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나를 비춰주는 수많은 별들에게 고마움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생각해보면 주위에 감사한 사람들이 정말 많다. 소중한 시간을 내어 나를 도와준 사람들, 일면식도 없는데 흔쾌히 조언해준 사람들까지.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단 한 사람의 도움이라도 없었다면 분명 인생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이를 알고 있음에도, 가끔 일이 잘 풀릴 때 나의 업적만을 생각하다 나를 도와준 사람들을 잊을 때가 있다. 이에 대해 영화 <라디오 스타>(2006)는 하나의 메시지를 던진다. 사람은 절대 혼자서 빛날 수 없다는 것을. 

 

‘이젠 괜찮은데, 사랑 따윈 저버렸는데. 바보 같은 난, 눈물이 날까.’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2021) OST로 리메이크 되기도 한 <비와 당신>은 이 영화에서 처음 유명해진 노래다. 영화 <라디오 스타>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1988년 당시, 본인의 히트곡 <비와 당신>을 부르는 ‘최곤’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최곤은 한때 가수왕까지 수상한 스타였지만, 지금은 마약과 폭행 혐의 전과에, 툭하면 폭행을 일삼는 사고뭉치다. 그럼에도 최곤이 유명해지기 전부터 매니저 일을 해온 ‘민수’는, 20년간 최곤이 친 사고를 수습하고 돈을 빌려 합의금을 대주며 그의 옆을 지킨다. 어느 날, MBS 방송국 ‘김 국장’은 최곤에게 자체 프로그램도 없는 MBS 영월지국의 라디오 DJ를 맡기려 한다. 아직도 본인이 최고라고 믿는 최곤은 지방 방송국이라며 거절하지만, 민수의 설득에 못 이겨 함께 영월로 간다. 

▲라디오 부스 벽에 붙어있던 엽서들
▲라디오 부스 벽에 붙어있던 엽서들

기자도 영월로 향했다. 높이 솟은 건물과 차로 가득 찬 도로를 지나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느덧 푸른 산이 가득한 풍경이 펼쳐졌다. 간만에 마주한 자연 풍경에 차창을 내려 바람을 만끽하다 보니 어느새 라디오스타박물관에 도착했다. 본래 KBS 영월방송국이었으나, 지금은 <라디오 스타>를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박물관을 향해 걸어가다가 한적한 분위기에 자연스레 주변 풍경을 바라보게 됐다. 박물관 앞으로는 우거진 나무 사이로 동강(東江)이, 그 건너편에는 영월역이 보였다. 15년 전 영화와 변함없는 풍경이었다. 박물관 안에 들어서니 1층에는 라디오의 역사가 정리되어 있었고, 2층에는 라디오 부스와 당시 음반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라디오 부스 벽에는 당시 청취자들이 방송국으로 보냈던 엽서들이 붙어있었다. 사연이 담긴 엽서를 읽다 보니, 기자가 한때 라디오에 푹 빠져 mp3를 들고 다니며 인터넷으로 사연을 올리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최곤: (건성으로) 처음이라는 말처럼 설레는 단어가 있을까요? 첫 울음, 첫눈, 첫 만남, 첫 데이트, 첫 키스. 언젠가 추운 겨울날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갈 때…. 영월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 최곤입니다. 가수왕 최곤, 88년도. 제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와서 DJ를 하게 됐습니다. 뭐, 이왕 하는 거, 엽서도 좀 많이 보내 주시고요, 또 신청곡도 보내 주시고요. 봐서 쓸 만한 거 있으면 틀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최곤은 방송 첫날부터 ‘강석영’ PD가 써준 대본을 무시하고, 후배 가수 ‘장훈’과 생중계로 한 전화연결에서 장훈과 대판 싸우는 사고를 친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라디오에 애착이 없는 최곤은 라디오 진행 중에 청록다방에서 배달을 시켜 커피를 마신다. 그러다 청록다방에서 커피 배달을 온 ‘김 양’에게 라디오 진행을 맡긴 채 부스를 나가버린다. 그런데 오히려 김 양이 어머니에게 전하는 솔직한 고백 덕분에 프로그램이 더 유명해진다.

 

김 양: 엄마, 나 선옥이. 엄마 잘 있나? 이거 들리나? 어…. 엄마, 비 오네? 기억나? 나 집 나올 때도 비 왔는데. 엄마 그거 알아? 나 엄마 미워서 집 나온 거 아니거든. 그때는 내가 엄마 미워하는지 알고 있었는데, 집 나와서 생각해 보니까 세상 사람들은 다 밉고 엄마만 안 밉더라? 그래서, 내가 미웠어. (중략) 엄마, 보고 싶어.

 

▲청록다방
▲청록다방

최곤은 프로그램이 끝나고 들른 청록다방에서 김 양에게 라디오 방송에서 말할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열고 성심성의껏 라디오를 진행한다. 기자는 최곤에게 변화의 계기가 된 청록다방을 찾았다. 내부 배치가 조금 바뀌긴 했지만, 정감 가는 인테리어는 그대로였다. 옛 분위기가 물씬 나는 다방은 라디오와 제법 잘 어울렸다. 기자는 그 자리에서 핸드폰을 꺼내 라디오를 들었다. 솔직한 마음이 담긴 사연과 이에 맞게 흘러나오는 신청곡은 기자가 몇 년 전 푹 빠졌던 라디오의 매력을 상기시켜줬다. 라디오가 등장한 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라디오 방송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김 양의 사연처럼 사람들이 전하는 ‘솔직함’ 때문이 아닐까. 

▲별마로천문대
▲별마로천문대

얼마 후, 최곤의 재치 있는 진행으로 프로그램의 인기가 치솟자 최곤의 방송을 서울로 이관하자는 얘기가 나온다. 한편, 민수는 유명 가수들을 관리하는 기획사 ‘스타 팩토리’의 ‘최영도’ 사장을 소개받는다. 민수는 ‘최곤에게 걸림돌이 되겠냐’는 최 사장의 말을 듣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마음은 복잡했지만, 민수는 아무 일도 없는 척 최곤과 별을 관찰하러 천문대로 향한다. 기자 또한 촬영지인 별마로천문대를 찾았다. 오후 시간대에 방문해 밤하늘의 별은 볼 수 없었지만 내부 투영실 안에서 오늘 밤 뜨게 될 별을 시뮬레이션으로 볼 수 있었다. 기자는 마치 지금 하늘에 뜬 별이 떠있는 것처럼 고개를 올려 별들을 관찰했다.

민수: 별은 말이지,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거의 없어.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 

 

위 대사는 사실성 논란으로 유명해진 대사이기도 하다. 별은 천문학적으로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이기에, 엄밀히 따지면 맞는 대사는 아니지만 요지는 충분히 파악된다. 민수는 이 말을 통해 최곤이 빛날 수 있게끔 본인이 항상 함께했다는 것을 말하며, 민수 본인도 최곤으로부터 도움을 받았기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민수가 최곤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기 전, 최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긴 것일 수도 있다. 

민수는 모텔 방으로 돌아와 최곤에게 서울로 떠날 것이라 선포하고, 최곤은 민수가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려고 자신을 배신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최곤은 그냥 가버리라며 민수를 쫓아내고, 민수는 서울로 떠난다. 기자는 그들이 머물던 청령포모텔 앞을 지나며, 마치 모텔에서 방금 쫓겨난 사람인 양 정처 없이 걸었다. 문득 영화 대사 중, 최곤이 민수에게 따지듯 ‘형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라고 묻자 민수가 ‘그러니까 간다고’라고 대답했던 것이 생각났다. 아마 민수는 20년간 최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에, 최곤은 민수에게 짐만 준 것 같다는 생각에 서로 미안해했을 것이다. 최곤과 민수가 모텔 방 안에서 서로에게 날이 선 말을 뱉었던 이유는 상대에게 미안한 감정을 넘어 스스로에게 화가 났기 때문이지 않을까? 

 

석영: 당장 내일부터 영월에서 전국으로 송출한다고요,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 못 알아듣겠어요? 혹시 아저씨 때문에 그래요?

최곤: 민수 형 얘기 꺼내지 마. 그 형 내 앞에서 가오 잡은 거 빼고는 아무것도 한 거 없어. 알아?

석영: 아니요! 선배 이날 이때까지 스타로 살았잖아. 망가져서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어도 스타로 살게 해 줬잖아!

 

(중략)

 

최곤: (라디오를 진행하다가) 저도 사람 한 명 찾겠습니다. 이름은 박민수. 나이 마흔여섯. 형…. 민수 형, 돌아와. (중략) 천문대에서 별 볼 때 형이 그랬지? 자기 혼자 빛나는 별 없다고. 와서 좀 비춰 줘라, 응? 우리 반짝반짝 광 좀 내보자. 

 

▲<라디오 스타>의 엔딩 장면
▲<라디오 스타>의 엔딩 장면

최곤은 민수가 자신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최영도 사장이 민수가 떠나게끔 부추겼음을 알게 된다. 최곤은 미안함을 느꼈지만, 그래도 민수가 본인에게 해준 것이 없다며 괜한 말을 뱉는다. 하지만 결국 석영과의 대화를 통해 항상 곁에 있어줬던 민수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민수는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라디오 속 최곤의 말을 듣고 다시 영월지국으로 돌아온다. 여느 때와 같이 방송국 앞으로 담배를 피우러 나온 최곤에게, 민수는 변함없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우산을 기타 삼아 노래를 부르며 다가선다. 그리고 민수는 비를 맞고 있는 최곤 위로 우산을 펴준다. 영화는 그렇게 마무리된다. 

기자는 영화의 엔딩이 기억에 남아 돌아오는 길에 그 장면을 계속 떠올렸다. 그러면서 기자를 도와줬던 많은 이들을 생각했다. 문득 무뚝뚝한 성격 탓에 고맙다는 말을 많이 못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들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용기 한 번은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기자를 도와줬던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돌렸다. 쑥스러운 마음에 메시지를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지만 말이다.

SNS 기사보내기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

하단영역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