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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당신에게,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아도 벅찬 세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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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구에 위치한 홍제동 개미마을은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달동네다. 오늘 소개할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의 주인공 ‘이찬실’은 자신에게 닥친 벅찬 현실을 뒤로하고 달동네로 이사 간다. 그래서 기자도 눈앞에 쏟아지는 벅찬 과제를 쳐다보다, 그만 두 눈을 꼭 감고 택시를 타버렸다. 찌더운 여름날 카메라 하나 덜렁 들고 떠난 홍제동 개미마을과 다산 성곽, 그곳엔 찬실이가 있었다. 

 

“언니, 이런 산 공기를 쐬고도 다시 못 일어나면 언니는 사람도 아니야”

 

영화는 웅장한 음악이 깔리고 ‘감독님’이라 불리는 한 남성이 심장을 움켜쥐며 시작한다. 그는 찬실이와 매번 영화를 찍는 영화감독으로, 회식 자리에서 그만 과음으로 급사한다. 그의 죽음은 곧 찬실의 영화 인생에 대한 사형 선고와 같다. 찬실은 그의 죽음 이후 살도 빠지고 산 옆에 달동네로 거처를 옮긴다. 친절하면서도 조금은 음침한 달동네 할머니의 집에서 그녀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일도, 돈도 모두 끊겨버린 찬실은 당장에 한 푼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친한 배우 동생인 ‘소피’에게 하소연하다, 그녀의 가사도우미가 된다. 아무리 돈이 궁해도 함께 일했던 사람의 집에서 가사도우미, 즉 청소와 온갖 잡일을 시작하다니. 누군가는 자존심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찬실에겐 이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었다. 돈을 빌리기보단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만약 기자가 그녀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솔직히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고 귀가 얇은 기자는 자신 없다. 찬실이는 돈도 없고 미래가 흐려도 자신의 소신만은 명확하고 뚜렷하다. 그런 그녀의 소신은 찬실이 영화 일을 오랫동안 계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일 것이다.

▲소피의 집에서 가사도우미 일을 하고 있는 찬실/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소피의 집에서 가사도우미 일을 하고 있는 찬실/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어김없이 소피의 집을 청소하던 찬실은 단편 영화감독이자 소피의 불어 과외 선생님인 ‘김영’을 만난다. 둘은 영화를 사랑해 영화계에 발을 들였지만‚ 현재 영화·일을 하고 있지는 않다. 좋아해서 시작했고, 막상 그 일을 할 수 있게 돼도, 여러 시련과 고난에 맞서고 버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김영은 그만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고, 찬실이도 그녀만의 사정이 있었다. 찬실은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영에게 위로받고 싶었던 것 같다. 일만 하고 살아서 10년 동안 남자 한번 못 안아본 그녀는 꿈에서라도 그에게 위로받는다. 소피의 집에서 나와 김영과 꿈에서 걸었던 다산 성곽, 기자는 그곳에서 찬실의 외로움과 걸었다. 일만 하고 사는 것.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일을 자의가 아닌, 외부적 요인 때문에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꿈에서 영과 찬실이 걸었던 다산 성곽
▲꿈에서 영과 찬실이 걸었던 다산 성곽

 

찬실: 그러면 저 한 번만 꼭 안아줄 수 있어요? 근데 이름이 뭐라 그랬죠?

김영: 영이요, 김영.

찬실: 영이 씨. 나 10년 만에 남자 처음 안아봐요. 더 세게 안아주세요. 더 꼭.

 

찬실이는 영화 프로듀서(PD)로 전체적인 스케줄 관리, 돈 관리, 출연자 관리까지 영화의 잡다한 일을 도맡아했다. 그러나 찬실이와 함께 일했던 영화 제작사 대표도, 주인집 할머니도 그녀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 찬실에겐 자신의 직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처음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과, 사회적 시선을 견뎌왔을까? 한편, 아버지가 보내온 편지는 사투리 억양 때문인지, 아버지란 존재만으로 그러한 건지, 차가운 세상과는 대비된 따뜻함이 느껴진다. 좋아했던 사람과 좋아했던 일, 두 가지를 하루아침에 떠나보낸 딸에게 아버지는 빨리 떨쳐버리고 일어나라 전한다. 그리고 그 편지를 읽은 곳에서 장국영이 처음 등장한다.

홍콩영화를 좋아했던 찬실이 가장 좋아했던 배우는 ‘장국영’(張國榮, 1956~2003)이다. 어느 날 찬실에겐 영화 <아비정전>(1990)에 나오는 장국영의 모습과 흡사한, 그러나 얼굴만은 매우 다른, 한 남자가 보인다. 자신의 이름을 ‘장국영’이라 소개하며 추운 겨울날 민소매만 입고 있다. 그런데 그는 찬실의 속마음을 읽는 것 같다. 영에 대한 찬실의 마음도, 미래에 대한 그녀의 생각도 모두 알고 있다. 그는 정말 귀신일까 혹은 찬실, 자기 자신일까. 둘 중 뭐든 간에 그는 찬실에게 용기를, 또 나아갈 길을 알려준다. 

 

찬실: 제가 다시 영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장국영: 지금 그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찬실: 그럼 뭐가 문제에요?

장국영: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게 문제죠.

(중략)

찬실: 진짜 나 자신에 대해서 깊이깊이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요.

 

장국영에게 자신과 영이 어떻게 되느냐 물었을 때 “잘 지낸다”라는 답을 얻은 찬실은 기대에 가득 차 영이 일하는 곳에 도시락을 싸가고, 길을 걷다 그에게 백허그를 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기대에 무색하게도 그저 좋은 누나로 생각한다는 것. 버스에서 빈 도시락통을 껴안고 울먹이는 찬실이는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드는 동시에 우리의 모습과 겹친다. 적어도 찬실이는 솔직했다. 살면서 많은 오해와 거짓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오직 나만의 오해란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눈물도 흘릴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기자는 솔직한 찬실이 조금은 부러웠다. 

날이 추워 시들었던 꽃을 실내에 들여놓으면 꽃은 다시 고개를 들고 언제 그랬냐는 듯 싱싱하게 새싹을 틔운다. 찬실의 주인집 할머니는 주민센터에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다. 시쓰기 숙제는 단어를 쓸 때도 맞춤법을 틀리는 그녀에게 꽤나 까다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녀가 겨우 써낸 한 줄은 찬실의, 또 기자의 심장을 울리기 충분했다.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갑작스러운 감독의 죽음, 할머니의 죽은 딸, 그리고 하필이면 만우절 날 죽은 장국영. 죽은 줄만 알았던 꽃은 다시 물과 관심을 주면 되살아날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은 장국영이 돌아왔듯, 사람도 돌아올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죽음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끌어안고 간다. 그것이 찬실의 돈이었든, 행복이었든 당시엔 그의 죽음과 함께 모두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고지고 사는 것보다 어쩔 땐 버려야 채워지는 것이 있다. 다시 싹을 틔운 꽃은 그전에 시들었던 꽃과 같은 꽃일까, 다른 꽃일까? 처음과 비슷해 보여도 그 속은 다를 수 있다. 찬실은 어쩌면 자신의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너무 바쁘게 살아간 게 아닐까. 타의로 브레이크가 걸린 그녀는 이제 진짜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알아갈 시간을 얻었다. 행복이라 믿었던 미련을 떨쳐버리니 장국영은 사라졌고 찬실의 입가엔 미소가 생겼다. 처음에 기자는 이 영화의 제목이 반어법을 따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번 영화를 보니, 찬실은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녀는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그만큼 강하고 소신있고, 복이 많은 것이다. 

▲홍제동 개미마을의 경치와 찬실이 걸었던 거리
▲홍제동 개미마을의 경치와 찬실이 걸었던 거리

찬실: 내가 좋아하는 일만은 나를 꽉 채워줄 거라 생각했어요. 근데 잘못 생각했어요. 채워도, 채워도 그런 걸로는 갈증이 가시지가 않더라고요.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에요. 저요,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

 

▲달동네에서 지냈던 찬실의 집
▲달동네에서 지냈던 찬실의 집

달동네에 도착한 기자는 길을 잃었었다. 어디가 찬실의 집인지 찾느라 홍제동 개미마을 도입부터 높은 언덕 위 안쪽까지 걸어야 했다. 하지만 땀을 흘리며 올라갔던 언덕에선 별다른 소득을 얻을 수 없었고 언덕을 천천히 내려오다 비로소 그녀의 집을 발견했다. 익숙한 지붕색과 ㄱ자 모양으로 꺾여져 내려오는 담벼락은 기자를 확신케 했다. 정확한 목적과 대상이 있어도 찾기 어려운 것이 있다. 하물며 그것이 명확하지도 않다면 어떻겠는가. 그래서 기자는 꿈을 꾸고이를 찾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찬실에게 전하고 싶다. 

“우리가 믿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를 찾아 살아 보되, 원래 이게 제일 어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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