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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엔 괴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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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기자는 한강에 가지 못했다. 이는 영화 <괴물>(2006)을 보고 난 이후부터다. 영화를 본 다음 날 기자의 오빠는 “실제로 한강에 독극물을 버린 사건이 있다”라고 했고 그날 이후로 기자는 한강에 가지 못했다. 당시 기자의 나이는 6살이었다. 이로부터 약 5년간은 한강이란 단어를 듣는 것도 싫어했다. 이 걱정과 두려움이 정확히 언제 사라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한강에서 먹는 라면이 가장 맛있다는 것을 안다. 괴물은 기자의 마음 속에만 존재했다. 물론 괴물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한동안은 한강에 가길 꺼렸다.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매번 거절해 한강에서의 추억을 쌓을 수 없었던 시간이 아깝다. 어쩌면 기자가 막연한 두려움을 애써 무시하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을까? 무언가를 시도하기 전 어떤 이유에서든 망설이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시작했다. 신문사도, 복수전공도 그렇게 시작됐다. 힘들거나 안 맞을 수도 있다는 걱정과 두려움을 꾹 누른 채 무작정 지원서를 작성했다.
기사를 작성할 때도 그랬다. 민감하고 까다로운 소재를 맡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무시했다. 기자로서의 의무감, 자부심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맡을 사람이 없었고 기자는 두려움이 없었다. 이는 기자로서 좋을 수도 혹은 위험할 수도 있다. 신문의 파급력을 무시한 결과는 꽤 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4번밖에 신문을 발간해 보지 못한 기자가 비교적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시도의 덕이 컸다. 직접 피해자를 만나 인터뷰하고, 대리점 직원을 찾아가 사건의 진위를 물어보기도 했다. 물론 무조건 까다로운 기사라고 좋은 기사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정말 알려야 하는 사건이 있을 때, 어려운 사안이라 맡기가 두려워 기사를 쓰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안 좋은 것이 있을까? 다음 기사를 대비하기 위해 의미 없이 까다로운 기사를 쓰겠다는 게 아니다. 까다롭고,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기사는 어쩔 땐 그 특성만으로 다룰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건 사건의 사실이나 과정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자는 그 단계를 밝혀줘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지 않을까.
괴물이 없다는 것을 안 이후에도 한강에 가지 못했던 것처럼, 소재를 가져온다고 바로 신문에 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출판물은 작든 크든 어느 정도의 검열을 거친다. 독일 작가 에리히 뢰스트(Erich Loest, 1926~2013)는 『양들의 분노(Der Zorn des Schafes)』라는 책에서 동독에 지낼 때 시작한 자신의 작가 생활을 얘기한다. 당시 검열이 심했던 동독에서는 그의 문장이 여러 사회적 이유로 삭제됐다. 결국 그는 서독으로 도망쳤지만, 그 이후에도 스스로가 자신의 문장을 검열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이 문장을 써도 될까?”라며 자신을 의심했다. 그는 마음 속에서 외치는 소리의 주인공을 ‘귓속에 사는 작은 녹색 인간’이라 칭했다.
기자는 더 이상 한강의 괴물도, 소재도 두렵지 않다. 기자 안에 살던 괴물을 물리치니 녹색 인간이 기자의 귓속에 자리 잡는다. 무모함은 자칫하면 객관성을 잃기에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또한 시간이 지나면 괴물이 돼 한강에 못 가게 하진 않을까? 결국 녹색 인간은 동독의 무리한 검열 압박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나라에서 좋은 책이 나올 수 있을까? 현재는 기자 안에 작은 녹색 인간이 생기기 직전이다. 그래서 기자는 되풀이한다. 한강엔 괴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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