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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오후 4시』(2015)에 담긴 ‘청운효자동’을 찾아가다

마음의 목소리에 대답하는 화가가 사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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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 언론사의 신문기자로 일하다 미국으로 훌쩍 떠나 7년간 뉴욕 브루클린(Brooklyn)의 한국문화센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갑자기 고국으로 돌아와 ‘아름다운재단’에서 사무총장까지 맡았다가 돌연 전업 화가로 직업을 바꾼다. 이 비범한 삶의 이야기는 쉰 살을 훌쩍 넘긴 화가 김미경의 인생사이다. 『서촌 오후 4시』는 그녀의 전작 『브루클린 오후 2시』(2010)에 이은 수필이다. 『서촌 오후 4시』에서는 글쓴이의 ‘옥상화가’로서의 삶에 대한 잔잔한 이야기가 그녀의 그림과 함께 펼쳐진다.


  지금은 재개발로 사라졌지만 최근까지 기자가 살았던 마을은 서울 시내에 위치한 동네로 낮은 언덕 위에 주택과 벽돌로 쌓아올린 붉은 빌라가 한 가득 있는 조용한 곳이었다. 지금은 모두 아파트 단지와 재개발을 위한 공사장으로 바뀌었지만 기억 속에는 선명히 남아있다. 다들 ‘서울’이라고 하면 반짝이는 유리로 뒤덮인 초고층 빌딩과 네모반듯한 아파트만 가득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서울 시내에는 기자가 살았던 그 동네와 비슷한 곳이 더 많다. 또 그런 곳을 지날 때면 10년 넘게 살았던 그 집이 떠오르기도 한다. 기자의 추억을 되살리는 나지막하고 여유로운 그 동네, ‘서촌과 북촌’이라 불리는 ‘청운효자동’에서 글쓴이의 삶을 상상해봤다.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진짜 필요한 것은 딱 두 가지다.
  첫째, 직장 일 말고 하루 종일 하고 싶은 일이 생길 것.
  둘째, 가난하게 살 결심을 할 것.

  시끌벅적한 광화문 거리를 지나 들어간 서촌은 조용하고 나지막했다. 마치 다른 곳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또한,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동네였다. 청와대와 경복궁 옆에 붙어있어 개발이 제한된 이곳은 서울의 굴곡진 역사가 담겨 있는 동네였다. 뉴욕에서 돌아온 뒤, 이곳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던 그녀는 갑작스럽게 직장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겠다고 결심한다. 작가는 ‘모종의 이유로 붓을 꺾은 미술학도’도 아니고 ‘열정 하나로 버틸 수 있는 패기 넘치는 젊은이’도 아니며 ‘불우하게도 명예퇴직을 권고 받은 상황’도 아니다. 서강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해 한 유명 재단의 사무총장까지 맡은 나이 오십의 그녀가 갑작스럽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 안정적인 삶을 뒤로한 것이다. 그러자 주변은 온통 ‘너 괜찮아?’라며 그녀에게 질문한다. 사무총장이라는 명예와 안정적인 수입을 포기하고 근처 베이커리에서 빵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를 측은하게 혹은 경악스럽게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글쓴이는 자신의 생각으로 본인의 삶을 선택했기에 오히려 당당하게 살아간다. 그녀가 자랑스럽게 팔았을지도 모를 달달한 크림빵을 하나 입에 문 채 조금 더 동네를 돌아보기로 했다.

  나는 옥상화가다. 아니 옥상화가로 불린다. 옥상에서 그림 그리는 화가로 알려지면서 “왜 그림을 옥상에서 그리세요?”하고 묻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글쎄 왜일까? 무슨 심오한 뜻이 있을까? ‘옥상에서 보는 풍경이 너무너무 좋아서’가 그 첫 번째 대답일 듯싶다.

  어느덧 이야기는 그녀가 화가로 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의 화실인 옥상은 서촌 인근의 보안시설인 청와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장소로 그림을 그릴 때마다 경찰이나 인근 주민과 옥신각신하였다고 한다. 살짝 사진만 찍어서 집에 가서 따라 그려도 되지 않을까 했지만, 기자 시절부터 ‘현장파’였다는 그녀는 꼭 그 장소에 도착해서 그림을 그렸다고 말한다. 그렇게 작가는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아름다운 고궁뿐만 아니라 사람이 가득한 길거리, 무너져 가는 철거촌도 빠짐없이 그녀의 화폭에 담겼다. 미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늦가을의 감과 줄에 널려 하늘하늘 말라가는 빨랫감까지 장소에 담긴 이야기가 고스란히 그녀의 그림에 담겼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만리동고개의 ‘성우이발소’를 그린 이야기도 그녀의 이야기에 담겨 있다. 이는 모두 그림을 그리는 걸 전업으로 삼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서촌을 잠시 뒤로 하고 조금 떨어진 만리동고개에 도착해 성우이발소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이곳을 거쳐 갔을지 저절로 재미있는 상상을 하게 되는 가게였다.

“요즘 제일 자주 만나는 친구가 누구예요?”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곧바로 “인왕산!”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눈 마주치며, 가슴 비비며 사는 친구. 인왕산.

  글쓴이는 옥상에 올라서면 인왕산이 훤히 보이는 서촌에 살고 있다. 만리동고개에서 서촌으로 돌아오자 저기 너머 인왕산이 보였다. 마치 반짝이는 서울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하늘에 사는 신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이야기 속에서 친구 ‘인왕산’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며, 그동안 삶에서 함께한 사람을 되짚어 본다. 이전에 함께 신문사에서 근무했던 동료, 그림을 알려준 선생님, 무엇이든 뚝딱 잘 만들었던 어머니, 그리고 대학에 진학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딸까지. 그림을 그리며 친해진 동네 친구들도 있다. 작가를 따라 기자도 내 주변의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며 서촌을 걸어보았다. 얼마가지 않아 석양이 지며 주변이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서촌에는 밤의 어둠을 물리치고자 주황색 가로등이 골목길마다 반짝였다.

“아무도 모르지, 나도 사실 잘 몰라. 내 욕망이 휘발유 냄새 때문인지, 유전(油田) 때문인지. 그걸 알아내기 위해 내가 쓰는 방법은……, 지금 내 시간과 돈을 어디에 쓰고 있는가를 분석하는 거야. 시간과 돈을 쓰는데 아깝지 않고 즐거운 일. 그게 바로 휘발유 냄새 때문이 아니라 유전 때문에 하는 일이더라고. 그리고 그냥 10년쯤 견뎌내는 거야. 휘발유 냄새는 1-2년이면 다 날아가거든.” / “흠흠…….” 

  이윽고 어둠이 동네에 완전히 내려앉았다. 책을 덮은 뒤, 여행을 마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라고 고민해본다. 자신의 선택을 얼마 안 가 후회하는 이들을 자주 만났기에 이 고민은 한동안 기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대학에 온 것을 후회하는 동기도 봤고, 반대로 대학을 가지 않고 바로 직장을 잡은 걸 후회하는 동창도 보았다. 모두들 자신이 선택한 길이 정말로 옳았는지 망설이고 있었다. 또 어떤 이는 지인이나 부모님, 아니면 뉴스와 같은 다른 사람의 딴지에 ‘내가 할 수 있을까?’라며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런 모두에게 이 책의 한 구절을 읊어주고 싶다. ― ‘끝까지, 좀 쉬다 또 끝까지 그리다 보면 어설퍼도 또 하나의 그림이 된다. 정말 세상에 망친 그림은 없다.’ 우리 모두 자신에게 품었던 과한 의심을 덜어내 보고,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을 타인의 딴지는 가볍게 무시해보자. 혹시 아는가, 지금 선택한 길의 끝엔 정말로 ‘유전’이 콸콸 흐르고 있을지 말이다.

정재림 기자 bigheadjerry96@mail.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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