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열차의 특성을 통해 그림자를 비추다

산업화라는 빛 뒤에 숨어있는 그림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의 태초를 논하면 심심치 않게 열차 얘기를 들을 수 있다. 둘은 근대에 역사가 시작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뤼미에르 형제가 감독한 <열차의 도착(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1896)을 봤던 관람객이 열차가 오는 장면에 놀라 도망쳤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열차를 다룬 영화는 현대에도 볼 수 있다. 열차는 여타 교통수단과 다른 독특한 특성이 있으며, 그러한 매력에 여러 감독이 매개체로 이용하기도 한다.

 

멈추라고 울부짖어도 기차는 달린다. 철로를 따라

현대에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교통수단인 자동차는 핸들을 돌려 가고자 하는 방향을 바꿀 수 있으며, 심지어 유턴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 있다. 반면, 열차는 철로를 따라 전진한다. <박하사탕>(1999)은 이러한 특성을 잘 나타낸다. 영화는 ‘영호’가 달리는 열차 앞에 서며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총 7개 챕터로 구성된 영화는 역순행적 서사 구조를 따르며 영호가 왜 자살을 선택했는지, 과거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지를 보여준다. 

영화가 포착한 주요 시기는 1980년 5월이다. 당시 영호는 전방 보병사단 부대의 신병이었다. 그의 첫사랑인 ‘순임’은 군부대를 찾아 영호와의 면회를 요청하지만, 계엄령이 내려진 탓에 그녀는 영호를 만날 수 없었다. 때마침 부대 전체가 광주로 향하게 돼서 영호는 군용 트럭에 탑승한 채로 순임을 지켜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한밤중 광주에 도착한 직후 부대는 임무를 수행한다. 영호는 임무 수행 중 누가 쐈는지 모르는 총알을 맞고, 부대원들과 떨어지게 된다. 홀로 남은 영호는 자신을 집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여고생을 발견한다. 영호는 학생이 다른 군인에게 발견되지 않게끔 도망가도록 재촉한다. 그런데 동료 군인들이 다가오자 급박해진 영호는 조준하지 않고 총을 쏜다. 하지만 학생은 총알을 맞으며 현장에서 즉사한다. 이후 전역한 영호는 형사를 업으로 삼는다. 당시 선배 형사들은 고문도 서슴없이 행하는 과격한 방식으로 취조를 했는데, 영호는 그들에게 점차 동화되기 시작한다. 때마침 순임이 영호를 찾아오고, 둘은 식당에서 만난다. 영호는 본인의 손이 착하다는 순임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여종업원을 추행한다. 이후 폭력에 익숙해진 영호는 취조 과정에서 서슴지 않게 폭력을 행한다. 40살 중년이 된 영호는 IMF 사태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1999년 봄, 영호는 연이 있었던 단체의 야유회 장소에 느닷없이 나타난다. 자살하기 위해 영호가 철로에 올라가도 주변의 반응은 차갑다. 대다수는 그를 말리는 시늉만 한다. 이후 절규 소리가 들린다. “나 다시 돌아갈래!”

챕터가 바뀔 때마다 열차가 거꾸로 달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영화 초반 주인공이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외친 “나 다시 돌아갈래!”를 생각해보면 단순히 시간의 역행을 보여주기 위한 서사 장치만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영호의 소망이다. 기차는 철로 위에서 앞으로만 달린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의 인생은 끊임없이, 그리고 바쁘게 미래를 맞이한다. 한 번 일을 그르치면 고치고 추스를 시간이 없다. 그래서 주인공처럼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 것도 기차가 철로를 따라 움직이는 것만큼 운명적이다. 영호의 사례처럼 시대가 부조리하다면 개인의 결말은 더욱 처참하다.

영호를 싣고 달려간 기차 주변의 평화로운 풍경도 비극미를 더한다. 달리는 기차가 현세이고 주변 풍경이 이상적인 공간이라 할 때, 두 공간은 가깝지만 단절돼있다. ‘현세를 초월해 사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라는 주장에 반박할 수는 없다. 해당 주장에 대한 반박은 몇몇 사례로 무장한 귀납적 논리에 의해 힘을 잃는다. 관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귀를 물로 씻은 ‘허유’도 있으며, <나는 자연인이다>(MBN)에 나오는 몇몇 ‘자연인’으로부터 사례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 경우가 아니다. 시대라는 열차에서 태어난 탑승객은 열차를 멈출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열차 밖을 몸을 던지는 것이며, 이는 치명적인 부상을 동반한다. 순임이 영호를 찾아왔을 때마다 영호가 순임을 내친 이유가 부상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다.

 

길면 기차

기차는 길고, 앞과 뒤가 명확하다. 기차의 이러한 특징은 수직적 계층을 상징하는 매개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영화가 <설국열차>(2013) 이다. 영화는 79개국 정상들이 ‘CW-7’을 살포한다는 결의안을 발표하는 뉴스로 시작한다. 지구온난화의 대책으로 대기 온도를 낮출 수 있다는 기대 속에 살포된 냉각제 CW-7은 부작용을 낳아, 지구의 빙하기가 시작된다. 열차광이었던 ‘윌포드’가 만든 완전 자급 시스템을 갖춘 초대형 열차만이 세계를 질주한다. 기차 외부 생존자들이 윌포드의 열차에 강제적으로 차량을 결합했으며, 그들은 꼬리 칸이라 불리는 기차 가장 뒤에 거주하게 된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꼬리 칸 사람들은 열차 승객보다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간다. 기존 승객은 각종 호화로운 음식을 먹지만, 꼬리 칸 사람들은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록’ 하나가 유일한 배급품이다. 또한 동의 없는 인력 추출도 자행되는데, 부모 동의 없이 꼬리 칸에 사는 아이들을 데려간다. 이러한 처우에 불만을 느낀 꼬리 칸 리더인 ‘커티스’는 꼬리 칸 사람들과 반란을 일으키고, 과거 열차를 설계했던 크로놀 중독자 ‘남궁민수’에게 크로놀을 보수로 준다고 계약해 굳게 닫힌 문을 열며 열차를 점령해 간다. 여러 고생 끝, 가장 앞쪽 칸인 엔진 칸만 열면 되는 상황에서 민수는 엔진 칸을 열지 않겠다고 한다. 대신 열차 외부로 나가는 문을 열자고 한다. 본인이 여태까지 모아놨던 크로놀이 폭탄으로 작용해 굳게 잠긴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러 실랑이와 무력 충돌 끝에 문에 장착한 크로놀 덩어리를 폭발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폭발의 여파로 눈사태가 나며 기차는 망가진다. 생존자는 민수의 딸과 어린 사내아이, 단둘이다. 기차에서 나온 둘은 북극곰을 조우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에서 인류는 기차 안에서 삶을 영위하지만 평등하지는 않다. 머리 칸에 있는 윌포드는 여유롭게 고기를 굽지만, 꼬리 칸 사람들은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록을 먹는다. 부의 불평등 역사는 신석기 이래로 생겨났다. 이때 길이가 긴 기차는 근대화 이후 더욱 커진 부의 불평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길게 일자로 뻗은 모양새는 그 자체로 강렬해서 그 이외의 특성을 잊게 한다. 1차원적 선분만 머리에 떠오르게 되며, 고차원적 사유는 멈춘다. 윌포드는 “기차는 세계고 우리는 인류 그 자체야”라며 사고 범위를 제한한다. 열차 내 영유아 교육기관은 어린이들에게 끊임없이 인류는 열차 내부에서만 살 수 있다고 교육한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에서 봤듯 기차 외부에도 세계는 존재했다. 영화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세의 인류 갈등에 매몰되기보다는 더 열린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열차가 용산역으로 오고 있다. 빠르게 질주하던 열차는 굉음을 내며 속도를 줄인다.
▲열차가 용산역으로 오고 있다. 빠르게 질주하던 열차는 굉음을 내며 속도를 줄인다.

세월이 지나며 기술은 발전했다. 필름 상영기는 디지털 상영기로 대체됐으며, 굴뚝에서 연기를 내뿜는 증기 열차보다는 시속 300km 이상의 속도로 질주하는 고속열차가 우리에게 더 익숙하다. 이제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부상을 넘어 생존에 관한 것이다. 또한 열차는 더 길어졌고, 세분됐다. 일반열차와 고속열차뿐 아니라 고속열차 내에서도 특석과 일반석이 있다. 기술의 발전과 현대화는 위 두 영화가 보여준 산업화 속 그림자를 더 선명하게끔 한다.

SNS 기사보내기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

하단영역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