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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아름다움, 벚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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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커피전문점의 벚꽃 상품
한 커피전문점의 벚꽃 상품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 버스커버스커, 벚꽃엔딩 中

지난 4월 초, 전국 곳곳은 북적거렸다. 벚꽃 명소인 여의도 국회의사당 인근, 석촌 호수, 세종시 조천변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연인끼리, 가족끼리 벚꽃을 보러 나들이를 나와 서로의 사진을 찍는다. 체감하는 바와 같이 통계적으로도 벚꽃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갤럽 조사 결과, 벚꽃은 2004년 한국인이 좋아하는 꽃 9위, 2014년에는 10위 안에 들지 못했지만, 2019년 조사에서 2위로 부상했다. 벚꽃의 인기에 맞춰 각종 시장에서는 벚꽃 관련 상품을 내고 있으며, 또 소비자에게 각광을 받고 있다. 봄이 되면 ‘벚꽃엔딩’은 음원차트 상위권을 휩쓴다. ‘벚꽃 연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매년 봄마다 벚꽃엔딩 작곡자에게 큰 수익을 안겨준다. 각 커피전문점에서 벚꽃 관련 상품을 쉽게 볼 수 있다. 전국민이 벚꽃 홀릭에 빠진 오늘 날, 그에 관한 역사와 사회적 논쟁 및 문화를 살펴보자.

 

1971년 4월 당시 ‘창경원’/ 출처: 경향신문
1971년 4월 당시 ‘창경원’/ 출처: 경향신문

식민 시절 벚꽃 문화

4월이면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벚꽃축제가 열리는 시대에 살고있는 현대인에게는 낯선 사실이겠지만, 벚꽃축제가 우리나라에서 주류 꽃놀이로 자리 잡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벚꽃을 꽃놀이 수단으로 보지 않았으며, 벚나무에 실용적인 관점으로 접근했다. 벚나무는 목판 인쇄 재료로 사용됐다. 대한민국 국보 32호 팔만대장경의 판 60% 이상이 산벚나무로 만들어졌음이 발견됐다. 또한 벚나무는 활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벚나무의 껍질은 화피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활을 만드는데 필요한 군수물자였다. 세종실록 ‘오례’의 내용 중에 “붉은 칠을 한 홀은 동궁이라 하고 검은 칠을 한 것은 노궁이라 한다. 혹은 화피를 바른다”라는 내용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벚나무의 꽃인 벚꽃이 언제부터 국내에서 꽃놀이 수단으로 이용됐을까? 우이동, 창경궁, 국회의사당, 이 세 장소를 통해 살펴본다.

첫 번째로 살펴볼 장소는 우이동이다. 우이동은 북한산 인근에 있어 도심 주위에 있으며, 벚꽃이 군집을 이뤄 자생하고 있었다. 1910년대, 한 신문에 “(여러 사람이)청명한 일요일을 맞아 경성 명승지 우이동의 사쿠라꽃이 아마 잘 피었으리라 생각하고 이곳(우이동)에 이르러…”라는 구절을 통해 당시 조선인이 우이동에 벚꽃 구경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별다른 시설 없이 벚꽃 주변에서 주간에 꽃놀이를 즐기는 초보적인 꽃놀이 문화 형태였다. 벚꽃놀이 문화가 발전한 데에는 일제의 영향이 컸다. 1900년대 초 당시 조선은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들이 많은 상태였고, 그들은 본국에서 느낀 벚꽃놀이를 열망했다.

당시 일제는 도심 전통 공간 내에 인공적으로 벚꽃을 조성하며, 박물관, 동물원 등 근대 오락 시설을 갖춰 벚꽃축제를 즐겼다. 대표적으로 ‘우에노공원’이 있다. 일제는 우에노공원을 모티브로 삼아 창경궁을 그와 비슷하게 바꾸기 시작했다. 당시 창경궁은 1885년 이후 방치된 상태였다. 1907년 일본에 의해 고종이 강제로 폐위되고 순종이 황제에 즉위하여 덕수궁(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수선 공사가 진행되고 창덕궁 동쪽에 인접한 창경궁에 박물관・동물원・식물원을 조성하기로 결정됐다.

당초에는 황실의 위락과 위엄을 위해 궁궐의 후원을 의미하는 어원(御苑)을 시설한다는 명목으로 추진됐지만, 1909년 11월 동물원과 식물원이 개원했다. 이후 일반인에게 관람을 허가하면서 1911년 4월부터 명칭이 ‘창경원’으로 불리는 수모를 당한다. 창경궁에 벚꽃을 식재한 데에 대한 조선인들의 불만은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었는데, 식재된 벚꽃이 뽑히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창경원은 10일 안팎의 벚꽃축제 기간 동안 2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받은 연도도 있을 만큼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창경원의 인기는 해방 이후, 심지어 한국전쟁 이후에도 나날이 커졌다. 식민지 시기 벚꽃축제 이용객이 가장 많았던 시기는 1932년으로 근 10일 동안 이용객은 약 26만 명이었는데, 1970년대에는 밤벚꽃놀이 기간이 한 달 이상 계속되며 1970년에 100만 명, 1972년과 1973년에는 120만 명을 넘어섰으며 1974년에는 두 달 동안 무려 2백여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1981년 밤벚꽃놀이를 시작한 공휴일 하루에만 20만 명이 창경원에 몰려들었다. 이러한 이용객의 증가 배경에는 서울 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있었다. 1900년대 초 약 30만에 불과했던 서울시 인구는 1945년 90만 명, 1950년에는 169만 명, 1960년에는 240만 명, 1970년에는 540만 명, 1980년에는 830만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창경원의 인기는 관람객 개인에게 독으로 작용했는데, 많은 인파로 인해 창경원에서 벚꽃을 즐기기 힘들어졌다. 또한 창경원 설립에서부터 있던 일제의 잔재인 벚꽃에 대한 거부감과 많은 인파로 인해 훼손된 창경궁 문화재 복원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일제 문화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문화로

창경궁 이외의 여러 장소에서 벚나무를 식재하고 벚꽃 축제를 즐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여의도 국회의사당 인근이 있다. 1968년 4월, 서울시는 국회의사당이 들어설 여의도 인근에 수양버들과 벚나무를 심는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당초 수양버들만 심는다는 계획에서 변경된 것이다. 하지만 각종 현실적 제약 때문에 실제 벚나무가 심어지기 시작한 것은 1971년 봄이다. 이후 벚나무가 자라, 1996년 ‘제1회 여의도 윤중로 벚꽃축제’가 열렸으며, 현재는 ‘영등포여의도봄꽃축제’로 명명되고 있다. 벚나무가 심어지고 축제가 열린 이래로 이에 대한 저항도 몇 있었다. 첫째는 상설 매점이 없어 노점상과 포장마차가 즐비해 무질서했다는 것이다. 1996년 『동아일보』의 한 기사에 “사진을 찍을 만한 곳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노점상과 포장마차들이 빽빽이 들어서 통로를 막은 채 장사를 하고 있었다”라는 불만을 호소하는 글이 실렸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시간이 지나며 해소됐다. 현재 영등포구는 자원봉사자, 직원 등을 동원해 여의도 전역에서 무단 주차와 불법 노점상 등을 집중 단속한다. 둘째는 교통 불편에 대한 불만이다. 구도심에 있었던 창경원과 달리 여의도는 당시 외곽이기에 시민들이 접근하기 불편했다. 하지만, 도시가 팽창함에 따라 문제는 저절로 해소됐다. 마지막으로, 일제의 잔상인 벚꽃을 국회의사당 옆에 두어 국회의 권위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벚꽃이 국내 고유종이라는 왕벚나무 제주도 원산지설이 돌며 반발은 다소 사그러졌다. 최근에 나온 결과로도 제주도 왕벚나무와 일본 왕벚나무는 별개의 종으로 나타났다. 결국, 현대인들에게 벚꽃을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식물이 아닌 아름다운 우리나라 꽃으로 받아들이는 단초를 마련했다.

앞서 본 저항이 모두 해소되자, 국내에서 벚꽃 문화는 제대로 꽃피울 수 있었다. 2019년에 개최된 ‘2019 영등포 여의도 봄꽃축제’에서는 △수제 예술품과 체험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는 봄꽃예술상단 △다양한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푸드트럭 △<한지등 특별展>, <봄꽃 사진그림>展도 볼 수 있었다. 작년 코로나19로 인한 전국적인 사회적 거리두기에서도 벚꽃 축제 문화 열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2021 영등포여의도봄꽃축제’에서는 방역지침으로 인해 사전 신청 인원만 오프라인으로 입장이 가능했지만, ‘봄꽃 온에어’라는 온라인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여러 가수의 공연, 무용 공연, 북콘서트 등등 여러 컨텐츠를 온라인으로 즐길 수 있었다.

온라인에서 컨텐츠를 선보인 ‘2021 영등포여의도봄꽃축제’
온라인에서 컨텐츠를 선보인 ‘2021 영등포여의도봄꽃축제’

 

벚꽃도 뭐고 다 필요 없어 나는 네 곁에 있고 싶어 딱 붙어서~♪ 볼빨간사춘기, 나만 봄 中

우리나라 벚꽃축제 문화는 기초적인 벚꽃 구경 형태에서 각종 예술이 결합된 종합 예술 문화 형태로 진화했다. 그중에는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전락하는 불편한 역사도 존재한다. 하지만 벚꽃이 일제의 상징이라는 시각이 있더라도, 벚꽃의 아름다움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은 변하지 않는다. 위 노랫말처럼 사실은 벚꽃보다는 같이 즐기는 사람이 중요한 것일 수 있다. 아쉽게도 올해 벚꽃은 다 졌지만, 내년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벚꽃 축제를 즐기는 것은 어떨까?

 

[참고문헌]

김동명, 『식민지 조선에서의 벚꽃의 문화접변』, 2018, 한일관계사학회

김동명, 『벚꽃의 문화접변 - 창경원 벚꽃놀이에서 여의도 벚꽃축제로 -』, 2019, 한일관계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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