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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한 큰 맛, 한국적인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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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적 현실과 세계와의 문화적 차이

옛날 중학교 시절에 본 경복궁 내부 모습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특히 왕이 근무했다는 장소와 의자의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았고 온통 먼지가 자욱하게 쌓여 있었다. 궁궐 벽이나 바닥도 질감이 너무 허접해서 의아했다. 궁내의 바닥도 대부분 맨 땅이고 조경 공사도 되어 있지 않아 궁궐의 품위와 걸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견학을 가도 감동을 부르는 기억은 드물었다. 항상 무엇인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특히 일상과 다른 규모나 품격, 수려함에 대한 기대감을 채울 수 없었다. 1970년대 당시에 예술문화와 관련한 전시공간이나 화장실 등 제반 시설은 어린 나이에 보기에도 조악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미술대학을 다니면서도 서구문화에 대한 동경은 있었지만 우리 문화가 배어있는 사찰이나 고가에 대한 문화적 우월성을 실감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오랜 세월동안 외세의 침략이나 가난 때문에, 일반인들이 향유할 수 있는 예술과 문화가 왕성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단순한 추측이 잘못된 신념이 될 뻔했다.

    디자인사를 보면 한 나라의 보편적인 문화수준이나 일반인의 생활양식을 알 수 있다. 세계 디자인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우리문화의 현실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현대적 개념의 디자인 출발점을 18세기 중엽 1차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기술혁신의 과정으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해진 시점이기 때문이다. 

    일반인들도 예술을 향유하고 양질의 제품을 사용할 수 있는 이른바 ‘예술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공예가가 제작한 훌륭한 제품은 주로 귀족이나 종교 지배 계층이 사용했다. 이 때 기계로 대량생산된 제품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수공예 제품보다는 조악하고 공해문제 등 다양한 이유로 인간과 기계사이의 위기감이 발생할 정도였다. 사실 이 위기감에서 현대적 개념의 디자인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의 역사이다. 이러한 문제와 고민은 당시 우리나라의 역사적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일이었다. 

    현대적 디자인 개념의 태동기에 독일의 디자인 학교 바우하우스는 아주 중요한 문화사적 역할을 한다. 1919년에 설립되어 1933년 나치의 압력에 의해 바우하우스가 일단 폐쇄되면서 미국과 다른 나라로 핵심 인물들이 흩어지게 된다. 이 시기에 디자인된 건축물이나 제품을 보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기능적 모더니즘 디자인이 완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1930년대에 미국 뉴욕에서는 100층이 넘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비롯한 스카이라인의 큰 골격이 거의 다 완성되었다. 이러한 몇 가지 사례만 보더라도 1900년대 초반 일제 강점기의 어려웠던 우리나라와 앞서가던 세계와의 산업기술과 예술 문화적 차이를 실감나게 한다.  

 

아버지처럼 존경스러운 우리의 예술 문화

이렇게 혹독하게 어려운 시기에 서양미술과 미학을 국내에 알리고 고유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탐구한 학자가 고유섭이다. 한국 미학의 선구자이자 민족운동가이다.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직접 그려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소년의 몸으로 유치장에 투옥된 일화가 전해진다. 

고유섭은 서양미술사, 동양미술사, 일본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조선미술사를 중심으로 중국, 일본, 인도 등 다른 나라들과 구분되는 한국 특유의 미의 본질을 찾고자 노력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행한 우리 미술사와 미학에 관한 연구여서 더욱 의미 있다. 많이 남아 있지 않는 미술사 유적 중에서 석탑에 남아 있는 우리의 양식에 대하여 섬세하게 연구했다.

우리 문화의 본질적인 미를 구수하고 수수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했다. 한국 미술의 전반적인 특질을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성의 계획’, ‘구수한 큰 맛’으로 논했다. 구수하다는 것은 정확한 법칙을 적용하지 않고 기교적이지 않은 순박한 미를 강조한 것이다. 현대의 한국적인 미는 세계적 수준의 다양성이 존재하지만, 불과 100여 년 전의 미술과 문화의 특질을 살펴보면 작위적이지 않은 무기교의 자연적인 특질을 주장한 고유섭의 견해에 동의하게 된다.

고유섭은 우리나라를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사랑한 학자임이 분명하다. 우리 문화를 분석 연구하면서 장점은 강조하고, 단점일 수도 있는 부분에서는 특유의 잠재적 가능성을 진단한다. 당시 대부분의 일반 대중과는 달리 미학 공부를 하면서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많은 선진 문화와 예술에 대하여 충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고유섭은 다른 문화와 비교 우위를 논할 필요가 없는 우리만의 고유성을 찾아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우리나라 예술 문화의 미래에 대한 응원처럼 여겨진다. 

우리나라의 옛날이 이른바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일제강점기와 전쟁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지 못했던 시간이 길었다. 격동의 근대사가 그대로 말해 준다. 그 와중에 꺼져 버릴 것 같은 한국미의 불씨를 지키려 했던 선구자적인 미학자 고유섭을 비롯한 선각자들의 노력에 기립박수를 보낸다. 

우리가 아버지를 가장 존경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려운 환경에서 굴하지 않고 아버지 특유의 방법으로 우리를 응원하고 사랑해 준 그 특별함 때문이다. 우리의 예술문화와 한국적인 아름다움은 아버지처럼 존경스럽고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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