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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여래좌상 木造如來坐像>, 조선시대, 나무, 49X33X36.5cm, 소장번호 2054

박물관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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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여래좌상 木造如來坐像>, 조선시대, 나무, 49X33X36.5cm, 소장번호 2054
▲<목조여래좌상 木造如來坐像>, 조선시대, 나무, 49X33X36.5cm, 소장번호 2054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목조여래좌상은 높이 50.1cm, 무릎폭 32.5cm의 아담한 소형불상이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차분하고 평온한 조형감을 준다. 몸에 비해 얼굴이 크게 부조되었으며, 얼굴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부처의 머리에는 소라형이 강조된 나발과 반달형 중앙계주, 반구형 정상계주가 부조되었다. 보살의 얼굴과 몸은 통통한 양감으로 표현되었으며, 가늘게 뜬 눈, 원통형으로 오똑한 코, 꾹 다문 입, 굵은 인중을 갖추고 있다. 부처의 대의 자락은 양어깨를 덮고 있는 통견으로, 명치 부분에는 겨드랑이를 가리기 위해 착용한 승기지가 가로로 부조되었다. 여래좌상의 하단을 보면 사각형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를 통해 불상을 조성하면서 몸 안에 봉안하는 사리나 불경 등의 복장물을 넣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불상에 복장물이나 명문이 남아있지 않아 명확한 연대를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방형의 얼굴, 짧은 상체, 찢어진 눈, 작고 오똑한 코로 표현한 얼굴표현과 왼쪽 어깨에서 앞으로 넘어온 대의 자락이 엉덩이를 덮을 정도로 길게 이어져 있어 이는 18세기에 초반에 활동했던 색난(色難, 생몰년 미상) 혹은 그 계보를 잇는 조각승이 제작한 것을 추론케 한다.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목조여래좌상이 조성된 조선시대 후기는 여러 승려장인이 대부분의 불사를 맡아 활동했던 시기로 여러 계통의 조각승이 활동했던 만큼 다양한 양식의 불교조각이 제작되었다. 색난은 조선시대 후기에 활동한 조각승으로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과 남아있는 문헌 기록을 통해서 그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다. 화순 영봉사 불상은 1680년에 색난이 제작한 가장 이른 시기의 불상으로, 당시 보조화승보다 높은 위치의 수화승으로 활동한 것을 통해 적어도 1680년 이전부터 조각 활동을 펼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후 약 50년간 꾸준히 불상 제작에 참여했다. 색난이 활동했던 17세기 후반은 사찰 주요 전각 내에 불상이 봉안되었기에 색난을 비롯한 그 계보에 속한 조각승들은 석가모니를 본존으로 모시면서 16나한을 모신 전각인 응진전이나, 승려가 임시로 지내며 도를 닦는 암자에 봉안할 불상을 제작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불상이 100cm 내외로 제작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구례 화순 쌍봉사 목조석가삼존상과 목조아미타삼존상, 화엄사 목조삼존불과 사보살상, 고흥 금탑사 목조보살좌상 등이 있다.

색난의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은 약 40여 명에 이른다. 이 중 수도승 충옥(忠玉), 초하(楚下), 등우(得祐), 일기(一機) 등과 같이 색난파의 계보를 따르는 조각승이 제작한 불상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불상의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가 가슴까지 늘어지며, 세 겹으로 주름이 접혀있다. 특히 왼쪽의 소맷자락이 내려와 무릎을 완전히 덮어지도록 제작했다. 이는 앞서 살펴본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목조여래좌상의 복식과 유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불상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부처의 인자한 미소를 통해 필자의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목조여래좌상에 섬세한 표현과 종교적 감수성이 잘 드러나며, 여전히 고고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존상에 쏟았을 조각승의 손길을 가늠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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