지막 휴가를 애인과 보내려 ‘다혜’의 집으로 찾아가지만, 다혜는 없고 ‘춘희’만 있다. 철수는 애인을 찾기 위해 그녀의 집에 눌러앉는다. 사랑은 낭만적인 것이라고 믿으며 기다리기만 하는 춘희를 못마땅해하는 철수는 사랑이란 현실적이며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춘희가 쓰고 있던 시나리오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담긴 그녀의 사랑 방식이 탐탁지 않았던 그가 개입해 함께 글을 써 나간다. 춘희는 그녀의 짝사랑 대상 ‘인공’을, 철수는 다혜를 그리며 글을 쓰고, 그 속에서 서로를 변화시킨다. 이 영화는 1998년 작으로 20여 년 전 영화이지만, 기자에게는 아직도 미술관 하면 생각나는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연인을 비롯한 사랑을 꿈꾸던 남녀가 이 장소를 찾았다고 한다. 기자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졌고 서로 다른 사랑을 했던 그들이 어떻게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지 호기심이 생겨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됐던 경기도 과천으로 향했다. 

 

철수 : 야, 너 어디가? 동물원은 이쪽이야.

춘희 : (어이없다는 듯이) 뭐?

철수 : (비웃으며) 놀이동산이나 가게? 미술관? 너 피카소 알아?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냐. 너?

춘희 : 안다! 넌 알아?

 

(중략)

 

철수 : 실컷 봤냐?

춘희 : (비꼬듯) 넌?

철수 : (둘러보며) 오늘 다혜랑 여기 오려고 했었는데…. 야, 미술관 같은 덴 뭐하러 가냐?

춘희 : 그럼 동물원은?

철수 : 비교가 되냐? 그림은 대체…. (절레절레)

춘희 : 네모난 창틀에 보이는 풍경 같잖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중앙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중앙홀

춘희는 조용하고 멋진 작품이 걸려있는 미술관을 좋아한다. 반대로 철수는 역동적인 동물들이 배회하는 동물원을 좋아한다. 이처럼 둘은 사랑 방식 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장소도 다르다. 그들이 머리를 식힐 겸 과천에 갔을 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갈라선다. 기자는 우선 춘희가 가고 싶어 했던 미술관으로 향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여느 미술관과 달리 자연과 함께한다. 미술관 뒤편에 있는 푸른 산들이 겹쳐지는 풍경은 멋진 작품이 되고, 바람의 흐름으로 흔들리는 나뭇잎은 하나의 예술 행위가 된다. 무더위 속 전시를 조심히 살펴보며 춘희가 생각하는 낭만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보이는 모습 그대로 그리는 사실화가 철수가 바라는 현실이라면, 거대한 캔버스에 그린 추상화는 춘희가 말하는 환상과 낭만이다. 작품 옆에 있는 캡션이나 팸플릿을 보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지만, 어떠한 설명이 없다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짝사랑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춘희는 결혼 비디오 촬영기사를 하면서 우연히 만난 보좌관 인공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얼굴만 마주쳤을 뿐, 어떠한 대화도 하지 못하고 다가가지도 못한다. 기자는 여러 추상 작품과 현대 미술을 관람하며 춘희의 사랑은 어렵고 복잡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철수도 사랑은 현실이라고 했지만, 그녀의 사랑 방식만큼 힘들고 지친 과정의 연속이었음을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춘희 소리 : 그녀는 기대하는 것이 많지만, 원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성격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무슨 일이 일어나 주길 기대하며….

 

철수 소리 : 그는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과거에 대한 그리움도 미래에 대한 설렘도 없는‘서인공’은….

 

▲서울대공원 동물원 영화 촬영지
▲서울대공원 동물원 영화 촬영지

전시를 다 본 뒤, 기자는 미술관 바로 옆에 있는 서울대공원(동물원)으로 향했다. 체감 온도 38도에 육박하는 날씨라 그런지 이 공간엔 함께 온 친구와 동물 그리고 기자밖에 없었다. 동물들도 뜨거운 햇볕에 지쳐 모두 그늘로 피신하거나 시원한 물속에 풍덩 빠져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일상에선 보기 힘든 사자, 호랑이, 원숭이들이 눈에 띄었다. 아마 철수는 정지된 그림을 사랑하던 춘희와 달리 이런 동물을 좋아했을 것이다. 사랑엔 낭만 따윈 없다는 신념으로 지나치게 현실적인 그였기에 눈에 실재하는 대상을 보려고 했던 것 같다. 귀여운 동물들을 뒤로하고 영화 촬영장소에 도착했다. 사실 이 공간에서 춘희와 철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이 쓴 시나리오에 나오는 인공과 다혜가 출연한다. 인공은 우주와 동물을 사랑하는 동물원 수의사이다. 조용한 성격이기에 다혜에게 무뚝뚝하다. 다혜는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며, 취미로 자전거를 탄다. 그녀는 자전거 타기를 핑계로 인공을 만나려 노력한다. 우연히 인공과 데이트했을 때, 인공은 밤하늘이 어두운 이유를 통해 연인 사이로 발전할 수 없다는 말을 넌지시 던진다. 하지만 그녀는 두꺼운 우주 서적을 보면서 그의 관심사에 공감해주고 배려해준다. 이를 통해 그는 잘 타지 못하는 자전거를 끌어보며 애틋한 관계가 된다. 철수와 춘희도 자신들이 쓴 시나리오처럼 처음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멀어지려 애를 썼지만, 결국엔 사랑의 열매를 맺었다는 것에서 기자는 관계란 알 수 없는 추리 소설 같다고 느꼈다. 

 

인공 : 밤하늘은 가을이 멋있죠. 밝지는 않지만, 별들이 인디언 집들처럼 띄엄띄엄 있거든요.

다혜 : 전 밤하늘에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게 좋아요. 꼭 초코칩 아이스크림 같거든요.

인공 : (의외의 표현에 빙그레) 그거 알아요? 다혜씨, 처음으로 자기의 생각을 말했어요.‘누가 그러는데’, 뭐뭐 해요’ 하지 않고,

다혜 : (보지 않았지만) 그거 아세요? 인공씨, 처음으로 웃었어요.

 

▲야외조각공원 앞 갈림길
▲야외조각공원 앞 갈림길

기자는 동물원 후문으로 나와서 아쉬운 마음에 과천 인근을 탐사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두 갈림길을 찾아보자는 목적 하에 더운 날씨와 함께 여정을 떠났다. 여기저기를 뒤져봤지만, 그 장소는 찾을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영화를 다시 돌려봤다. 영화를 보다 보니 굉장히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기억을 되뇌어보며 찾은 결과, 미술관 앞에 있는 야외 전시실이었다. 동물원과 미술관이라는 장소를 간결하게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찍은 것 같았다. 영화에 등장하던 가로등도 없었다. 대신 영화의 OST를 들으며 그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그들이 처음에 도착했을 땐 서로 갈라섰다. 하지만 철수는 군 복귀를 하기 전 편지를 남기고 떠났고, 춘희는 그 글을 읽고 바로 과천으로 달려갔다. 철수는 마지막으로 미술관에 갔고, 춘희는 동물원으로 곧장 향했다. 허탈한 마음에 동물원을 나갔을 때 철수를 만나게 되고, 철수의 고백으로 사랑을 하게 된다. 철수가 미술관을 향했듯, 춘희가 동물원으로 향했듯 사랑은 서로의 배려와 관심의 연속임을 깨달았다. 

 

춘희(독백) : (한숨을 크게 쉬고 자신에게)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건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릴 수 있는 건 줄은 몰랐어….

 

▲춘희가 손으로 액자를 만드는 장면
▲춘희가 손으로 액자를 만드는 장면

기자는 미술관부터 시작해 동물원을 지나 갈림길 여정을 모두 마치고 지친 몸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카메라 안에 찍힌 사진들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의 연출은 1990년대 말의 풋풋한 감성을 상기시킨다. 카페에서 담배도 피울 수 있었던 거리감 있는 시기지만, 그들의 사랑과 생각은 변함없이 공감대를 얻기 쉬웠다. 처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시기는 춘희와 같고, 여러 시련과 변화를 겪은 시기는 철수와 같다. 춘희의 독백처럼 우리는 사랑이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줄만 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옆에 멋진 남자친구나 예쁜 여자친구가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화선지에 먹이 스며들어 까맣게 퍼지듯이 우리의 관계도 그럴 것이다. 한 번 손으로 액자를 만들어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길 추천한다. 춘희가 철수에게 말했듯, 자세히 보면 모든 것이 의미 있고 소중한 것이라는 걸…. 옆에 있는 친구, 연인, 가족 모두 서서히 스며든 우정이자 사랑이다. 기자는 사랑과 만남에 있어서 풍경화 같은 현실과 추상화 같은 낭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동물처럼 실재하는 현실과 일상에서 만나기 어려운 사자처럼 환상이 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 낭만적인 사랑과 현실적인 사랑이 있길 간절히 기도하며 마무리하겠다. 

 

철수 : 뭐해?

춘희 : 응? (하며 철수 얼굴을 프레임으로 잡아본다)

철수 : 뭐하냐니깐?

춘희 : 이렇게 하면 다 의미가 있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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