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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그리고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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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4월, 필자가 육군훈련소에서 훈련병으로 있을 당시의 일이었다. 하루의 고된 훈련을 마치고 저녁식사 전 생활관에서 쉬고 있을 때 분대장이 들어왔다. 그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무기력한 눈망울을 하고 우리들에게 안산 지역 출신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렇게 처음 접한 세월호의 소식은 가슴 한 곳을 후벼 파는 듯 아팠고 그 후부터 가슴 한 켠에는 무거운 돌덩이가 얹혀있는 듯 필자를 내리눌렀다. 오랜 시간이 흘러 지난 3월 21일(화)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특별법이 시행됐다. 이어 3월 23일(목), 세월호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고비를 거쳐 세월호는 목포로 이동하였으며, 31일(금) 목포항에 도착하며 우리의 곁에 돌아왔다. 정확히 1080일 만에 고개를 내민 세월호. 우리는 1080일간 무엇을 했었나.
  안타깝게도 세월호는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세월호 사고가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4지방선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선거 앞에서 세월호 침몰이란 거대한 사고는 어느새 하나의 정치적 프레임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야당이었던 새정치연합은 세월호 참사 추모 물결에 기대어 ‘정부심판론’을 내세웠다. 박근혜 정부의 무능함이 세월호 사건을 통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세월호 참사가 왜 벌어졌는가’보다는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누가 지는가’에 가까웠다. 특히 당시 야당에서 내세웠던 것은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이었다. 대형 사고가 발생한 뒤 대통령이 7시간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야권의 초점이 대통령 비판으로 이어지자 일각에서는 세월호 가족,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는 시민들을 ‘반정부 세력’ 혹은 ‘종북세력’ 등으로 매도했다. 세월호 참사의 초점이 사고 원인 파악과 재발방지보다 책임론에 맞춰진 것이다. 이후 펼쳐진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승리를 거두자 여당은 국회 밖의 세력들이 만들어놓은 이념구도를 활용하면서 정부를 감쌌다.
  이후 만들어진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는 또 다른 정쟁의 도구가 되었다. 세월호 침몰 사고의 진상을 규명하고 안전한 사회 건설과 관련된 제도를 개선하며 피해자 지원 대책을 점검하기 위해 설치된 특조위는 시작부터 여야 사이에서 삐걱거렸다. 야당의 요구와는 반대로 정부와 여당에서 특조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뺀 조사권만 부여하자고 주장하여 특조위에는 조사권만 부여되었다. 또한 예산과 인력의 문제를 두고 이를 세금 도둑으로 몰아세우는 행위도 등장했다. 특히 조선일보에서는 사설을 통해 특조위의 예산이 과하게 부풀려졌다며 공세를 펼쳤다. 이후 위와 관련된 사실이 오보로 밝혀졌지만 이 사건을 통해 일부 사람들은 세월호 특조위와 유가족들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비단 정치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갑론을박을 벌였다. 초기 세월호 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뜻을 하나로 모아 그들을 위로했다. 사람들은 세월호 사건에 함께 분노했고, 정부의 미진한 대응을 비판하며 유가족들의 편에 섰다. 하지만 세월호 특별법 제정과 관련, 유가족이 국가에 권리를 주장하면서 그들의 편에 섰던 사람들은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유가족에게 지원되는 지원금에 대한 논쟁을 거듭했고 이와 더불어 2014년 9월에 있었던 ‘대리기사 폭행 사건’도 여론이 냉소적으로 변하게 된 데에 일조했다. 이 외에도 극단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유가족들을 종북몰이의 대상으로 몰기도 하였다.
  세월호가 올라오기까지, 우리는 그 과정에서 유가족들에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었다. 비단 극단주의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 속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의 상처는 정치적 프레임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또한 일부는 세월호 사고를 남의 일인 양 여기는 등 무감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유 없는 죽음과 그 죽음을 앞에서 바라보아야만 했던 유가족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본질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 외의 것에 초점을 맞추었던 지난 행위들은 어쩌면 세월호 희생자들을 두 번 죽이게 한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304명의 목숨을 삼키고 바다 속에 있었던 세월호는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유가족의 마음을 달래고, 이후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사고의 원인과 책임규명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전에 세월호를 마주하는 우리의 자세에서 이전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원인과 책임규명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세월호 이후를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편집국장 양승조 hiujimi@mail.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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