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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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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인 5월에는 감사함을 표현할 일이 많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성년의 날은 물론이고 스승의 날과 같은 많은 기념일마다 사람들은 감사함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정성스럽게 표현한다. 아마 많은 이들이 문자나 SNS을 통해 휴대폰 기기 화면에 감사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전할 것이다. 문자나 SNS를 통해 소통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지만, 감사함을 표현할 때에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아무리 진정성 있는 감정을 드러내고 싶다 하더라도, 그것이 글로 제대로 표현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실제로는 별다른 감흥이 없음에도 수려한 문장을 손쉽게 써내는 이들도 있다. 이처럼 사람이 가진 자신만의 언어는 다른 것이라서, 그 언어에 진정한 마음이 깃들기도 하고, 본심을 감추는 가면이 되기도 한다.
기자는 얼마 전 스승의 날에 은사님들에게 감사함을 담은 문자를 보냈다.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가르침과, 미숙했던 행동들을 바로잡아주셨던 경험들을 회상하며 이루 표현하지 못할 감정을 느꼈다. 부끄럽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한 그 감정이 서툰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을까 하는 막막한 기분도 들었다. 전하고 싶은 말과, 그것이 의도한 대로 전달되는 데 도움을 줄 단어와 표현들을 고르면서 거듭 숙고했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너무 가식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너무 친근감 있는 표현이라 버릇없어 보이지 않을까...’ 다듬고 다듬어 비로소 진심에 가까운 말이 되었을 때 전송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대학 입시에 낙방해 재수를 하는 친구에게 안부를 묻는 문자를 보낼 때에도, 상대의 입장에서 기분에 거슬리지 않게 진심을 전달하는 법을 고민했다. 평소 느꼈던 친구에 대한 진솔한 감정들이 최대한 왜곡되지 않게 전달될 수 있는 언어를 모색했다. 작은 표현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이렇듯 진심이 담긴 언어라면 조금 미숙하더라도 마음은 전달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기자 본연의 순수한 언어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 날 친구들과 문자를 하던 중 불현듯 생겼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 대부분은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밈(Meme)들이었고, 솔직하게 말하기보다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어투를 세게 하고 강한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밈을 제외하면 원활한 대화가 오고 가기 힘들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고, 스스로 표현에 신중하게 되었다. 이후로 말을 할 때보다도 훨씬 문자를 사용할 때, 언어를 신중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스크린 속의 네모 상자에 생각을 차곡차곡 담아 진심을 사려 깊게, 섬세하게 표현하려도 노력했다. 이렇게 진심을 다해 표현한 언어는 상대로부터 좋은 반응을 불러왔다.
그런데 문득 기자는 기자의 언어가 과연 순수한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온전히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유년시절에는 책을 많이 읽었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여러 핑계를 대며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의 언어’는 어디서 온 것일까? 스스로가 선택하는 언어, 전달하고 싶은 느낌 따위가 순전히 유년시절에 습득한 어휘, 표현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읽는 것을 넘어, 대화하고, 경험을 하는 것에서도 언어가 비롯된다고 느꼈다. 무언가를 읽지 않더라도 불현듯 노트에 적고 싶은 말들이 넘칠 때가 있다. 순수한 언어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행하더라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언어도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생각을 최대한 느낀 대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다수의 표현에 매몰돼 자신만이 가진 보석 같은 생각들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그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까지 나아가야지 생각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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