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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홍대 학・예술상(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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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부문

최우수상 이주영 (교육학과 4) 

「은주 언니에게」

우수상    이정훈 (정보컴퓨터공학부 3) 

「그녀」

우수상    조경혜 (영어교육과 3)

「·–– ·」

 

최우수 

「은주 언니에게」

은주 언니에게

 

 안녕하세요, 언니. 정말 오랜만에 연락해보는 것 같네요. 제가 한국을 뜬 지도 이제 사 년이 넘었으니 햇수로 따지자면 오륙 년쯤 됐나요?

 아마 이 메일 알림이 뜬 걸 보고서 언니도 많이 당황했겠죠. 이제 와서 얘가 왜?이런 생각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 구태여 잘 사냐는 둥 저는 지금 이렇게 지낸다는 둥하는 그런 시답잖은 얘기는 삼가할게요. 언니가 불편할 테고, 언니가 불편하다면 아마 저도 불편할 테니까. 그치만 다 떠나서 그냥 그동안의 언니가 잘 지내왔다면,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동안의 언니가 제가 알고 지내던 은주 언니답게 살아올 수 있었다면 그것만큼 마음이 편해질 일도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언니가 이 메일을 끝까지 읽어줄지조차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아예 열어보지도 않고 삭제해버릴 수도 있겠죠. 저조차도 이걸 쓰면서 ‘내가 이 메일을 정말 언니에게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요. 하지만 만약 언니가 지금 이걸 읽고 있다면 제가 이 메일을 보낼 결심을, 그리고 이 이야기를 언니에게 해드릴 결심을 드디어 했다는 거겠죠. 혹여나 그렇다면 저는 언니가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기만을 바랄게요. 당연하지만 이건 언니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니까요.

 그럼 시작할게요.

 언니가 기억을 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빠른년생이에요. 그래서 법적으로 성인이 되지 않았을 열아홉 때에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죠. 이십 대 후반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에 와서야 느끼는 거지만 그때는 한두 살 나이 차가 굉장히 크게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그런가, 당시에는 몰랐지만 남들보다 조금은 어리숙한 면이 있었던 것도 같아요. 물론 사람에 따라 개인차는 있겠지만요. 그냥 그때의 제가 너무 어렸던 거겠죠.

 여하튼 대학교에 처음 입학하면 낯선 것들투성이잖아요. 수강신청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시간표는 어떻게 짜는 게 좋은지, 사람들은 어떻게 만나고 또 어떻게 친해져야 하는 건지 같은 것들 말이에요. 게다가 저는 마지막 정시 추합으로 간당간당하게 합격을 한 케이스라 입학통지서를 받았을 즈음엔 이미 새내기배움터나 학과 오리엔테이션 같은 건 전부 끝나있을 때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대학생으로서 학기 초에 알아야 할 것들은 하나도 몰랐던 것 같아요. 그래도 학교는 꾸준히 나왔어요. 교내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거나 강의동을 물어보면서요. 단체 카톡방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간간이 올라오는 정보들도 요긴하게 활용했죠.

 그러다 처음으로 나갔던 과행사에서 상욱 오빠랑 은주 언니를 만난 거예요. 그때 오빠랑 언니는 제 맞은편에 앉아있었죠. 그 전 술자리에선 지나치게 과격하거나 어찌 보자면 조금은 무례한 행동들을 일삼았던 고학번 선배들과 함께 술을 마셨던지라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었는지 오빠와 언니를 보면서는 

‘아, 이 사람들은 이전 사람들과는 달리 참 차분하고 다정한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어쨌든 그 즈음 오빠와 언니는 신입생들 중에서 문과대학 밴드부에 들어올 만한 세션 연주자를 찾고 있었어요. 그리고 마침 저는 잘은 못 했지만 베이스를 칠 줄 알았죠. 그 길로 전 밴드부에 들어갔고 사실 그때부턴 마음이 조금 놓였어요. 이제부턴 학교를 다니는 게 조금은 편해지겠다 생각했거든요. 실제로도 언니가 많이 도와준 덕택에 과생활을 비롯한 학교 생활이 전체적으로 훨씬 나아지기도 했구요. 그 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언니에게 고마운 마음을 많이 갖고 있어요. 무엇보다 언니는 제가 학교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친해진 선배였으니까요. 지금이야 어찌 됐든 간에 … …

 

*

 

 그러니까 그것은 한동안 주춤거리던 시베리아 기단이 재차 엄습하며 옷장에서 봄옷을 꺼내들었던 우리들을 당황케 했을 3월 초 즈음의 일이다. 그 무렵 나는 흔히들 ‘사망년’이라는 자조적인 별칭으로 불리곤 하던 3학년 1학기에 첫 발을 내딛었었다. 과연 선배들에게서 익히 들어왔던대로 초장부터 많은 과제들이 쏟아져 내렸다. 개인 및 팀별 발표 과제와 학술논문 요약, 논증적 에세이나 소논문 작성, 연구기관 방문과 전문가 인터뷰잉 등등. 대학생이라면 한 번씩은 해보았을 과제의 모든 형식들이 한 학기 안에 밀집되어 있었다. 때문에 학기 초부터 나는 그날 해야 할 과제나 학업 일정들을 하나하나 플래너에 적어두고 그 준칙에 따라 내 추후 행동을 결정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밴드부에서 아주 탈퇴하지 않았던 건 당연히 내가 싱어송라이터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론 같은 과 동기였던 상욱과 형철 때문이었다. 내가 나가게 되면 여성 보컬 자원이 하나도 없어진다며 사정사정 매달린 덕에, 그리고 그 당시 나와 만나고 있던 형철이 데이트를 하면서도 수시로 내게 부탁을 해왔던 덕에, 결국 나는 마지 못해 밴드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신입생 세션 자원을 데려올 목적으로 상욱과 함께 개강총회에 나가게 됐다. 원래는 형철도 함께 하기로 했으나 전날 급하게 잡힌 팀플 모임과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아무래도 가지 못하게 될 것 같다고 그는 우리에게―정확히는 내게 카톡으로―양해를 구했다.

 어쨌든 간에 그 정신없던 2차 술자리에서 나는 처음 현지와 얼굴을 마주했다. 현지는 이름이 주는 뉘앙스답게 얼굴은 반반했지만 약간은 날카로워 보이는 고양이상이었다. 굳이 품종으로 따지자면 노르웨이숲 같은, 우아하고 도도한 인상이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몇 번인가 대화를 하며 같이 시간을 보내자 이 아이가 순하고 때로는 조금 어벙하고 그래서 되려 귀여워 보이는, 그런 타입이라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빠른년생이라는 사실도 그 아이의 그러한 모습, 말하자면 순진하고 귀여워 보이는 인상에 한몫했다.

 그러다 우리가 밴드 멤버를 구하고 있다는 말을 꺼내자 현지는 자신이 베이스를 칠 줄 안다며 즉각 반응해주었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함께 소맥을 마시며 번호를 교환했다. 다다음날 간단한 오디션을 치른 후엔 곧장 그녀를 세컨드 베이스로 들여왔다.

 그 뒤로 우리는 D동 건물 지하의 퀴퀴한 연습실과 합정역 인근의 비좁은 합주실을 드나들며 차근차근 여름 정기공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학교 공부와 더불어 따로 개인 앨범 발매를 준비하고 있던 내 사정을 고려해 나는 딱 두 곡 정도만 함께 하기로 했다. 드럼과 베이스를 맡고 있던 형철은 자신이 드럼으로 들어가는 곡에 현지를 세우기 위해 그녀에게 정기적으로 베이스를 가르쳐주었다. 다행히도 현지의 기본 실력이 나쁘지 않았기에 연습의 진척도는 공연을 치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진행이 되었고 덕분에 단과대 학생들의 기말고사가 대부분 끝났을 유 월 하순 무렵에는 무사히 정기공연을 끝마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에이브릴 라빈과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곡을 편곡하여 불렀고 상욱은 직접 일렉을 연주하며 오아시스와 콜드플레이의 곡을 불렀다. 관객들도 대부분 지인이긴 했지만 홍대 라이브 클럽의 스탠딩 자리를 가득 메울 정도로 많았으니 나름대로 성공적인 정기공연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공연을 마치고 난 후 우리는 매년 그랬듯이 2학기가 들이닥치기 전 동해로 기념여행을 가기로 했다.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의 발단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

 

 … … 그날. 아마도 금요일 다섯 시 즈음이었죠? 저희는 각자 할 일을 끝내고 반포의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났을 거예요. 그리고 멤버들 중에서 저녁까지 따로 일정이 있었던 사람들은 다음날 아침에 버스를 타고 합류하기로 했던 걸로 기억해요. 그게 타과 멤버들 두어 명과 형철 오빠였죠. 사실 그래서 저는 왜 언니가 굳이 토요일에 형철 오빠와 같이 오지 않는 건지 약간은 의아해 했었어요. 혹시 둘이 싸운 건가? 설마 헤어지지는 않았겠지? 같은 유치한 걱정도 조금은 했던 것 같구요.

 어찌 됐든 상욱 오빠와 언니, 저, 그리고 다른 멤버들은 (이분들 이름은 이젠 전혀 기억이 나질 않네요) 모여서 함께 버스에 올라탔어요. 속초의 터미널에서 내렸을 땐 거의 여덟 시가 되기 직전이었죠. 그다지 이른 시간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버스 터미널에서 바로 택시를 타고 숙소로 정해두었던 리조트에서 체크인부터 마쳤어요. 짐들을 내려놓고 나왔을 즈음엔 다들 배가 고팠던지라 우선은 회와 술을 먹고 밤바다를 보기로, 그리고 거기서 불꽃놀이를 하고 간단하게 맥주를 좀 더 마시기로 의견을 좁혔어요. 그래서 타과 멤버 중 한 분이 미리 알아두었던 해수욕장 근처의 횟집까지 걸어갔었죠.

 그렇게 한 십오 분인가를 주욱 걸었던 것 같아요. 상욱 오빠와 다른 멤버들이 앞장을 서고 있었고 언니와 제가 그보다 조금 뒤편에서 팔짱을 끼고 따라걷고 있었죠. 우리가 좀 걸음이 느렸으니까요. 그때 함께 낡은 주택가나 오래된 상가들,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횟집과 조개구이집들을 가로지르며 언니는 낮은 목소리로 제게 얘기했었죠. 왜 이번 공연에서 언니가 두 곡까지밖에 참여를 하지 못했는지, 어째서 믹싱을 끝내고 마스터링 작업만 남았는데도 개인 앨범 발매를 계속해서 미루고 있는 건지, 그런 속사정들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거 같아요. 언니가 제게 직접 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던 게. 당연하지만 저는 기뻤어요. 누군가와 속앓음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에게 대견했거든요. 야 배현지 정말 많이 달라졌네, 하고 스스로를 토닥일 수 있었어요.

 혹시 그날 바닷가 모래밭에 앉아서 했던 이야기 아직 기억해요?전 지금도 때때로 그날 그 해변에서 쏟아지듯 들려오던 파도 소리, 구름이 끼어있는 틈새로 보이던 하현달과 흐릿한 별 무리들, 잔잔하게 불어오던 해풍의 내음이나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던 모래알갱이 같은 것들을 기억해요. 안온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짙은 남빛 바다나 모래사장 한가운데 놓여있던 하트 모양의 조악한 기념물, 그 주위에서 우리 멤버들이 들고 다니던 불꽃놀이 스틱 같은 것도요.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다 보면 가끔씩은 그날이, 우리가 속초에서 보냈던 그 짧은 하루가, 절실하게 그리워져요.

 하지만 언니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날에 대한 상상은 아주 아련하고도 포근한 기억의 입구를 지나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마치 그게 어떤 당위라도 된다는 듯 그 다음날의 끔찍한 기억으로 다다른다는 것을 말이에요. 그런 야누스적인 양의성이 저를 괴롭게 해요. 차라리 그때의 기억들이 모조리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것투성이였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겠죠. 어쩔 수 없는 게 맞겠죠. 왜냐면 이미 일어나버린 일은 일어나버린 것이고, 그런 류의 일은 어떻게든 되돌릴 수 없는 거니까……

 

                                          *

 

 그때 우리는 해변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모래사장에서 싸구려 담요를 덮고 앉아있었다. 현지와 나는 꽤 취해있었고 그랬기에 함께 맥주캔을 부딪치며 서로에 대한 이야기, 말하자면 살면서 어느샌가 곪아버린 무언가들에 대해서 하나 둘씩 꺼내 보일 수 있었다. 그날 나는 그동안의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했다. 내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들어주며 한참을 끄덕이고 말없이 위로해주던 현지는 이윽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언니.”

 “응.”

 “있잖아요. 저는 이런 게 처음이에요.”

 “어떤 게?”

 물으면서 무심코 나는 고개를 살짝 틀어 현지의 옆얼굴을 들여다봤다. 사방에 드리워져 있던 어둠 때문에 확실치는 않았지만 분명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 싶었다. 그저 입꼬리가 살짝, 아주 살짝 내려가 있을 뿐이다.

 “제가 몰랐던 사람들과 친해지고, 그 사람들과 여행을 오고, 누군가에게 이런 것들을 듣고, 또 털어놓고 하는 게 저는 처음이에요.”

 나는 현지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끄덕임에 용기를 얻었는지 현지는 엷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곤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거지만…… 아니, 사실은 말을 못했던 거였죠.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저 한국에 들어온 지 이제 겨우 이 년 정도밖에 안 됐어요. 원래는 브리즈번이란 곳에서 살았구요.”

 “브리즈번?”

 “네. 호주 말고,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처에 있는.”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멀찍이서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부스러진 쌀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소리다.

 “정말, 정말 작은 마을이에요. 우리나라로 치자면…… 제가 한국을 우리나라라고 하는 것도 조금 웃기긴 하지만 어쨌든 아무리 잘 쳐줘도 읍내 정도밖에 안 되는, 그런 곳이에요. 그냥 동네 사람들끼리 알음알음 지내고 장은 업타운이나 다운타운에 있는 작은 마트에서 보고 레스토랑도 몇 개 없고. 사정이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직장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낮 시간을 보내요. 그러다가 자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자동차나 버스, 우버를 타고 집이 있는 브리즈번으로 돌아오는 거죠. 저는 이모가 오래전부터 거기서 지내왔어서 자연스레 그곳에서 지내게 됐어요.”

 “언제부터 거기서 살았던 거야?”

 “일곱 살 때부터요.”

 “그렇구나.” 하고 나는 다 마신 맥주캔을 찌그러트리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건지 말해줄 수 있어?”

 내 물음에 현지는 희미하게 웃음을 짓곤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바다와 보다 가까운 모래사장에선 상욱과 다른 멤버들이 불꽃놀이를 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이들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고등학생 무리들이나 대화를 나누며 꺄르르 웃는 커플 한 쌍도 눈에 띄었다. 나는 옆 모래밭에 박혀있던 비닐봉지에서 새 맥주캔을 꺼내어 뜯었다.

 현지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그 무렵의 일들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아요. 하지만 집 안에서 넘실거리던 불길들만큼은 아직도 선명해요. 사이렌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아주 큰 소리들이 났던 것도 어렴풋이 기억하구요. 나중에 들은 거지만 그때 저는 제 방 책상 밑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대요. 화재가 나면 연기가 위로 올라가잖아요. 그래서 구조되었을 때도 혼수상태이긴 했지만 살아있을 수는 있었다나봐요. 안방에서 주무시고 계시던 저희 부모님은 아니었지만요..”

 “… …”

 “장례를 마친 뒤에는 한바탕 소란이 있었대요. 남은 애를 누가 키울 것인가―하는. 친가든 외가든 다들 꺼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받아준 사람이 수현 이모와 데니스 이모부였어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죠. 수현 이모는 금전적으로 남동생 둘만 밀어주려는 외가의 분위기에 진절머리가 나서 일찍 독립하고 혼자 힘으로 대학을 나와 하이델베르크로 늦깎이 유학을 갔는데 거기서 데니스를 처음 만났대요. 나중에 졸업을 하곤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서 지금의 브리즈번에 자리를 잡은 다음 결혼했다고 하더라구요. 참 다이나믹한 인생이죠. 데니스는 덩치가 큰 독일인인데 인상이 조금 험상궂긴 하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정말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었어요. 당연히 이모도 절 너무 잘 챙겨주셨구요.

 그래도 당시의 저는 여러 일들로 충격을 받은 상태였던지라 브리즈번으로 가고 나서도 한동안 이모랑 데니스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고 하더라구요. 학교도 가지 않았구요. 제가 그곳에서 처음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건 딱 아홉 살.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교 2학년인가?그때부터였어요. 당연하지만 학급 안에선 이미 어느 정도 무리들이 형성되어 있었고 저는 갑자기 끼어들어온 이방인처럼 되어버렸죠. 얼마 없는 동양인 중 하나이기도 했구요. 그 이후로도 거기선 친구 같은 걸 만들어본 적이 없어요. 자연스럽게 혼자 무얼 한다는 게 점점 익숙해져갔죠.

 수업이 끝나면 통학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었어요. 때론 요리를 해서 퇴근하고 돌아온 이모와 데니스에게 음식을 대접해주기도 했고요. 데니스는 독일인이라―그쪽 분들이 감자랑 소세지를 좋아하잖아요―그래서인지 제가 만든 뱅거스 앤 매쉬를 특히 좋아했어요. 너무 많이 먹

는다고 이모에게 한 소리 들을 때도 많았죠. 아, 베이스도 그러면서 처음 쳐본 거예요. 창고에 오래된 베이스가 하나 있었거든요. 너무 낡기도 했고 스트링도 팽팽하지 않아서 소리는 영 안 이뻤지만 그래도 칠 수 있을 정도는 돼서 그걸로 데니스에게 틈틈이 배우곤 했어요.

 어쨌든 저는 그런 식으로 그곳에서 십 년을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 겉으로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일은 적었어도 아마 이모랑 데니스는 걱정이 많았을 거예요. 애가 매일매일 그렇게만 지내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었죠.

 그러다 슬슬 SAT를 볼 만한 나이가 다가올 무렵 마침 이모와 데니스 두 분 다 이직을 하게 되면서 브리즈번을 떠날 준비를 하게 됐어요. 저는 그 전에 독립을 해야겠다 싶었고 두 분의 이삿날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미리 말씀을 드렸어요. 부모님이 생전에 가지고 계셨다던 저축통장과 부동산을 활용하면 아주 좋은 집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괜찮은 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게다가 그 두 분께 언제까지나 신세를 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구요. 물론 제가 그렇게 말씀을 드렸을 땐 두 분 모두 우리들은 괜찮으니까 그냥 함께 뉴욕으로 가서 SAT도 보고 대학도 나오자곤 하셨지만요.

 하지만 그마저도 제가 한국으로 들어갈 결심을 굳혔다는 걸 아시고서부턴 바로 본인들 생각을 꺾으셨어요. 알겠다며, 그저 연락만 자주 해달라며 제 의견을 존중해주셨죠. 그리고 두 분께―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법적 보호자라는 게 필요했을 나이였으니까―이런저런 행정적인 도움을 받아 집을 구하고 한국으로 들어온 거예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한국 들어온 거, 처음엔 후회했어요. 낯선 땅에서 정말로 혼자 살아가려니 막막하기도 했구요. 그냥 수현 이모랑 데니스 따라서 뉴욕으로 갔으면 그 근처나, 아니면 꼭 근처가 아니더라도 나쁘지 않은 주립대학으로 들어갔을 테고 그랬다면, 어쩌면, 거기서는 괜찮은 친구들을 만났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생각도 많이 하고 그랬죠.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안 그래요. 지금은 한국으로 들어온 게, 여기서 학교를 다니고 여기서 사람들과 이렇게 함께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기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로 고마워요, 언니.”

 

*

 

 ……사실 저는 그날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진 않았어요. 그 전까지 워낙 술을 많이 마셨던 것도 있고 무엇보다 내내 피곤했으니까요. 그래서 제 옆 침대에서 같이 잠을 청했던 언니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사실에도, 거기다 아침에 언니가 제게 전화를 걸어서 형철 오빠가 새벽 중에 저를 만졌다는 말을 했을 때도 무척 당황스러웠죠.

 게다가 마침 저도 그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무언가 불쾌한 감각이 전신에 남아있었거든요. 그리고 잠들어있을 때에도 무의식 중에 누군가 저를 만지고 있다는 느낌이 어렴풋이, 아주 어렴풋이 들었어요.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누군가의 손이나 몸이 아니라 어떤 매끈하고 반질반질한 뱀의 외피 같은 것이 내 몸 구석구석을 타고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이었죠. 그래서 어쩌면 그 리조트 객실 안의 누군가, 혹은 어떤 경로로 침입한 낯선 사람이 잠들어있던 저를 만지고 범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얼핏이긴 하지만 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런 불확실한 느낌만으론 범인이 누구인질 특정하기는 고사하고 그런 행위가 실제로 있기는 했는지조차 확인이 불가능하잖아요. 그렇기에 저는 당연히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꿈 같은 것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구요. 그런데 그게 전날에는 함께 있지도 않았던 형철 오빠라니. 거기다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닌 언니가 제게 말해주다니. 믿을 수가 없었죠.

 언니와 통화를 마친 이후로도 저는 계속 생각했어요. 그게 정말 형철 오빠였을까에 대해서요. 언니는 틀림없다고 했지만 언니가 그때 너무 심적으로 흥분해있기도 했고 어쨌든 언니가 오빠를 직접 본 건 아니었으니까 저는 그게 형철 오빠가 아닐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그때까지 경험한 바로는 그런 사람이 아닐 것 같기도 했구요. 물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긴장을 늦추고 있지는 않았어요. 왜, 멀쩡해 보이는 미친놈이 제일 무섭다고들 하잖아요. 이런 걸 격언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어쨌건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하지만 역시 사실을 바로 확인할 도리는 없었죠. 저와 멤버들이 일어났을 때 형철 오빠는 (당연히도) 객실에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조금 기다려보기로 했어요. 만약에 언니가 말한대로 형철 오빠가 새벽 중 객실 안에 머물면서 저를 추행한 게 사실이라면 분명 속초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있었을 테니까요. 아니면 첫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버린 언니와 대화를 하기 위해 서울로 향했을 테고요. 혹은 제 예상대로 오빠가 범인이 아니었다면 그냥 원래 일정대로 아침 버스를 타고 속초로 오는 중이었을 수도 있겠죠. 그리고 적어도 그 세 가지 경우의 수 중에선 어떤 것이든 간에 당사자인 제가 면대면으로 세게 나온다면 사실이 밝혀지리라 여겼어요.

 그런데 아니었죠. 언니도 아시다시피 그 셋 중 어느 예상도 들어맞질 않았어요.

 형철 오빠는 죽어버렸죠. 그것도 사고사로. 모든 진실을 끌어안은 채 말이에요.

 당연하지만 여행지에서 평화로이 점심을 먹고 있던 우리는 그 비보, 형철 오빠가 아침 아홉 시경 속초 시내의 횡단보도를 건너다 차에 치여 즉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모든 일정을 취소했어요. 그리곤 함께 서울로 돌아갔고 머지 않아 장례식에 참석했죠. 당연히도 참석한 밴드와 학교 사람들 모두 왜 여자친구였던 언니가 오질 않는지 영문을 몰라 했어요. 식장 안에서 밥을 먹으며 온갖 가십들이 나돌았죠.

 하지만 그 중에서 언니가 오지 않는 이유를 제대로 알고 있는 건 저 뿐이었어요. 아마 언니는 오빠의 영정을 볼 자신이 없었겠죠. 진실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오빠는 언니와의 오해 

(그게 과연 오해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요)를 풀기 위해 급하게 속초로 왔다가 혹은 서울로 가려다 (이것도, 역시 어느 쪽인지는 모르죠) 사고사로 죽게 된 거니까요. 언니는 아마도 언니 자신 때문에 오빠가 죽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그래서 식장에 오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언니는, 그 뒤로 저를 포함한 모든 학교 사람들과의 연락을 끊고 잠정 휴학에 돌입했어요. 당연하지만 이후로 언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저는 잘 몰라요. 알 길이 없었죠. 하지만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는 말해드릴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시시콜콜 모두 늘어놓는 건 이 메일의 성격상 필요하지 않을뿐더러 적절하지도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딱 하루만, 저로 하여금 그 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날 하루에 대해서만 말씀드리려고 해요.

 형철 오빠가 죽고 언니가 학교를 떠나고 난 뒤에도 밴드는 계속 운영됐어요. 음악 이외의 다른 일에 모임 전체가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죠. 겨우 밴드 동아리 하나를 무슨 공적인 모임 취급했다는 게 지금 와서 보면 조금 웃기긴 하지만요. 어쨌든 저희는 가을과 겨울 정기공연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끝마쳤어요. 그리고 그 즈음 상욱 오빠와 저는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로 어느 정도 감정이 있는 상태였구요.

 그래서 둘이 공연을 끝낸 기념으로 제가 먼저 한 잔 하자고 했어요. 멤버들과의 뒤풀이나 모임과는 별개로요. 방금 잠깐 어디로 갔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려 했는데 기억이 영 나질 않네요. 합정역 근처의 어떤 펍이었다는 것만은 기억해요. 저희는 그곳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각자 맥주를 네 잔 정도 마셨어요. 아시겠지만 오빠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술이 센 편이 아니니 둘 다 금세 취했죠. 열두 시 즈음이었을 거예요. 오빠가 나가자고 했던 게. 그래서 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같이 계산을 했죠. 나오면서는 자연스레 오빠가 제 손을 잡으려 했어요. 여기까지는 지루할 정도로 여느 대학생 남녀의 이야기들과 비슷하죠.

 그런데 뜻밖에도 저는 있는 힘껏 그 손을 쳐내어버렸어요. 저도, 오빠도, 둘 다 무안해질 정도로 세게 말이에요.

 네. 언니도 예상하셨겠지만 그 손의 감촉 때문이었어요. 그 반질반질한 감촉. 그날 제가 리조트 객실 침대 위에서 느꼈던 그 감촉과 놀라우리만큼 똑같았죠. 그 기억이 불러온 잔상들 때문에 저는 오빠가 옆에서 뭐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한동안 미친 사람처럼 제 손바닥을 내려다봤어요. 그리고 처음으로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이 그 기억의 주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제서야 공포가 몰려오기 시작했어요.

 저는 우선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대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도망쳤어요. 뛰기라도 하면 쫓아올까봐 일부러 천천히 역까지 걸어갔죠. 혼자서 지하철 막차에 올라타고 무사히 좌석에 앉아서도 줄곧 그 손만 바라봤어요. 부들부들 떨면서. 그리고 곧 몇몇 장면과 기억, 감각 들을 전보다 훨씬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게 되었어요. 그날 새벽, 침대 앞에서 누워있던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시선과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시커먼 몸뚱아리, 허벅지 안쪽으로 느껴지던 손길 같은 것들을 말이에요.

 ……그 뒤로 저는 언니의 길을 답습하게 됐어요. 밴드를 나오고 학교를 나왔죠. 한동안은 아무것도 하질 못했어요. 낯선 사람이든 익숙한 사람이든 그냥 사람이 무서웠거든요. 저를 바라보는 날것의 시선과 눈빛들이 그저 두려웠어요. 그래서 집에서 아예 나오질 않았죠.

 그렇게 혼자 집 안에 틀어박혀서 반 년 정도를 보냈던 것 같아요. 지독할 만큼 고독했지만 또 한편으론 지독할 만큼 고독하고 싶었던, 고독해야만 했던 그런 시간이었어요. 그러던 제게 수현 이모와 데니스가 다시 손을 내밀어줬죠. 제 상태를 심히 걱정하던 두 분이 (두 분께 연락도 제대로 못하던 시절이었거든요) 뉴욕으로 와서 같이 지내자고 말씀해주신 거예요. 심지어 수현 이모는 회사에 장기 휴가까지 내고 한국으로 찾아오셔서 제 용기를 북돋아 주셨어요. 공항까지만이라도 나갈 수 있을, 그럴 용기를.

 그 뒤에 뉴욕으로 건너와 두 분과 함께 살면서는 차차 나아지기 시작했어요. 상태가 조금 호전되고 나서는 데니스가 좋은 카운슬러를 소개해주기도 했고요. 덕분에 작년부터는 학교도 다시 다닐 수 있게 됐어요. 한국에서 언니와 다니던 그 시절보다는 못할지 몰라도 마음에 맞는 일본인 친구를 사귀기도 했구요. 최근에는 베이스도 다시 잡았어요. 전처럼 어디 밴드에 들어가 공연 준비를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집에서 어려운 리프나 솔로를 연습해요. 그럴 때면 데니스가 정말 놀랍다는 표정으로 절 지켜보곤 하죠.

 여하튼 현재의 저는 잘 지내요. 많은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거예요. 저도 이젠 예전과 달리 저에게 많은 걱정을 짊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요. 다행스럽고 감사하게도.

 다만 제가 걱정스러운 건 언니가 아직도 형철 오빠의 죽음을 언니의 탓으로 돌리고 책망하고 있을까봐예요. 만약 그렇다면 이제는 그러지 않으셔도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형철 오빠가 아주 범인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는 건 아니에요. 전 여전히 그날 저를 만지고 겁탈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거든요. 분명히 제 직감만으로는 나상욱, 그 남자가 확실하지만 또 그렇다고 하기엔 언니의 말대로 객실 현관에 있던 형철 오빠의 신발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렇다 할 물증이나 확증이 없으니까요. 나상욱과 이형철, 그 둘 중 하나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 누구도 아닌 제 3자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둘 다 범인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것들을 다 떠나서 형철 오빠가 죽은 건 언니 탓도 아니고 제 탓도 아니고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그 사실 하나만큼은 꼭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부디 언니가 언니의 삶을, 언니만의 삶을 살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제부터라도……

 

최우수 당선 소감

이주영(교육학과 4)

처음 「은주 언니에게」를 탈고했을 당시는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인 19년도 11월 무렵이었습니다. 소설 속 배경으로 등장했던 D동의 지하 연습실, 학교 근처 골목에 있던 작은 합주실, 그리고 속초까지. 모두 그 당시에 직접 가보고 겪어내었던 장소와 시간들입니다.

그 무렵의 저는 주변 여러 곳으로부터 좀처럼 믿기 어려운 일들을 겪거나 들어왔습니다. 또, 화면 너머로부터도 그런 믿기 어려운 일들이 몇 번인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일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면 사람이라는 것이 진실로 무서워집니다. 우리 모두가 어떤 의미에선 가해자와 피해자의 선을 계속해서 넘나들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자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진실은 대체로 알 수 없거나 알기 힘든 방식으로 우리 앞에 도달하지만 그에 반해 고통은 언제나 엄존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견뎌내기가 힘에 부치더라도 어찌 됐든 또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런 생각을 중심으로 써내었습니다. 이 이야기로 상을 받게 될 줄은 당연히 몰랐지만, 몰랐던 만큼 기쁜 마음입니다. 좋게 읽어주신 심사위원 교수님께는 감사의 말씀을, 언제나 제 글쓰기를 응원해주는 친구들에게는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우수

「그녀」

 

그녀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어도, 그녀가 나온 사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 상영 후 있었던 감독과의 대화 자리에서 찍힌 사진은 사진기자가 저작권 없는 창작물로 공식 발표를 했기 때문에 여러 형태의 2차 창작물로 사람들 삶에 자리 잡았다. 자리에 앉아 정적인 자세로 찍힌 사진이 아니라 상영관을 막 나서는, 피사체가 움직이고 있어 잔상이 남은 흑백사진 ─ 기자가 일부러 흑백으로 바꿔 발표했다. 그건 시선을 붙잡아두는 힘이 있었다. 그녀가 움직이는 모습을 찍었는데 어떻게 그런 시간을 잡아냈을까? 사진 속 그녀의 시선은 또렷이 보였다. 자신의 걸음걸이에 집중하며 고개를 숙인 것도 아니고, 박수 소리가 들리는 관객석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었다. 영화관 천장을, 밝게 켜져 있는 조명사이로 어둠만 가득한 그곳을 묘한 각도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처음 그 사진이 공개됐을 때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사람들은 SNS의 프로필 사진으로, 핸드폰의 배경화면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 세계로 그 사진을 끌어왔다. 문화 평론가들은 아예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정의하고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녀의 인터뷰는 찾아보기 힘든 편이다. 이건 당시 촬영감독에 대한 인식에 문제도 있었다. 영화를 감독의 예술로만 보는 시절이 있었고 그렇다 보니 촬영감독이나 미술감독에 대해서는 진중하게 언급되지 않거나 언급되더라도 평론가들 사이에서만 있는 일이었다. 만약 대중이 시나리오나 배우의 연기가 아닌 그 외 영화를 채우고 있는 부분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면 그냥 색감이 좋더라, 느낌이 좋더라 정도로 추상적이게 이야기했다. 다시 돌아와 그녀의 인터뷰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단 한 번도 박찬욱 감독의 이야기가 빠진 적이 없다는 점을 집을 수 있다. 아직 예술가로서 자신만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있지 못했을 때 다시 꺼내 본 「친절한 금자씨」가 일반인으로의 삶이 아닌 예술가로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영화 저변에 깔려있는 여러 가지 의미 중에 눈에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분명히 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 美에 대한 부분. 그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이영애의 대사 “예뻐야 돼. 뭐든지 예쁜 게 좋아.”를 듣고 그녀는 터널의 끝을 보았다고 이야기한다. 그 뒤로 그녀가 참여한 영화들은 그녀의 존재감이 스크린을 뚫고 나올 듯한데, 때로는 그 때문에 ‘영화가 예쁘기만 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 이건 감독의 문제도 포함된다. 하지만 이런 독보적인 행보 덕분에 영화에서 촬영이 담당하는 부분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의 촬영감독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게 된다. 그리고 인터뷰마다 항상 언급되는 부분이 또 하나 있는데, 그건 그녀의 죽음이다. 아직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의 인터뷰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어색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죽음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그 말을 할 때만큼은 감독과 의견이 맞지 않아 온 힘을 다해 싸우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고 인터뷰어들은 이야기한다. 확고한 믿음과 그것을 밀어붙이는 태도 그리고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자신은 정확히 43세에 죽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그녀. 이 이야기를 들은 많은 영화계 관계자들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벌어지게 될 일이라면 더 이상 그녀의 작품을 볼 수 없다는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아쉬워하고는 했다. 관계자들이 그녀의 부재를 영화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조금 슬픈 부분이다. 하지만 달리 해석하면 그만큼 한국 영화 내 촬영감독으로서의 그녀의 존재감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의미니 그녀는 만족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두 가지 이야기 외에 다른 인터뷰 내용은 당시 촬영했던 작품이나 차기작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므로 그녀의 삶을 알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그만큼 삶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였다. 하지만 그녀의 인터뷰어들을 통하면 활자화된 인터뷰 내용 말고 그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인터뷰할 때 그녀의 상태였다. 어떤 날은 술에 취한 것은 아니었으나 가끔씩 인터뷰 도중 잠이 든 것처럼 순간적으로 의식이 날아가 그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인터뷰가 중단되거나 인터뷰를 잠시 멈추고 화장실을 가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뒤, 정해진 인터뷰 종료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 때쯤 자리로 돌아와 남은 인터뷰를 끝내기도 했다. 그녀를 상대했던 인터뷰어들은 이런 태도가 굉장히 프로페셔널 하지 못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녀의 인터뷰는 완벽하거나 엉망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래도 인터뷰가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한 적은 없기에 그냥 감정 기복이 심한, 흔하디흔한 정신병을 앓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정도의 생각만 했다고 한다.

그녀가 온 세상의 집중을 받고 있을 때 예전 인터뷰들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이 한 권 나왔다. 그건 그녀의 인터뷰 책이 아닌 그녀를 인터뷰하는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인터뷰한 책이었다. 책에 참여한 사람들은 인터뷰어부터 시작하여 사진 촬영작가, 메이크업 담당팀, 조명팀 등 한 번이라도 인터뷰 현장에서 그녀를 지켜봤던 사람들이 포함되어있었다. 인터뷰의 끝자락에 공통질문으로 한, 인터뷰할 때 그녀만의 특이한 점은 없었나요? 라는 물음에 각자 맡은 역할에서 경험한 그녀의 특이한 점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두 말을 맞춘 듯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그녀의 무신경한 스타일이었다. 인터뷰장에 나타나면 항상 화장기 없는 얼굴에 오버사이즈의 옷들을 입고 나왔는데, 어려 보이는 얼굴 탓에 30대 중반인데도 20대 후반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녀는 메이크업과 헤어에 대해 어떠한 코멘트도 하지 않았고 사진작가가 요청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 없이 그대로 다 따랐다. 인터뷰는 본업이 아니라 그냥 살아가는 도중 잠시 있는 이벤트로 여기는 듯했다. 그렇기에 으레 인터뷰라고 하면 준비하는 옷이나 화장, 머리, 소품에 대해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고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 인터뷰할 때의 상태와 함께 본다면 자유로움이라는 단어가 적절하다. 간혹 제작사 측에서 인터뷰에 외적으로 자세한 요구사항을 말할 때면 그녀는 덤덤한 표정으로 그렇게 하시죠, 라고 말했다. 책은 초판 5쇄 이상을 찍지 않을 줄 알았으나 사진의 발표와 함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내용이 조금씩 추가돼 3판 21쇄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체구가 작았다. 저런 몸으로 어떻게 그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하는지 ─ 심지어 우리나라 최초 full 아이맥스 촬영 영화도 그녀가 담당했는데 아이맥스 카메라는 한 대당 대략 34~40kg이니 사실상 핸드핸들 방식으로 촬영하기에는 굉장히 버거운 편이다 ─ 다들 그녀가 카메라를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그녀는 촬영을 위해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여 근육량을 굉장히 높였다고 했다. 근육량을 늘렸다고 해서 체형이 눈에 띄게 변한 건 아니었으므로 여전히 작은 키에 작은 얼굴은 그대로였다. 피부가 굉장히 하얀 편이었는데 영화 현장에서 오랜 시간 지낸 사람이라기엔 믿기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최고의 촬영감독이라는 타이틀이 더 돋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촬영 현장에서 그녀는 인터뷰 때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고수했다. 봄이나 여름엔 언제나 청바지에 흰색 크롭티를 입었다. 날씨가 더 덥다면 짧은 바지를 입었다. 가을이나 겨울처럼 기온이 낮은 계절에는 살짝 큰 맨투맨이나 니트를 입었고 바지는 상의에 맞춰 골라 입었다. 당장 주변에 있는 아무 패딩을 입어도 어울리도록 준비하고 오는 듯했다. 어느 촬영 현장이 다 그렇듯 변수가 많았고 그렇기에 옷은 대부분 작업에 용이하도록 입는 편인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언제나 데이트를 하는 듯 예쁜 모습이었고 특유의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래서 현장 스틸컷에 카메라를 잡고 있는 그녀 모습은 여배우가 잠시 카메라를 살펴보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녀의 긴 머리를 본 사람은 거의 없다. 영화판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후로는 항상 언제나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를 했다. 함께 촬영한 영화팀 사람들에게 복장 때문에 촬영에 지장이 간 적은 없느냐 물어보면 단 한 번도 그런 이유로 촬영에 문제가 생긴 적은 없다고 말했다. 다만 여름에 그녀와 함께 촬영을 진행했던 사람들은 그녀의 스타일을 생각하다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고 했는데, 팔에 주삿바늘 자국이 많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마약에 빠져 살았다. 20대, 대마초로 마약을 시작한 그녀는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했고 다양한 약물에 손을 대다 헤로인과 코카인에까지 이르게 된다. 한동안 헤로인만 투여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다 미국 메타돈 거리에서 퍼지기 시작한 펜타닐을 알게 된다. 펜타닐을 접하면서부터 헤로인과 펜타닐을 섞거나 순수한 펜타닐만 투여하는 등 점점 더 위험한 방식을 시도한다. 펜타닐은 미국 내에서 불법일 뿐만 아니라 특히 순수한 펜타닐은 구하기도 쉽지 않아서 한국 국적의 그녀가 도대체 어떤 경로로 손에 넣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약에 대한 집착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극소수의 지인들만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함께 촬영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주삿바늘을 자국을 보더라도 설마, 라는 생각만 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촬영을 준비하고 촬영을 하고 마지막 편집과 색 보정을 할 때까지 절대 마약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아는 지인들은 그 집착을 스위치 누르듯 ON/OFF 하는 그녀가 대단함을 넘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고 말한다. 한 감독은 그녀가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프로페셔널 하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선 그렇지 못했고 한마디로 방치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다만 담배의 경우에는 촬영장에서도 자주 폈는데 그녀가 담배를 피우러 간다는 건 지금 머릿속이 꼬였다, 라는 뜻으로 해석됐다. 그 사실은 촬영장의 모두가 알았다. 그래서 감독도 그녀가 잠시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고 하면 알겠다고 한 뒤 긴장한 채 시나리오나 스토리보드를 다시 살피며 더 나은 방법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그녀는 담배를 피우며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선은 오로지 정면에서 30도 가량 아래를 바라보며 타들어 간 담뱃대가 손가락에 닿을 때까지 조용히 담배를 피웠다.

그녀는 촬영 현장에서 마찰을 만들어가는 스타일이었다. 고집이 굉장히 대단했는데 이는 사람들이 예술가를 생각할 때 당연한 부분이라고 느낄 수도 있었지만, 그녀의 고집은 조금 달랐다. 특히 영화 촬영 현장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인 자리이기에 고집, 소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려면 설득이 필요했다. 그래야 그들도 납득을 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 이건 감독이라고 해도 제외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는 설득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별다른 이유 없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녀가 영화판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런 태도 때문에 영화 촬영을 한동안 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입봉 후 두 번째 작품을 들어간 감독의 영화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했다. 아직 현장에 적응하지 못한 감독이었기에 그녀는 촬영감독임에도 원하는 대로 장면을 담을 수 있었다. 그렇게 완성한 영화가 개봉된 후 흥행은 망쳤지만 촬영에 대해서만큼은 인정을 받아 그녀에게 오는 제안이 많아졌다. 그렇게 한 편, 두 편 쌓아가며 능력을 검증받았고 감독들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림을 완벽하게 구현해주고 혹은 그 이상을 만들어 주는 그녀를 점점 더 신뢰하게 된다. 그래서 설득 없는 고집을 부려도 감독은 일단 해보라며 기회를 주었고 스텝들도 그녀를 믿고 움직였다. 하얗고 작은 얼굴, 봄과 여름엔 몸 선이 드러나는 스타일과 가을, 겨울엔 어떻게 보면 보호 본능까지 일으키는 스타일을 가지고 자신의 일에 대해서만큼은 프로페셔널한 그녀는 한국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런 그녀의 대표작은 특이하게도 상업 영화가 아니다. 한 영화 커뮤니티에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압도적인 수치로 1등을 했고, 평론가들도 큰 이견 없이 동의한 대표작은 러닝타임 23분의 영화 「하루를 걷다」이다. 이 작품의 촬영감독을 맡기 전에도 이미 영화계에 한 획을 긋고 있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관계자들은 대학원 연출과 학생의 작품을 선택한 그녀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관계자들을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그녀가 완성된 시나리오도 아닌 한 문장으로 된 시놉시스를 보고 그 작품을 선택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작품의 감독이 그녀의 친척이라느니, 선후배 관계라느니, 감독의 내연녀가 그녀라느니 망상에 가까운 소문들이 돌았다. 촬영하는 내내 그런 소문은 계속됐지만 그녀는 소문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 공식적으로 어떤 발표를 하든지 간에 촬영에 지장이 생길 것이 분명했기에 무시했다고 그녀는 후에 말한다 ─ 영화가 크랭크업 된 후 최종본이 나오는 동안 소문은 잦아들었고 소문이 만들어낸 주목도는 이제 작품에 대한 궁금증으로 치환되었다. 광화문 국제 단편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후 영화는 국내외 영화제를 휩쓸기 시작한다. 이제쯤 오자 언론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는데, 감독이 인터뷰에서 했던 ‘시놉시스 한 줄을 보고 저에게 먼저 연락을 주셔서 정말 놀랐죠.’라는 말을 가지고 엄청난 양의 기사들을 내놓았다. 시놉시스의 한 줄은 이렇다. ‘헤어질 준비를 한 여자와 헤어짐을 예상한 남자의 마지막 데이트를 걸음걸이로만 표현한다.’영화는 23분 내내 정말 여자와 남자의 다리만 비추며 대화는 들리지만 표정과 행동은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를 본 영화계 사람들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떠돌던 소문들에 대해서 잠깐이나마 그런 말을 믿었다는 걸 부끄러워했다. 점심에 만나서 밤늦게 여자의 집 앞에서 헤어지는 장면까지 오로지 걸음걸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촬영됐으며 그 모습에서 사람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왔다. 바람이 불면 살짝살짝 보이는 여자의 분홍색 시폰 드레스 끝자락과 구김 없이 펴진 남자의 7부 베이지색 슬랙스, 시간대별로 달라지는 섬세한 빛과 거기에 따르는 그림자 그리고 아주 미세한 움직임들. 그 모든 것을 그녀는 포착해 내고 있었다. 영화는 보는 내내 아름다웠다가 처연했다가 사랑스러웠다가 미련스러웠다. 물론 각본과 스토리보드, 연출까지 한 감독과 감정을 충분히 전달될 정도로 연기한 배우들의 힘도 있었지만 그건 그녀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작업이었다. 극찬을 받은 이 영화를 뒤로 그녀는 다시 상업 영화로 돌아간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영화에 참여함으로써 「하루를 걷다」의 감독은 순식간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그 후로는 첫 작품의 후광 때문인지 투자는 받아도 결과물은 영 좋지 못했다.

그녀는 단편영화 작업 후 총 열다섯 편의 영화를 더 작업했다. 마지막 작품이 끝나고 몇 달 뒤 그녀가 인터뷰마다 이야기했던 시간이 다가왔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 그녀의 핸드폰으로 들어오는 문자나 카카오톡, 전화는 수신만 됐다. 처음 주변 지인들은 일이 바쁘다거나 하루 이틀 정도 완전한 휴식을 취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고 일주일이 넘어갔을 땐 이번엔 연락이 좀 오래 안 되네,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연락이 닿지 않자 주변인들은 그녀의 인터뷰 내용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정확히 43세, 그녀는 행방불명됐다. 그즈음은 한국 영화감독들이 해외로 막 뻗어 나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미 시발점이 된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감독을 이어 새로운 감독들에게 해외 제작사나 에이전시가 컨택하는 일이 많아졌다. 컨택 후 작업한 영화의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 한국 영화계 자체가 주목을 받고 있었다. 대형 제작사가 한국 지사를 잠깐 포기하는 경우가 있긴 있었으나 그건 상승곡선에 있는 잠깐의 하향이었다. 촬영이나 미술, 음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해외 에이전시와 계약을 한 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 수준이 되자 자연스럽게 그녀의 행보에도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졌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이 덤덤히 한국 영화만을 작업했다. 한 해에 두세 작품씩 작업을 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할 수 있을 때 모든 것을 해내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그녀가 행방불명이 될 때쯤 그녀는 더 이상 촬영 감독으로서 작업을 잡지 않았다. 해외에서 컨택이 와도 ─ 많은 한국 감독들이 해외로 뻗어 나가고 있다고는 했지만 한국의 모든 감독들이 그런 기회를 얻는 것은 아니어서 분명 엄청난 기회였다 ─ 거절했으며 한국 영화계에서 내로라하는 감독들과 제작사가 시나리오를 건네도 읽지도 않은 채 다시 돌려보냈다. 이제와 사람들은 그녀의 행동이 ‘준비’를 하는 단계였다고 생각한다. 그녀와 연락이 끊긴 지 다섯 달이 지났을 때쯤 그녀가 마지막으로 참여한 영화가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전 세계인의 관심이 그녀의 행방에 쏠렸다. 한국 영화의 두 번째 황금종려상 수상이기에 국내 언론은 물론 해외 언론들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황금종려상이 정확히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몰라도 세계에서 한국 영화가 인정받았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었다. 여기서 그녀의 행방에 관심이 쏠릴 수 있었던 건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감독이 한 말 때문이었다. 수상소감 마지막에, 사라진 그녀를 찾아달라는 공개적인 부탁은 SNS에 해시태그와 함께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했고 그녀와 조금이라도 닮은 사람이 있으면 이곳저곳에 사진이 올라왔다. 하지만 결국엔 그녀가 아니었다.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녀가 참여한 작품은 얼핏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그녀가 큰 이슈가 되자 대중들까지 그녀가 참여한 작품에 관심을 가졌다. ‘아 그 영화에 참여한 사람이야?’라는 식으로 관심은 관심을 부르고 점점 증폭되어 갔다. 그러면서 동시에 영화와 관련된 업종에서 마케팅으로 그녀가 사용됐다. 영화관에서는 그녀의 특별전이 열리기도 하고 VOD 시장이나 OTT 시장은 그녀가 참여한 작품들을 꾸준히 등록했다. 그리고 그 영화들은 상위권을 차지했다. 이 현상을 보고 한 평론가는 아직 생사가 정해지지 않은 사람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건 실례되는 행동이다, 라고 말했지만 금세 잊혔다. 이렇게 전국이, 전 세계가 그녀로 들썩이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와 관련된 명확한 사진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언론사에서는 SNS에서 그녀가 아니라고 확인된 사진을 사용하거나 영화시장에서는 사람들을 끌어 모이기 위해 가장 예쁜 나이였던 시절의 그녀 사진이나 얼굴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신비로움을 가지고 있는 영화 촬영장 스틸컷을 사용했다. 어느 순간 그녀를 찾아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소비해야겠다는 식으로 흘러갔다. 그러다 한 사진기자가 그녀의 사진 한 장을 배포한다. 그 사진이 바로 글의 맨 처음에 언급한 사진이다. 영화관을 빠져나가며 시선이 천장으로 향한 그녀의 모습. 기자는 제대로 된 사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즉 그녀를 위해서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특별전은 마무리 단계에 있었고 마케팅도 끝물이었다. 그녀는 이미 소비될 대로 소비되어있었다. 배포된 사진을 보지 않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사진이 퍼지기 시작하자 처음 그녀가 이슈 됐을 때보다 더 큰 반향이 일어났다. 사진을 본 사람들은 한순간에 매료되었고 열광했다. 어딘가 연약해 보이지만 꺾이지 않을 것 같고, 새장의 문이 열려있지만 자유를 원하는 새처럼 보이며 가만 바라보고 있으면 눈에서 광기가 묻어나는 듯한 그녀의 모습. 자유, 우울, 사랑, 불안, 외로움, 강박, 집착, 애처로움, 확신, 신념, 집념…… 어느 한 단어로 표현되지 않고 다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그녀의 사진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누구나 한 번쯤 마음속에 품었을 수많은 감정들을 전부 정지된 시선 안에서 보여주고 있기에, 그로인해 사람들을 뒤흔드는 힘을 무한히 가지고 있기에 그녀의 사진은 문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이 글을 쓰는 상황에서도 그것에 대해서 답할 수가 없다. 미국의 메타돈 거리에서 새로운 마약을 찾아 헤매고 있을지, 프랑스의 작은 영화관에서 5명이 채 되지 않는 사람들과 영화를 보고 있을지, 러시아 어딘가에서 찬바람을 느끼며 담배를 피우고 있을지, 필리핀의 수많은 섬 중 한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모래를 손으로 흩뿌리고 있을지, 한국의 남해 어느 섬에서 저물어가는 해를 보며 저녁 준비를 하고 있을지, 아니면 정말 그녀가 항상 말한 대로 정확히 43세가 되는 생일날 생을 어떤 방식으로든 끝마치고 지구의 영역에선 찾아볼 수 없는 건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제 그녀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어도, 그녀가 나온 사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그녀의 사진을 배포한 사진기자에게 한동안 같은 질문이 쏟아진 적이 있었다. 사진이 그냥 기사에 쓰이거나 인터넷에 돌아다닐 때에는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더 나아가 작품으로 취급받기 시작하자 사진의 제목이 필요했다. 원작자라고 할 수 있는 사진기자에게 예술가와 평론가들이 제목이 무엇이냐, 우리가 정해도 되는 것이냐, 라는 질문이 쏟아졌고 기자는 한동안 답을 하지 않았다. 답을 하지 못했다는 편이 더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여러 날을 고민하던 기자는 그녀와 친분이 있었던 영화계 사람들을 만나며 제목에 대해 조언을 구했지만 그녀의 사진 제목으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공모를 내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건 사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라며 거절했다. 결국 8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그녀의 행방도 알 수 없었고 사진의 제목 또한 정해지지 않았다. 그동안 만들어진 수많은 2차 창작물들은 그녀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되었고 그것이 통용되는 듯했다. 하지만 기자만큼은 사진의 제목에 집착했는데 이제 그 사진은 더 이상 함부로 다뤄질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사진이 배포된 지 1년째 되는 날, 기자는 공식적으로 기사를 썼다.

 

그 후로 그녀의 사진은 ‘전깃줄 위의 작은 새’라는 제목으로 기록된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행방불명이다.

 

 

우수 당선소감

 

이정훈(정보컴퓨터공학부3)

11월 달력, 수상소감을 보낼 날짜에 검은색으로 동그라미를 쳐두었습니다. 빨간색은 글을 쓰는 날이고, 파란색은 술 약속이 있는 날입니다. 그러니 검은색은 보기 드문 색깔인 거죠. 그 색깔이 기뻤습니다. 수상 소식을 전화로 전해 들었는데, 아마 학예술상 담당이셨던 분은 당황하셨을 겁니다. 제 반응이 그렇군요, 그런 일이 벌어졌군요. 하는 마치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낙엽이 떨어졌군요? 식의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건방을 떨려고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이 일어났구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제 감각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뒤따라오던 감사한 마음이 확 덮쳤습니다. 부족한 글을 심사해주시고 과분한 상을 주신 교수님, 평소에 소설과는 거리를 두고 살면서도 제가 쓴 소설이라면 언제나 흔쾌히 읽어주는 친구, 저의 소설을 가장 먼저 읽어 주고 쓴소리와 용기를 함께 주는 글벗, 제 소설을 언제나 기다린다며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응원해주는 많은 지인들. 모두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행방불명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녀에게, 당신의 이야기가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고 전해주고 싶습니다. 

 

 

 

「·–– ·」

 

‘오늘도 어김없군.’

달칵, 달칵, 두 번의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여상스러운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고, 나는 곧 내 눈 앞에 펼쳐진 무(無)의 세계로 시선을 돌렸다. 그 광활한 공백을 응시하고 있자니, 마침 오늘 아침으로 나왔던 계란후라이의 흰자가 그를 쏙 빼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른자도 아주 온전하고 동그랬는데, 사람들은 좀처럼 보기 드문 완전한 조화라며 극찬했다. 그러나 내 감상은 조금 달랐다. 나는 그곳에서 완전한 파괴를 목격했다.

먼 옛날, 콜럼버스라는 작자가 신대륙을 항해하고 돌아오자 사람들은 그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며 폄하했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사람들에게 탁자 위에 달걀을 세워보라고 요구한 뒤, 아무도 그 일을 해내지 못하자 달걀의 밑동을 깨트려 탁자 위에 세웠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이전까지는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훗날 사람들은 콜럼버스의 달걀이 발상의 전환, 혹은 창의적인 사고를 대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혹자는 이 이야기에서 달걀이 애초에 세울 이유가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달걀이 각지지 않은 이유는 어미 새가 알을 품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그러면서 완벽한 원형이 아닌 이유는 혹시나 둥지에서 구르더라도 둥지 밖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타원형은 생명을 지키는 원초적 방어선으로, 콜럼버스의 달걀은 이런 생명의 원칙과 맞서서 자신의 탐욕을 이루고자 하는 발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콜럼버스는 카리브 해안과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여 금과 은을 얻기 위해 무수한 생명을 살육하였다. 콜럼버스의 달걀과 비슷한 사례로 꼽히는 고르디아스의 매듭 역시 마찬가지다. 고르디아스가 어렵게 꼬아놓은 매듭을 단칼에 내려쳐 풀어버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후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며 그 칼에 수많은 사람의 피를 묻혔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나는 문득 유명한 대목 하나를 떠올렸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그러나 태어나기 위해 한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면, 자기 자신의 세계보단 남의 세계를 깨트리는 편이 더 쉽지 않겠는가. 나는 깜빡이는 커서를 노려보다 이윽고 자판 위에 손을 올렸다.

 

· ┃

 

이것은 콜럼버스의 달걀이었다. 얼핏 보면 작은 점일 뿐이지만, 실은 흰 종이 위에 세워진 달걀을 평면도로 그린 것이었다. 나는 그 밑에 한 문장을 추가했다.

 

내가 저지른 모든 것들이 폭력이었다. ┃

 

그리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나는 ‘저지르다’를 대체할만한 보다 멋있는 말이 있을 거라 생각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용하다’라는 단어를 찾았다. 그리고 문장이 조금 더 비참하고 간절하게 느껴지도록 어조를 손봤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 제가 형용했던 모든 것들이 폭력입니다. ┃

 

‘훨씬 낫군.’

그제야 나는 내가 오늘 뭘 써야 할지를 깨달았다. 나는 빠르다가도 느리고, 느리다가도 빠른 속도로 타자를 입력했다. 곧 세로 21cm, 가로 29.7cm의 종이는 내 이야기로 가득 차올랐다. 마침내 구두점을 찍고, 출력 버튼을 누르고, 감독관에게 출력된 글을 제출한 다음에도 나는 여전히 글을 쓸 때의 몽롱함에 취해 있었다. 습관적으로 가방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도 머릿속으로는 바쁘게 나 자신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그러다 썩 괜찮은 지점을 발견하면, 내일의 글감으로 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비척비척 걷다가 누군가와 부딪혔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도.

‘좋아, 어쩌면 내일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나에 대한 글을 쓰게 될 수도 있겠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나’라는 문장은 중의적이었다. 그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고, 내가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이 문장의 뜻을 무작위의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 과연 몇 퍼센트가 전자를 대답하고 몇 퍼센트가 후자를 대답할지 궁금해졌다.

‘물론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그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다 보면 나 또한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게 되고, 내가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다 보면 그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게 되기 마련이다. 결국 둘 중 어느 쪽이 맞는지 따지는 것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따지는 것만큼 의미 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의미 없는 통계에 목을 매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잊어버리곤 했다.

어느새 집에 도착한 나는 저녁을 먹기 위해 냉장고를 뒤졌다. 냉장고 안은 빈곤했다. 저 구석에 10구짜리 달걀 한 판이 놓여있는 게 보였다. 열을 맞춰 늘어선 달걀의 매끈한 껍질이 냉장고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나는 달걀 하나를 검지 손톱으로 톡 건드렸다.

그 누구와도 섞일 일 없는, 안전하고도 정갈한 세계.

나는 냉장고 문을 도로 닫았다. 오늘 아침에도 달걀 요리를 먹었는데, 저녁까지 다른 누군가의 세계를 깨뜨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대신 선반에서 통조림을 꺼내 퍼먹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은 내 주위를 둥둥 떠다녔다. 그들은 빠르게 소멸하고 증식하기를 반복했다. 문득 좋은 비유가 떠올랐다.

‘마치 암세포 같군.’

암세포는 증식하는 능력이 고장 난 세포다. 증식을 멈추는 쪽이 아니라, 끊임없이 증식하는 쪽으로 말이다. 확실히, 어떤 일은 멈출 때보다 끊임없이 증식할 때 더 해로웠다. 나는 내가 쓴 비유가 썩 만족스러워서, 조촐한 저녁 식사에 불평할 겨를도 없이 컴퓨터 앞으로 달려갔다. 키보드 위에는 퀴퀴한 먼지가 가득 쌓인 채였다. 그러나 나는 지문 사이사이에 먼지가 끼는 것도 개의치 않고 마구 자판을 눌러댔다. 오늘따라 유독 글이 막힘없이 뻗어나갔다. 술은 한 톨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 마치 취한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나 자신에 취한 걸지도 모르지.’

나는 잠도 자지 않았고,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동을 틀 때 즈음엔 나의 암세포 같은 면에 대한 한 편의 글이 끝나있었다. 아니, 그것은 ‘완성’되어 있었다고 표현해야 옳았다.

다음날, 나는 몹시 당당한 태도로 집을 나섰다. ‘완성’된 글을 쓴 것이 얼마나 오래됐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어쩌면 아주 처음일지도 몰랐다. 신이 나서 길을 걷다가 누군가와 부딪쳤다.

‘앗, 따가!’

순간 따끔한 감각이 내 머리를 스쳤다. 방금 그건 정전기였나? 정전기가 아니더라도, 필시 정전기만큼이나 사소한 일일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나와 부딪힌 사람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제 갈 길을 걸어갔기 때문이다. 그제야 나는 내가 보풀이 잔뜩 일어난 스웨터를 입고 있음을 깨달았다.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그리고 해가 저물 때 즈음, 오늘을 시작할 때 가졌던 자신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오롯한 불안감만이 나를 지배했다. 심지어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이를 딱딱 부딪치기까지 했다. 그래, 분명 그때부터였다. 타인과 부딪혔던 그 순간. 그 이후로 줄곧 내가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에워쌌다. 괜히 숨이 막혀오는 기분에 스웨터를 갈아입지 않고 집을 나선 것을 후회하며 창밖을 힐끔거렸다. 어서 ‘그 소리’가 들리기를, 나는 이제 거의 빌고 있었다.

달칵, 달칵.

그리고 고대하던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매번 같은 시간 울려 퍼지는 두 번의 달칵거리는 소리는 하나의 신호였다. 그 소리는 도시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높다란 구조물에서 비롯됐는데, 얇고 긴 직사각형처럼 생긴 그것은 평소에는 불이 꺼져 있다가 특정한 시간만 되면 두 번 깜빡거리며 빛났다.

그러면 사람들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오늘 하루 자신에 대해 고찰한 내용을 글로 써서 제출했다. 제출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는 정부에서 나온 요원들이 그를 끌고 간 것을 봤다고 했고, 누군가는 분명 지하 감옥에 갇혀 끔찍한 고문을 받고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정작 내 주변에는 단 한 명도 글을 제출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을 제출하지 못한 사람이 어찌 되었든 간에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서둘러 가방을 들쳐 매고 감독관에게 미리 준비한 글을 내밀었다.

“오늘은 일찍 제출하시는군요.”

그 말투는 몹시 딱딱했지만, 내겐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그가 내 손아귀에서 두툼한 종이 뭉치를 뺏다시피 가져갈 때는 가히 짜릿할 정도였다. 나는 아까 내 목을 졸라오던 불안감을 새까맣게 잊은 채 빙글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나는 늘 컴컴하던 밤에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는데, 오늘의 귀갓길은 아름다운 황혼으로 물들어있었다.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를 즐기며, 과연 내 역작을 누가 읽어줄 것인가 생각했다.

‘어쩌면 정부의 아주 높은 사람이 읽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우선 정부의 말단 직원이 내 글을 보는 거야. 그리고 이 글은 아주 완전한 글이라고 칭찬하고, 상부로 넘기고, 상부에서는 또 더한 상부로 넘기고…….’

그러다가 갑자기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또 더한 상부라니, 정말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잖아?’

나는 내가 구체적인 명칭 대신 ‘상부’라는 모호한 단어를 쓴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 내가 정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정부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이 세상 대부분의 것들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나에 대한 것과 매일 정해진 시간에 나에 대한 글을 제출하는 것뿐이었다. 문득,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길이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이 다니던 길이었나?’

나는 파도에 갇힌 사람처럼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멍하니 발치를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순간 온몸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그 모든 그림자가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내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본다고 하던가. 검은 그림자들은 마치 저편의 세상에 사는 유령처럼 일렁거렸다. 나는 애써 눈을 비비며 그 속에서 나의 그림자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저 그림자가 나의 그림자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그림자인가?’

나는 예로부터 황혼이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저물녘 언덕 너머에서부터 다가오는 그림자가 내가 키우던 개인지, 아니면 나를 공격할 늑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제야 나는 내 그림자가 전혀 나를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온몸이 새까맣고 다리가 길쭉한 그것은 차라리 괴물에 더 가까워 보였다.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림자를 떼어 내기 위해 세차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그림자도 나를 향해 세차게 발을 굴렀다.

‘그렇군, 내 그림자도 나와 똑같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던 거야.’

그러나 나와 그림자는 결국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나는 그림자를 떼어 놓는 것을 포기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내가 느낀 두려움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나와 무척이나 닮았지만 내가 아닌 상대로부터 비롯된 ‘낯익은 두려움(uncanny)’이었다. 나는 나를 따라 주저앉은 그림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무언가에 홀린 게 분명해.’

원래부터 낮과 밤이 만나고, 해와 달이 만나는, 시공간적으로 ‘경계’에 놓인 순간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이한 경험을 하게 했다. 그러나 해는 서서히 저물고 있었고, 그림자는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나는 황혼의 마법이 가신 후에야 비로소 잠시 잊고 있던 본래의 의문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 내 글은 누가 읽게 되는 거지?’

나는 그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이가 누구인지 생각했고, 곧이어 딱딱한 말투의 감독관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즉시 발을 돌려 다시 회사로 향했다. 감독관이 아직도 자리에 남아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이미 내디딘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렇게 회사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익숙한 공간도 불이 꺼지면 몹시 낯설게 느껴진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어디선가 윙윙거리는 진동 소리가 들렸다. 나지막했지만 결코 무시할 순 없는 울림이었다. 그리고 나의 불운할 미래를 예고하듯, 저 멀리 닫힌 문틈으로 희미한 빛줄기가 내비쳤다.

나는 부나방처럼 그것에 홀려 다가갔다. 이럴 때 대부분 문을 여는 것은 안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판도라가 상자를 연 것처럼, 프시케가 에로스의 얼굴을 확인한 것처럼, 푸른 수염의 아내가 금지된 방에 들어선 것처럼, 아주 질 나쁘고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그러나 고전적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 언제나 유효하다는 얘기였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침을 모아 삼키고, 문고리를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방 안에서 맞닥트리게 된 장면은 예상했던 것만큼, 혹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다. 그건 동시에 당혹스럽기도, 슬프기도, 화가 나기도 하는 장면이었다. 그곳에는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감독관이 있었다. 그는 종이 더미를 한편에 쌓아두고, 그것을 하나하나 파쇄기에 집어넣고 있었다. 나는 단번에 그 종이 더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오늘 나와 다른 사람들이 제출한,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글이었다. 나는 마구잡이로 소리를 질렀다.

“왜 그걸 파쇄기에 넣고 있습니까!”

감독관은 나의 등장에 굉장히 놀란 듯 보였다. 그렇지만 곧바로 침착한 태도를 되찾더니, 심드렁하게 팔짱을 끼며 등을 벽에 기댔다. 나는 그의 고압적인 자세에 솟구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는 그런 나에게 왜 이 시간에 이곳에 있느냐고 추궁하는 대신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안 넣고 뭘 합니까?”

“당연히 누군가에게 보여줘야죠! 글은 그러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글을 누구에게 보여 줍니까?”

그는 종이 더미의 맨 위에 놓여있던 종이를 집어 들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거기에는 내가 전혀 모르는 타인의 얘기가 가득 적혀있었다. 빽빽하게 차 있는 검은 활자는, 오래 쳐다보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감독관은 마치 시한부 선고를 내리는 의사처럼, 냉정하고도 엄숙하게 말했다.

“이런 글은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못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왜 글을 쓰라고 하는 겁니까? 그것도 매일같이 말입니다.”

나는 드물게도 말까지 더듬어가며 물었다. 그러자 그는 혼란스러워하는 환자를 달래듯 친절하고도 사무적인 설명을 늘어놓았다.

“현대 사회는 지나치게 병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타인을 견딜 여유가 없어요. 그들은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싫어하고, 배척하고, 싸웁니다. 그런 마당에 사람들을 한 공간에 밀어 넣어 일을 시킨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분명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정부는 그런 비극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어요.

그때, 한 사람이 나타나 현대인들에게 소통은 능력 밖의 영역이니 차라리 정부에서 소통을 관리하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총기나 약물과 같이, 민간인들 사이에서 ‘소통’의 유통을 제한하자는 생각이었지요. 정부는 그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제한할 방법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죠.

어떤 사람은 ‘소통금지법’을 발안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소통을 하면 그에 따라 벌금을 매기거나 징역을 살게 해서 소통을 막아야 한다고요. 그러나 처음 소통의 제한을 제안한 사람은 그 의견에 반대했습니다. 그렇게 해봤자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막을 수는 없을 거라고 말이죠. 그리고 그는 다른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모두에게 스스로에 대한 글을 쓰게 하면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할 테니 그 어떠한 폭력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도 그 정책은…… 아주 효과적이었죠.”

그는 마지막 문장을 말하며 미묘하게 뜸을 들였는데, 나는 그 눈빛에서 나를 한심해하는 기색을 읽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나의 심증일 뿐이었으므로, 나는 어떠한 항의도 하지 못한 채 손만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대낮부터 나를 사로잡던 불안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을까. 고개를 푹 숙이고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나를 안쓰럽게 여긴 것인지, 감독관은 이내 종이 더미를 뒤적거려 한 뭉치를 끄집어냈다.

“자, 선물입니다. 이걸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이게 뭡니까?”

“당신이 오늘 낸 글입니다. 운 좋게도 아직 파쇄되지 않았군요.”

“제가 진실을 알게 됐는데, 따로 입막음하거나 하지는 않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당신에겐 어딜 가서 말할 사람조차 없을 테니까요. 당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그렇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종이를 파쇄기에 집어넣는 일을 계속했고, 나는 대화가 종료되었음을 깨달았다. 아니, 그것을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종이 뭉치를 소중하게 품 안에 끌어안고 회사 밖을 나왔다. 한 번 들기 시작한 의문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애초에 이 글이 내가 소중하게 끌어안을 만큼의 가치가 있나?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울분에 못 이겨 마구잡이로 걸었다. 나는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단지 사막의 유목민들이 북극성을 보며 방향을 찾듯, 도시 한 가운데 서 있는 막대기 모양의 구조물을 바라보며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가까이서 보게 된 구조물은, 생각보다 작았고 또 생각보다 초라했다. 그 주변은 공원처럼 꾸며져 있었는데,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은 티가 역력했다. 나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아도는 빈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내가 끌어안고 있던 종이 뭉치를 한 장 한 장 뜯어냈다. 그 후에는 주변에 널린 돌들을 종이의 장수만큼 줍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가벼웠고, 어떤 것은 무거웠다. 어떤 것은 둥글고, 어떤 것은 모났다. 나는 주운 돌멩이를 종이로 감싸기 시작했다. 내가 그 일련의 작업을 마칠 때까지,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도.

종이가 다 떨어지자 나는 포장된 돌멩이를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잡힌 것은 조금 가볍고, 약간 모난 돌멩이였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참은 채로 팔을 뒤로 젖혔다. 그동안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 외에 별다른 일을 하지 않은 팔이 뻐근함을 호소했지만, 무시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담아 그것을 막대 모양의 구조물을 향해 던졌다.

팅, 맑은소리와 함께 돌은 부딪혀 떨어졌다. 구조물은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내게는 아직 내가 오늘 쓴 글의 장수만큼 기회가 남아있었으니까. 나는 다음 돌을 더 무겁고, 모난 돌로 집었다. 몇 번 같은 일을 반복해도 구조물에는 흠집조차 가지 않았다. 지나가던 노인 한 명이 나를 힐끔거렸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마치 달걀로 바위를 내려치는 것 같군.’

순간 바닥에 널린 돌멩이가 깨진 달걀과 겹쳐 보였다. 그러자 갑자기 그 광경이 아주 끔찍한 참극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기묘한 환취가 풍겨왔다. 그건 달걀 비린내를 닮은 날 것의 냄새 같기도 했고, 피비린내를 닮은 죽음의 냄새 같기도 했다.

나는 그 냄새로부터 불현듯 냉장고 안의 달걀을 떠올렸다. 그들의 세상은 안전하고도 정갈했다. 그러나 동시에 비좁고도 무료했다. 나는 잠시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달걀의 입장에선 바위에 부딪혀 허무하게 깨지는 것이 더 끔찍할까, 아니면 냉장고 안에서 느리게 상해 가는 것이 더 끔찍할까. 그 상념을 깨뜨린 것은, 어디선가 들려온 희미한 소리였다.

달칵, 달칵.

그리고 눈이 아프도록 시야가 명멸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그 빛을 바라봤다. 막대 모양의 구조물이 고장이라도 난 듯 끊임없이 깜빡거렸다. 달칵, 달칵, 하고 또 한참을 쉬고, 다시 달칵, 달칵, 하고 또 한참을 쉬고. 그렇게 증식하는 소리는, 마치 무너지는 바벨탑의 울음소리 같기도, 글을 쓰기 전 입력하는 두 번의 스페이스 바 소리 같기도, 암호를 전달하려는 모스 부호 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더듬더듬 기억을 헤집었다. 모스 부호로 두 번의 점은 ‘I,’ 즉, ‘나’를 의미했다. 어쩌면 우리가 글을 쓰기 전에 들여쓰기로 스페이스 바를 두 번 누르는 것은, 곧 나만의 이야기를 쓰겠다는 선포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 두 번의 점 뒤에 한참의 공백이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점 길이의 세 배 되는 그 공백은 곧 하나의 선이었다. 점 두 개와 선 한 개, 그것이 의미하는 건 ‘U(you),’ 즉, ‘타인’이었다.

결국 ‘타인’ 속에 ‘나’가 있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역설인가. 나는 ‘달칵’과 또 다른 ‘달칵’ 사이의 공백 동안 생각했다. ‘U'가 점 두 개와 선 한 개로 이루어진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왜냐하면 점이 콜럼버스의 달걀이고, 알이 또 하나의 세계라면, 점은 또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점이 모이면 선이 되듯, 무수히 많은 세계가 모이면 하나의 흐름이 되고, 그것은 곧…….

“거기서 뭐 하고 계세요?”

나는 고개를 돌려, 내게 그렇게 물은 사람을 쳐다봤다. 그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작 선 하나였다는 사실을, 그 짧지도 길지도 않은 미묘한 공백 동안에 우리는 ‘나’에서 ‘타인’으로 이어지기 위한 소통의 여지를 남기는 것을.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돌멩이를 힘없이 놓쳤다. 돌멩이는 툭 하고 떨어졌으며, 투르륵, 투르륵, 하고 굴렀고, 한참 후에 툭, 하고 멈춰 섰다. 툭, 투르륵, 투르륵, 그리고, 툭. 그것을 모스 부호로 입력한다면 이렇게 될 터였다.

 

·–– ·

 

그리하여 나는 점 세 개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 깜빡이는 빛을 등진 채 입을 열었다.

 

 

우수 당선소감

 

조경혜(영여교육과3)

 요즈음 그 어느 때보다 소통이 어려워진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들었던 한 수업의 내용을 인용하자면, 현대인들은 자신의 지향에 부합하는, 자신과 상동한 대상에만 호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타자의 추방’ 혹은 ‘에로스의 종말’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데미안>에서 나온 것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둘러싼 단단한 껍데기를 깨고 나와 타인의 존재를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 ·>에서 모스 부호를 통해 ‘나(··)’가 ‘타인(··–)’으로 이어지는 데 필요한 것이 단 하나의 선(–)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이것을 한글로 바꿔 말하자면, ‘나’가 ‘남’으로 이어지는 데 필요한 것은 단 하나의 네모(ㅁ)라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네모난 우리 안에서 ‘나’와 ‘남’이 만나 다시 ‘우리’가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과 함께 이 믿음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송민호(국어국문학과 교수)

여기, 아직, 무언가 쓰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런 때에도, 이런 때조차.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눈에 띄는 사람들의 풍경이 모두 어색해져버린 가을날, 어느새 46회를 맞은 홍익대학교 학예술상 소설 심사를 하며 들었던 생각은 무언가 쓴다는 것의 위대함이었다. 쓰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쓸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행위이다.

사람들의 위축된 마음만큼 응모된 편수는 예년보다 약간 줄었지만, 전체 수준은 놀랄 만큼 높았다. 우선 눈에 띈 것은 독특한 제목의 <·–– ·>. 글쓰기 과정에서의 검열, 자기 통제의 과정을 재기발랄한 스타일에 담았지만, 자칫 난삽함으로 흘러 정돈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또 다른 작품은 <그녀>. 흑백사진 한 장만 남기고 사라진 그녀에 대한 추적을 통해 사진만으로 남은 그녀의 존재를 포획하고 있다. 철학적인 주제가 담겨 있지만 조금 밋밋해서 전달되지는 못하고 있는 듯하다. 고심 끝에 고른 최우수상은 <은주 언니에게>라는 작품. 대학 밴드 내에서 일어난 성폭력의 피해자가 진실을 편지에 담는 내용이다. 설명이 길게 이어지는 것은 아쉬웠지만, 문장의 전달력이 상당했고, 고백하는 장면까지의 긴장감이 상당해 구성적 힘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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