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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건축의 이해

핸드폰과 도시사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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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시대

  우리는 디자인 시대에 살고 있다. 작게는 핸드폰디자인으로 시작해서 가구 디자인, 좀 더 큰 크기의 자동차 디자인, 건축디자인 그리고 가장 큰 스케일의 도시디자인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다양하고 많은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현대사회는 그야말로 디자인으로 넘쳐난다. 1990년대에 대우전자가 디자인에 혁신을 가져오겠다고 시작한 이후부터 우리는 디자인후발주자로서 항상 선진국의 디자인을 배우려고 노력해왔다. 최근 들어서는 애플사가 미니멀한 디자인 아이폰으로 휴대폰시장을 한번 뒤흔든 후에 사람들이 더욱 디자인의 위력을 절감하는 것 같다. 사실 망해가던 애플이 부활한 것은 스티브 잡스가 사장으로 컴백한 후에 선보인 아이맥이라는 혁신적인 디자인의 컴퓨터 덕분이다. 이로써 훌륭한 디자인은 돈과 직결되어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오세훈 서울 시장 시절 서울은 전 세계 디자인 수도로 지정된 바 있다. 최근 들어서 사람들이 디자인 디자인 하는 것은 디자인은 돈이고 경제라는 생각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디자이너라고 말하고 다닌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디자인의 의미가 확대되어서 모든 창조적인 행위를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알고 보면 우리는 선사시대부터 디자인을 했다. 독자들은 중학교 국사책에 나오는 빗살무늬토기를 기억할 것이다. 빗살무늬토기는 훌륭한 디자인작품이다. 빗살모양의 무늬도 디자인 이지만 포물선 형태를 띤 토기의 모양은 더 훌륭한 디자인이다. 당시에는 구릉지에 살면서 열매를 따고 물고기를 잡으면서 사는 채렵 중심의 사회였다. 여분의 곡식이나 음식 남았을 때 그것을 빗살무늬토기에 담에 흙으로 된 땅에 푹 박아 넣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포물선 모양의 토기는 아래쪽 표면적이 넓기 때문에 약한 불에도 불이 접하는 면적이 넓어서 쉽게 물을 끓이거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역포물선 모양의 토기가 디자인 된 것이다. 당시에 만들어진 화살촉, 바늘 등도 모두가 다 그 기능을 위해서 그 시대 사람들이 최대한 머리를 짜내서 만들어낸 디자인 제품들이다. 생존을 위한 창조가 곧 디자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배들이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고 말한 것이다.

디자인의 원칙

 물리학에서 뉴턴의 역학은 우주 끝에서도 똑 같이 적용된다. 지구에 적용되는 중력의 법칙은 100만 광년 떨어진 다른 은하계에서도 적용 가능한 원칙이다. 아폴로우주선이 달에 갈 때에도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다 해결이 되었다. 그 만큼 대단한 원리이다. 하지만 이러한 물리학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세계가 있다. 그것은 미시세계이다. 아주 작은 세계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도, 뉴턴의 법칙도 적용되지 않는다. 미시세계에서는 양자역학이 적용된다. 물론 물리학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두 세계에서 동시에 적용될 “궁극의 법칙”을 찾기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새로운 이론이 완성되고 증명되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두 개의 세계에 다른 원칙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거시세계인 우주와 미시세계인 양자의 세계에서는 왜 이렇게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가? 두 세계의 차이가 무엇인가? 답은 단순하다. 크기의 차이이다. 스케일의 차이인 것이다. 물리학과 마찬가지로 디자인에서도 스케일이 다르면 디자인에 적용되어야 하는 법칙도 달라진다. 디자인에서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를 나누는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은 사람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사람의 몸 크기가 기준이다. “사람보다 큰 디자인이냐? 사람보다 작은 디자인이냐?”가 관건이다.

  필자는 최근에 세계적인 미술가 아니쉬 카푸어의 전시회를 보았다. 거기에는 오목한 은색 반사체 표면에 보는 사람을 비추는 작품이 있었다. 쉽게 말해서 그냥 알루미늄 숟가락 같은 작품이었다. 어려서 한번이라도 숟가락에 얼굴을 비추어 보면서 놀아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똑같은 원리로 아니쉬 카푸어는 예술작품을 만들었다. 일상의 흔한 원리가 스케일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숟가락일수도 있고 유명한 조각품이 되기도 한다. 스케일은 이렇게 중요하다.

  세상의 디자인은 둘로 나뉜다. 그 기준은 사람이다. 모든 디자인은 디자인하는 대상이 “사람보다 크냐? 아니면 “사람보다 작냐?”로 나누어질 수 있다. 흔히 건축을 디자인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여타 디자인 분야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다. 그래서 자동차를 잘 디자인 하는 사람이 건축 디자인도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모든 디자인은 사람의 몸 크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내 손안에서 가지고 노는 핸드폰을 디자인하는 방식과 여러 명이 들어가서 다양한 행위를 해야 하는 사람보다 훨씬 큰 건축물을 디자인하는 방식은 달라야 한다. 게다가 핸드폰은 수년만 지나면 새로운 기술에 의해서 버려지는 수명이 짧은 디자인인 반면, 건축은 보통 사람보다도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시간에 의해서도 다르게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에 건축을 디자인 할 때는 더 다방면으로 깊게 생각해서 결정해야한다.

오브제 vs 환경

  나보다 작은 것은 오브제이다. 오브제는 모양이 중요하다. 반면 나보다 큰 것은 우리의 몸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겉모양이외에도 내부에서의 보이드 공간의 체험이 중요하다. 이는 마치 사건을 1인칭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냐, 아니면 먼발치에 서서 3인칭 관점으로 보는 것이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손안의 핸드폰은 3인칭 관점인 위에서 내려다보게 되지만, 건축물 안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안에서 바깥쪽을 보게 되는 1인칭 관점이 되는 것이다. 내 몸보다 큰 건축은 오브제라기보다는 환경으로 이해되어야한다.

  이러한 명백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축가들 중에서도 제품 디자인하듯이 건축물을 디자인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말로 건물의 외관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축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새들이나 볼 수 있는 조감도적인 시각에서 디자인을 하는 건축가들은 더 문제다. 비근한 예로 “자하 하디드”가 디자인한 ‘동대문 플라자’가 대표적인 예이다. 실제로 내부 공간적으로 어떠한 체험을 하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고 외부에서 바라보이는 곡선의 형태에만 지나치게 집착한 건축디자인이다. 물론 외관만으로도 감동적인 좋은 작품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건축은 기본적으로 밖에서도 바라보기만 하는 조각품과는 달리 안으로 들어가서 밖을 바라보는 환경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핸드폰이나 옷을 디자인하는 식으로 건축을 디자인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안에 들어가서 사용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품이나 그래픽 디자인적 관점에서 건축을 접근했을 때 건축은 인간의 삶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실수를 범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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