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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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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원래 글을 쓰는 것을 퍽 가볍게 여겼다. 생각이 많은 사람에게, 글은 생각의 가지를 이리저리 마음껏 뻗어낼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문사에 들어온 후 글을 쓰는 것을 가볍게 여기던 생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쓰고 싶은 글을 가지처럼 뻗어내기만 했던 기자는 기사를 쓰기 시작하면서 가지치기 작업을 해야 했던 것이다. 가지를 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기사에 주관적 의견이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일단 취재할 내용을 깊게 파헤치면 자연스레 주관이 생겼기 때문이다. 주관을 한 꺼풀씩 걷어내는 것은 다소 고통스러우면서도 끈기가 필요한 작업이지만 이는 글을 단단하게 빚어 주었다. 글은 그렇게 하나둘 정돈됐다. 글이 자유로운 생각을 담는 수단이라고만 여겼던 오만한 생각은, 기사를 쓰며 바뀌었다. 글의 무게를 알게 되었고, 그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수없이 생각을 가다듬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글은 정돈된 생각이어야 한다는 것을 기사를 쓰면서 알게 되었다.
글을 쓰는 것의 무게감을 알게 된 후, 더 이상 개인 블로그나 노트에 가볍게 글을 끄적일 수 없었다. 들쑥날쑥한 생각이 컴퓨터 화면을, 혹은 종이를 수놓는 것을 견디지 못해 글을 쓰는 것을 금방 그만두었다. 모순되게도 그러한 글을 마저 작성하거나, 수정할 엄두도 쉽게 내지 못했다. 그것은 너무나 부담이 되고 어려운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기자의 블로그에는 간절히 빛을 볼 날을 기다리는 임시 저장된 글이 수십 개 쌓였다. 글을 쓰는 것을 누구보다도 가볍게 생각했던 이가 쉽사리 글을 끝맺지도 못하게 되었다. 단순히 글을 쓰지 않는 것을 가볍게 여겼지만, 이것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기자에게 되돌아왔다. 정돈되지 않은 생각은 쌓이고 쌓여 흐릿한 기억으로 남았고, 기억되고, 곱씹어야 할 생각들은 잊혔다. 그렇게 생각들은 머릿속을 마구 더럽히고 있었다. 그렇다, 기자는 글이 ‘생각’을 정돈하는 수단이라는 것을 간과했던 것이다.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자면, 얼마 전 기자는 급체로 된통 고생했다. 급체의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정황상 그동안 생각 없이 삼켜냈던 자극적인 음식 중 하나가 화살이 되어 돌아온 것으로 보였다. 삼키고 삼킨 것들이 소화되지 못하고 비수가 되어 날아온 것이다. 문득 기자는 글을 쉽사리 쓰지 못하는 스스로의 상황이 소화불량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것은 생각의 과부하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한마디로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건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생각은 글을 통해 소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기자는 오랫동안 생각을 글로 풀어내지 못했고, 쌓이고, 쌓인 생각들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생각의 소화불량을 한차례 겪은 후 마음을 다잡고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진실된 감정과 생각을 글에 담는다는 것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글을 작성하다 보면 부풀려지거나 의도했던 방향과는 다르게 글이 쏟아지기도 하기에 언제나 글의 방향성에 대한 정립이 필요했다. 거듭 작성하고 거듭 퇴고해야만 어느 정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었다. 이것은 기사글이든지, 주관이 한껏 들어간 일기든지 똑같을 것이다. 이곳저곳 남기고 간 생각의 발자취를 긁어모아 글을 통해 단단한 모양으로 다잡아야 한다. 윤동주(1917~1945) 시인의 <자화상>에서 화자는 거듭해서 우물을 찾아가 스스로를 응시한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행위이다. 기자에게 우물은 글이고, 끝없이 작성해야만 비로소 스스로를 뚜렷하게 응시할 수 있다. 우물을 찾아가 응시하듯 글을 쓰는 행위를 지속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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