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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번호 3497, <베틀 부속 일괄>, 제작시기 미상, 나무 · 금속 · 섬유

박물관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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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번호 3497, <베틀 부속 일괄>, 제작시기 미상, 나무 · 금속 · 섬유
소장번호 3497, <베틀 부속 일괄>, 제작시기 미상, 나무 · 금속 · 섬유

아마도 베틀 부속품은 한국에 있는 어느 박물관에서나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는 흔하디흔한 유물이 아닐지 모르겠다. 특히 ‘바디’와 ‘북’은 꼭 박물관이 아니더라도 음식점이나 가정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민속품이기도 하다.

필자는 어렸을 적에 집안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작은 나무 보트 모양의 ‘북’을 봤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그 물건이 베틀 부속품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던 데다가, 그 안에는 항상 명함이나 필기구 따위의 작은 물건 등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우습게도 그 물건은 필자의 머릿속에 모양이 이상하게 생긴 수납 용기로 기억되고 있었다.

어른이 되어 박물관 이곳저곳에서 일하게 될 때마다 수장고에서 공통적으로 목격하는 유물이 바로 이 베틀 부속품들이었다. 지금은 쓰지 않는 베틀의 부속품들이 이렇게 현재 우리 생활 이곳저곳에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베틀이 있었고 그것이 또 해체되어 곳곳에 퍼져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다. 이 정도라면 조금 과장 섞어 집집마다 하나씩은 있지 않았을까 싶다.

1950년대까지도 베틀은 한국 여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 중 하나였다. 조선시대의 ‘소학’은 아예 여성을 조리와 직조(織造)하는 존재로 규정하였고, 특별히 귀한 가문의 여성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여성은 두 노동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조선 후기 길쌈 노동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역사 자료가 있어 흥미롭다. 

‘군포세’는 군역을 지내는 대신 무명(천)으로 내는 세금을 말한다. 조선은 원래 16세에서 60세까지의 장정은 모두 군역을 지게 되어 있었다. 이 제도는 조선 후기에 와서 군역의 의무는 그대로 남지만, 실제 군대는 직업군인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반을 제외한 남성들은 모두 직접 군역을 지는 대신 1인당 2필의 군포를 납부해야만 했다. 조선은 보통 대가족이었고 만약 한 집안에 남자 장정이 6명이 있다면 12필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군포를 못내고 달아나면 ‘족징’이라고 해서 친척들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에게까지 못 받은 만큼 징수하였다. 징수가 얼마나 가혹했던지 자살하는 사람, 달아나는 사람 등 별별 사람이 다 있었고, 급기야 마을 하나가 송두리째 없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고된 노동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길쌈의 결과물들은 그야말로 한과 눈물의 응집물이었다고 해도 과장됨이 없는 것이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 이상하게 생긴 수납용기로만 생각했던 ‘북’이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물건의 일부라고 생각하니, 새삼 다르게 보이기까지 한다. 어른이 되어 박물관에서 일하면서도 흔한 유물이라고 관심을 덜 주었던 것이 안타까워 괜스레 수장고에서 한 번 더 쳐다보고 쓰다듬어 보게 된다. 다른 박물관의 수장고에서든 홍익대학교박물관 수장고에서든 이 많은 베틀 부속품들이 각기 어떤 사연들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여인의 한과 슬픔, 시집살이를 대표하는 유물로서 스토리를 이어나가기에는 너무 무자비한, 알고 보면 부조리하고 모순된 사회를 대표했던 유물로 봐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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