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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핀 벚나무 아래에서, 『엄마의 골목』(2017)

어머니에게도 바다처럼 깊고, 파도처럼 요란한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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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는 군항제로 유명한 도시다. 매년 4월 벚꽃 개화 시기를 맞아 정문을 개방하는 해군사관학교 주위로 관광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군항제는 3년째 열리고 있지 않지만, 진해의 벚나무들은 매년 겨울, 봄을 기다리며 꽃망울을 머금고 있다. 이맘때 그 바닷가 도시를 찾는 관광객들과는 관계없이, 진해를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추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편, 진해를 떠나 서울로 온 어느 성공한 소설가는 젊은 시절 어머니의 이야기를 책으로 남겨야겠다는 결심을 이루기 위해 진해로 돌아온다. 꽤 오래전, 기자는 작가가 어머니와 함께 고향 마을을 걸으며 나눈 대담을 읽으며, 생전 가본 적 없는 진해의 골목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곳에는 파도가 채 쓸어가지 못한 이야기들이 조개껍데기처럼 펼쳐져 있고, 이를 주워 담는 ‘어머니’가 있다. 그녀를 따라 작가도, 기자도 진해를 걸어본다. 
 

민쟁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엄마에 관한 에세이를 쓰고 싶다고 했다. 이왕이면 엄마와 함께 진해를 거닐면서. 시인은 망설이지 않고 응했다.

“그럼 제목은‘엄마의 골목’이겠네.”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진해까지 바로 들어갈 수는 없다. 3월에, 느닷없이 눈이 오는 서울을 등지고 떠난 기자가 내린 곳은 창원역이다. 창원역에서 1시간, 버스를 타고 종점 근처까지 향하는 동안 야트막한 언덕과 정겨운 시내 풍경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진해역은 번화가 한구석에 자리해 있고, 그 아래로 펼쳐진 삼거리를 따라 내려가면, 중원 로터리가 나온다. 하릴없이 한 곳을 뱅뱅 돌고 있는 것 같은 시내버스가 큰 몸집을 비켜주면, 한눈에 봐도 오래된 건축양식의 ‘진해 우체국’이 보인다. 비로소 진해에 온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도시에 대해 기자가 가지고 있던 ‘오래된 것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횡단보도를 건너, 그보다 더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 ‘흑백다방’으로 향했다. 추상미술의 기수 故유택렬(1924~1999)화백이 운영했고, 작가 김탁환이 청년 시절 습작을 즐기던 다방은, 유 화백의 딸 피아니스트 유경아씨의 전시공간으로써,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소년이 기자가 되어 창 밖을 기웃거리는 지역 명소가 되었다. 

 

중원로터리 흑백다방, 진해 인근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중원로터리 흑백다방, 진해 인근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흑백다방에서 천 개의 그림이 그려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쌓이고 흩어졌을까.
중원 로터리 벤치에 앉아 떠가는 구름을 우러렀다.
반복엔 이유가 있다. 고통이든, 사랑이든.
내가 쓰는 모든 것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원 로터리를 뱅뱅 돌기만 해선, 진짜 진해를 구경할 수 없다. 진해는 해군의 도시다. 충무공의 도시이며, 그 지명에는 바다를 의미하는 한자가 들어간다. 로터리를 빠져나와 군항 마을 초입으로 이어지는 근대문화역사길에는 군장류 따위를 취급하는 해군 마크사들이 즐비하다. 오랜만에 휴가를 받아 번화가로 나온 생도들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동상과 해군 병사들에 한해 저렴한 식사를 제공하는 식당들도 찾아볼 수 있다. 

군항마을 초입 수병 전우 동상, 군항제 무렵이 되면, 휴가 나온 병사들이 술에 혼곤히 취한 모습을 간혹 볼 수 있다.
군항마을 초입 수병 전우 동상, 군항제 무렵이 되면, 휴가 나온 병사들이 술에 혼곤히 취한 모습을 간혹 볼 수 있다.

 

해군사관학교 국어과 교관으로, 또 해군 장교로 진해에서 복무한 작가의 시선도 종종 철책선 너머로 향한다. 군항제의 정수라고 알려진 해군 의장대의 총검술 시범은 흥겨운 음악과 절도 있는 동작의 묘한 어우러짐을 보여준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어느 수병의 웃지 못할 비화를 아들에게 털어놓는다. 오래전, 의장대 시범에서 한 어린 병사가 허공으로 던진 총을 놓치고 떨어트린 것이다. 이때, 무거운 정적에 겁을 먹은 이 가여운 수병을 향해 가장 먼저 박수를 보낸 한 소년이 있었다. 박수 소리가 커져도, 눈물을 멈추지 못한 수병의 모습은 진해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었지만, 가장 먼저 박수를 보낸 소년은 소설가가 되어 다시 그 길목을 걷는다. 나의 추억 어딘가에 다른 누군가의 불행이 있다는 것만큼 잔인한 것이 있을까.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은 결국에 행복 어딘가에서 지난한 불행을 끄집어내야 한다. 그것이 소설가가 되지 못한 기자에게는 퍽 어려운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편, 행복 어딘가에서 불행을 찾듯, 불행의 언저리에서 그것을 이겨낼 희망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작가의 본령이다. 그 바닷가 마을엔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의 시간에 대한 오래된 염려와 애틋함이 녹아있다. 떨어지는 벚잎을 벗 삼아 낡은 불행을 던져주는 어머니를 따라, 애벌레처럼 꿈틀대는 꽃망울을 위안 삼아 새 희망을 이야기하는 ‘아들들’이 그곳을 걷는다.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부둥켜안고, 진한 입맞춤을 한 것이리라. 이제 곧 생도는 사관학교로 돌아가야 하고, 여자친구는 다음 외출일까지 기다려야 한다. 넉넉하게 10분은 멈췄던가 보다. 둥근 손잡이를 쥐고 서선, 사랑의 표현을 막는 규칙엔 무엇이듯 반대하리라 생각했다.

 

기자는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 물어 속천 바닷가로 향한다. 산책로가 구비된 예쁜 해안가가 아니다. 생업에 종사하는 어민들이 항구에 배를 정박하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생선 박스들이 곳곳에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묘한 안도감이 밀려온다. 바다로부터 멋대로 상륙한 ‘진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믿음과 함께. 

속천항 바닷가, 토요일 한낮에 비구름 가득한 항구에는 배들이 빽빽하다.
속천항 바닷가, 토요일 한낮에 비구름 가득한 항구에는 배들이 빽빽하다.

 

우리는 모성(母性)을 바다의 깊이에 비유하곤 하지만, 거친 물살이 자아내는 만조와 간조를 떠올린다면, 모성에 대한 단상은 그저 그런 우상화(偶像化)로 정리되지 않는다. 세상엔 많은 어머니가 있듯 많은 이야기가 있다. 쓸려 내려간 것들은 이내 거슬러 올라온다. 엄마도, 이야기도. 어느 것 하나 쉬이 잊을 수 없고, 내내 붙잡아 둘 수 없는 것들이다. 하모니카 불기를 좋아하던 어머니에게 작가는 속천 바닷가에서 하모니카를 연주할 것을 요청한다. <여행자>라는 이름의 곡이었다. 여행자란 서울로 떠난 아들일 수도 있고, 영영 만나지 못할 곳으로 떠난 남편일 수도 있지만, 어머니의 연주가 어쩐지 단단해 보이는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기자는 검은 바다 한가운데 서 있는 하얀 등대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다 반가운 광경을 보게 된다. 벚나무였다. 진해에 와 제대로 된 벚꽃조차 구경하지 못하는 것이 퍽 아쉬웠던 차에 얼마나 달가운 해후인가. 채 꽃을 피우지 못한 앙상한 나무들 한가운데 부드러운 꽃잎으로 제 몸의 선을 그린 나무가 고고히 햇빛을 받고 있었다. 멀리서 등대를 보다가, 가까이서 벚나무를 본다. 바다 주위로 외로운 것들이 제법 많다고 느껴진 순간이었다. 

속천항 바닷가 앞 벚나무, 흐린 날씨에 홀로 피어있는 벚나무 앞으로 관광객들이 붐빈다.
속천항 바닷가 앞 벚나무, 흐린 날씨에 홀로 피어있는 벚나무 앞으로 관광객들이 붐빈다.

  
어머니는 바다가 아니다. 어머니는 누군가를 외롭게 만들지 않는다. 어머니는 벚나무이고, 등대이며, 그저 바다를 건너고 싶었던 사람이다. 
 

장편소설, 바다를 건너는 일.

설명을 하며 깨달았다. 엄마가 홀로된 나이와 김관홍 잠수사의 아내 혜연 씨가 홀로된 나이가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다는 것을.

“하루를 잘 사는 게 중요해. 멀리만 내다보면 암담하단다. 아이들에게 집중하는 편이 나아. 네가 종종 들여다보도록 해라. 늘 신경 써서 돕고.”

 

속천 바닷가에서 한참 서성이다 갈 곳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다가 아닌 곳에 진해의 이야기가 있을 수 있을까. 기자는 문득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파도가 닿지 않는 높은 곳에서 진해를 만나고 싶었다. 장옥 거리의 벽화마을은 오래된 정취를 다듬어 쓰고자 하는 노력과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열정이 기분 좋은 화음을 만들어 낸다. 낡은 옹벽을 부수는 소리와 가정집 외벽에 자리한 색색깔의 화풍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카페와 비스트로들이 지어지고, <Piano Man>이 흘러나오는 루프탑에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누구도 외지인을 경계하거나, 원주민을 배척하지 않는다. 작가는 어머니와 우도의 벽화마을을 걸으며, ‘고래’를 마주하게 된다. 작은 물고기들이 모여 고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장옥거리 벽화마을, 낡은 판자촌 주위로 형성된 벽화가 동화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장옥거리 벽화마을, 낡은 판자촌 주위로 형성된 벽화가 동화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기자가 장옥 거리에서 본 풍경은 조금 다르다. 마음껏 그릴 수 있는 벽도, 공간도 없어 보였다. 그저 조금이라도 여백이 생기면, 그림을 그리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게 보였다. 두 사람도 들어가기 어려울 것 같은 골목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이내 문이 열리고, 허리가 잔뜩 굽은 할머니가 기자를 빤히 쳐다본다. 오랜 세월, 비린내 가득 묻은 바닷바람이 벽을 서서히 갉아먹는 동안, 사람들이 이곳에 예쁜 그림을 그렸다. 다시 부식되겠지만, 누군가 또다시 그릴 것이다. 어머니와의 기행문을 에세이로 낸 소설가가 또다시 어머니와 함께 어딘가를 걸어 갈 것처럼, 이제서야 비로소 시작된 이야기가 끝이 나는 순간 새로운 이야기도 시작될 것이다. 그것이 진해다. 조금의 공백도 허용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요란한 도시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사랑스럽고, 그래서 마음을 주게 된다.  
 
엄마가 말했다.
“너무 발가벗기진 마라. 그렇지만 내가 열심히 하모니카를 연습하는 건 꼭 넣어주고.” 

걸어봤다. 진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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