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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산 메가 뮤지컬, 브로드웨이를 넘어 세계를 지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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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을 잘 모르는 사람도 <오페라의 유령>이나 <레 미제라블> <캣츠> <미스사이공>은 한 번쯤 들어봤을 만큼 유명한 작품으로 이른바 뮤지컬 빅 4라고 불린다. 뮤지컬의 시작과 발전은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비롯되었지만 대표작 네 작품의 원산지는 영국 런던이다.

최근 가수 BTS와 영화 <기생충>, 웹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선풍적인 인기에 대하여 세계적인 언론들이 ‘코리안 인베이전’을 떠들고 있다. 특정 아티스트나 작품의 지배가 아니라 한국의 대중문화의 다양한 작품과 장르가 세계 대중문화 시장을 새롭게 장악했다는 ‘침공’이라는 표현은 사실 1960년대 말 영국의 록 그룹 비틀즈가 미국 팝 시장을 점령하면서 시작된 ‘브리티시 인베이전’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셰익스피어 이후의 연극 전통,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부터 길버트와 설리번의 라이트 오페라까지 뮤지컬의 초기 전통을 세웠던 영국은 두 번의 세계 전쟁으로 미국의 뮤지컬에게 시장을 내주었다. 1960년대까지 런던 극장가는 <오클라호마!>부터 <키스 미 케이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최초의 록 뮤지컬 <헤어>에 이르기까지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지배하였다.

뮤지컬에서 영국산 제품이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천재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 덕분이었다. 20대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작사가 팀 라이스는 성경을 현대화한 스토리를 강렬한 비트와 금속성이 강한 록 음악 음반을 출시했다. 예수를 신화적 존재가 아닌, 갈등하는 현대의 대중스타처럼 그려낸 <지저스 크라이스 수퍼스타>는 ‘I don't know how to love him’ 등 히트 넘버가 가득 수록된 음반으로 빌보드 차트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고 이듬해 브로드웨이에서 동명의 뮤지컬 초연으로 이어졌다. 젊은 관객들은 싱글음반을 들고 뮤지컬 티켓을 사려고 극장 앞에 줄을 섰고 그 옆에는 성경과 예수님을 모욕했다며 항의하는 기독교 신자들의 데모행렬이 나란히 섰다. 환호와 항의 행렬 사이의 논란은 뉴스로 연일 보도되었고 음반과 뮤지컬은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다. 데뷔작으로 국제적인 스타가 된 로이드 웨버와 라이스 팀은 ‘날 위해 울지 마오 아르헨티나여’로 빌보드 차트를 또 한 번 석권하며 화제를 모은 뮤지컬 <에비타>로 런던과 뉴욕의 극장가를 강타했다. 미국에서 뮤지컬을 수입하던 영국이 브로드웨이를 타격한 뮤지컬의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서막이었다.

1980년 로이드 웨버의 차기작은 <황무지>로 유명한 영국의 시인 T.S. 엘리어트가 어린이를 위해 쓴 시집을 토대로 쓴 뮤지컬 <캣츠>였다. 로이드 웨버가 팀 라이스와 결별하고 만난 새로운 제작 파트너는 작사가가 아니라 프로듀서 카메론 매킨토시였다. 특별한 줄거리도 없고 인간의 갈등도 없이 고양이만 출연하는 우화 뮤지컬은 제작이 불투명했다. 투자자들은 염려했고 배우들도 작품을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프로듀서 매킨토시는 예외였다. 고양이의 신기한 모험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제작을 결정하며 그가 전제한 것은 관객의 ‘체험’이었다. 관객들이 고양이에 대한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 세계로 들어가서 경험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캣츠>가 런던과 뉴욕에서 대히트를 기록하자 뮤지컬의 제작방식은 바뀌었다. 프로듀서의 역할은 커졌고 무대와 음악은 현실보다 거창하게 그려야했다. 이런 유럽식 대형 뮤지컬을 ‘메가 뮤지컬’이라고 불렀다.

매킨토시는 프랑스 작곡가인 미셸 쇤베르그와 작사가 알랭 부블릴이 불어로 만든 <프랑스 혁명>이라는 음반을 듣고 영어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새롭게 제작했다. 빅토르 위고의 동명의 장편소설을 뮤지컬로 만든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 역사가 배경이지만 가난한 자와 선한 자의 고통과 연대를 희망을 노래하는 보편적인 이야기로 바꾸었다. <레 미제라블>은 세계 수 십 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세계인은 장발장의 노래에 눈물을 흘렸다. 이 팀워크는 <미스 사이공>까지 제작하며 명실상부한 메가 뮤지컬 시대를 이어갔다. 로이드 웨버도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 <선셋대로> 등을 연이어 성공시켰다. 1980년대부터 90년대, 21세기 초반까지 메가 뮤지컬은 브로드웨이를 비롯한 전 세계 뮤지컬 극장을 장악했다.

메가 뮤지컬은 대사가 거의 없이 음악 중심으로 전개되어 마치 오페라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극적인 상황은 록이나 팝의 요소를 가진 선율로 관객의 감정을 고양시키고 슬픈 장면에서는 동일한 방식으로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배우들이 불러야 하는 노래들도 웬만한 성악가 수준의 기초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오페라의 유령>을 오페라 작품으로 오해하는 것은 단순히 뮤지컬을 모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매킨토시의 상업적 성공은 음악, 드라마, 무대미술 각 부분의 합보다 더 거대한 것을 만들어내는 뮤지컬 체험에 있었다. 체험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가사를 다 이해하지 못해도 놀라운 무대효과와 감정에 호소하는 음악은 세계를 흔들었다. 뉴욕과 런던의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이고 지역 언어로 번안해도 감정과 메시지는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이에 덧붙여진 마케팅 전략은 장소의 한계, 시대의 한계를 쉽게 넘어섰다. 매 작품마다 상징 이미지와 슬로건을 만들어 포스터와 관련 상품까지 통일된 마케팅 전략을 사용한 것도 매킨토시가 처음 시도한 방식이었다. 노란 고양이의 눈에 비친 댄서의 실루엣(캣츠), 팬텀의 하얀 가면(오페라의 유령), 헬리콥터 후륜 연기와 여인의 이미지를 교차시킨 이미지(미스 사이공), 어린 코제트의 얼굴에 비친 석양과 프랑스 국기(레 미제라블)는 그 자체만으로 세계 어디서든지 같은 뮤지컬을 떠올리게 하며 작품 자체의 브랜딩에 성공했다.

매킨토시는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 바깥에서의 뮤지컬 공연을 ‘투어’로 접근하지 않았다. 지역이나 해외 공연 제작사에게 공연 판매권을 주는 대신 오리지널 프로덕션의 생생한 호흡을 유지하기 위한 레플리카 라이선스를 제공하고 제작 과정을 통제하는 사업방식을 선택했다. 사라 브라이트만이 <오페라의 유령>을 공연한다는 의미보다는 <오페라의 유령>에서 크리스틴 역할을 맡은 배우가 사라 브라이트만이었다는 식으로 배우의 경력에 작품명이 도장으로 찍히는 방식도 중요하게 여겼다. 스타캐스팅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포스터부터 관련 상품까지 일관된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도 같은 목표였다. 프랑스어나 독일어로 작품의 언어가 바뀌어도 프로덕션의 내용과 디테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메가 뮤지컬이 뮤지컬의 대명사가 된 것은 다름 아닌 브로드웨이의 공인 덕분이었다. 영국산이든 유럽산이든 작품들이 브로드웨이를 대표하는 뮤지컬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수익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86년 런던 허 마제스티 극장에서 초연된 <오페라의 유령>은 뮤 2016년까지 런던에서 30년간 12,500여회가 공연되었으며 세계 150여개 도시에서 상연되었다. 2016년 기준 총 매출액이 60억 달러가 넘었으며 관객은 3천 1백만명이 관람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매출 1위는 <라이온 킹>이지만 공연의 횟수나 티켓 판매 장수로는 <오페라의 유령>이 최고 기록을 세우고 있다. 현재도 공연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 롱런 기록은 깨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매출 순위가 2위가 된 것은 <라이온 킹>보다 10년 전에 초연을 시작한 <오페라의 유령> 매출이 물가 상승분과 같은 경제적인 수치가 비교되지 않은 상태로 단순 매출 금액으로 비교한 것을 감안하면 <오페라의 유령>의 흥행 기록은 경이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말 영국산 메가 뮤지컬의 인기는 서서히 식어갔지만 그 영향력은 미국 대형 기업으로 옮겨갔다. 20세기 애니메이션의 명가 디즈니 프로덕션이 만든 <미녀와 야수(1994)> <라이온 킹(1998)>은 메가 뮤지컬의 제작방식을 디즈니 식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연출가 줄리 테이머가 보여준 <라이온 킹>의 놀라운 인형극 기술은 메가 뮤지컬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캣츠>나 <레 미제라블>은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내렸지만 메가 뮤지컬의 혁명은 진행 중이다. 메가 뮤지컬 시대 이후 뮤지컬은 미국만의 장르를 넘어섰다. 이제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각 지역의 색채로 표현된 글로벌한 예술형식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2001년에 공연된 한국어 라이선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성공은 대한민국에 뮤지컬 산업화를 가져왔으며 한국식 창작 뮤지컬 생산의 기폭제가 되었다. 우리도 메가 뮤지컬의 영향력을 가까이서 확인한 셈이다.

 

참고

WIKIPEDIA,2021.11.01.,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highest-grossing_music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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