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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待秋)와 비추(悲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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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待秋)하다’와 ‘비추(悲秋)하다’에 대해서 아는가? ‘대추하다’는 가을을 기다리다는 뜻이다. 우리가 추석 때 먹는 대추 열매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비추하다’는 가을철을 쓸쓸하게 여겨서 슬퍼하다는 뜻이다. “이 영화는 지루해서 비추한다”에서 ‘비추’라는 의미와는 거리가 먼 단어이다. 기자는 벚꽃이 활짝 피는 봄에 풋풋한 감정으로 수습기자가 됐다. 그리고 다행히도 나뭇잎이 붉어지는 가을까지 기자로서 활동 중이다. 기자는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에 대해 명확한 호불호가 없다. 마치 선과 악 사이에 있는 신인 아브라삭스(Abraxas)처럼 호와 불호 중간에 서 있다. 가을은 선선하니 산책하기 좋으며, 장롱 속에 묻혀 있던 트렌치코트를 입을 수 있는 좋은 계절이다. 그 외에도 알록달록해진 설악산을 볼 수 있는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가을을 싫어하는 이유는 바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까지 기자실에서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두꺼운 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면 소름이 돋는다. 수강신청은 어떻게 하는지, 수업은 어떻게 듣는지 등 대학 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새내기 기자는 어느새 비대면 수업에 적응한 기자가 되었다.

시간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아무리 돈이 많고 인기가 있고 똑똑해도 시간은 기자에게도 독자에게도 공평하다. 시곗바늘이 강강술래를 하며 원을 크게 돌 때, ‘오늘 무엇을 했을까?’라고 고민을 한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없다고 느끼면 우울해진다. 내일도 똑같을 것으로 생각하면 더욱 슬퍼진다. 그렇기에 기자는 시간을 증오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소한 것부터 집중해보면 우리는 많은 것이 변했음을 안다. 기자를 예로 들어보겠다. 예전에는 뉴스와 신문에 관해 관심이 없었다. 오직 대학과 입시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기자가 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다. 본교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까? 오늘은 어떤 속보가 나왔을까? 등을 계속 생각하고 찾아본다. 기자라는 신분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미술관에서 작품으로만 만나 볼 수 있는 유명작가를 본다거나 기자와 거리가 먼 학우와 대화할 수도 있다. 이처럼 멀리서 볼 때는 빈약한 발돋움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섬세히 살펴본다면 거대한 발자국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다고 자책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조금이라도 발전했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에 쫓길 필요도 없다. 대한민국은 특이하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구속이 많아진다. 10대는 입시를 해서 무조건 대학에 가야 하고, 20대는 빨리 취직을 해야 하고, 30대는 좋은 배우자를 찾아 아이를 낳아야 하고, 40대는 현실에 안주해야 하고…. 나이의 족쇄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이유는 시간을 두려워해서다. 시간 앞에서 담담해져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변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가을엔 나뭇잎이 붉어지고, 밤알이 단단해지듯이 변화는 당연하다.

곧 있으면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온다. 옷을 이것저것 껴입어도 추운 계절이 되면 기자는 오들오들 떨면서 기사를 쓰고 있을 것이다. 기자가 현실을 부정해도 시간은 꿋꿋하게 지나간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계절이 변해가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한마디로 비추하기보단 대추해야 한다. 낙엽은 시간이 흘렀음을 확인하는 대상이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며칠만 지나면 홍대 캠퍼스는 가을빛으로 물든다. 그때가 되면 ‘난 이만큼 성장했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꿋꿋이 시간의 흐름을 타며 나아가야 한다. 무엇이든 하다 보면 성장하고 발전한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홍대 학우들은 분명 가을과 변화를 슬퍼하기보다는 기대하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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