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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37주년을 맞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흔적을 따라가다

여느 다를 것 없던 5월 그날의 아픔을 담은 『소년이 온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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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대통령직을 파면당했다. 이로부터 30년 전인 1987년에는 박종철 학생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경찰의 발표는 민중의 분노를 샀고, 반(反)독재를 외치며 거리에 나온 민중의 요구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며 민주화를 이룩했다. 다시 그로부터 7년 전인 1980년, 군사 정변을 통해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독재에 맞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외쳤던 곳이 있다. 바로 광주이다. 그곳에서의 외침은 오랫동안 침묵 당해 왔지만, 진실을 아는 이들에게 잊히지 않고 전달되며 기록되어왔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의 광주를 기록한 문학 작품이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지금의 우리와 같이 내일을 꿈꾸며 하루를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공부보다 돈을 벌고 싶어하는 정대. 누나 때문에 할 수 없이 인문계고 입시 준비를 하는 정대. 누나 몰래 신문 수금 일을 하는 정대. 초겨울부터 볼이 빨갛게 트고 손등에 흉한 사마귀가 돋는 정대. 너와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칠 때, 제가 무슨 국가 대표라고 스매싱만 하는 정대.

 

그러나 그날 이후 작품 속 인물 동호, 정대, 정미는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죽게 됐으며, 동호의 가족과 성희, 선주는 씻을수 없는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간다. 기자는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5·18 민주 묘지로 가기로 했다. 소설 속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를 떠올려보면,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자행한 학살이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묘지에 도착하자 5·18 민중항쟁 추모탑 뒤로 수백 개의 묘지가 보였다. 희생당한 등장인물과 비슷한 또래의 묘비를 보자, 그날 일어나서는 안 됐을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기자는 희생당한 이들의 묘에 묵념하며 그들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5·18 민주항쟁 추모탑
▲5·18 민주항쟁 추모탑

  『소년이 온다』는 2인칭 ‘너’로 표현되는 동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너’는 그날 죽어간 시민들의 시신을 천으로 덮고, 그들이 누구인지 식별할 수 있게 기록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의 어린 너였지만 ‘너’는 그날의 아픔을 알았고, 그에 분노해 했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중략)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5·18 민주묘지
▲5·18 민주묘지

 

민주 묘지에 있던 태극기도 바람에 휘날리며 펄럭거렸다. 죽은 이들을 감싼 태극기와 민주 묘지서 펄럭이던 태극기는 과연 누구를 위한 태극기였을까. 기자는 아픈 마음을 추스르며 민주묘지를 떠나, ‘너’가 그날 동안 사망한 시민군을 지키고 있었던 도청으로 갔다. 당시 도청은 계엄군의 총탄에 맞서 시민군들이 싸우던 최후의 보루였다. 현재 도청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있었다. 도청 안에 들어가 당시 남아있던 모습을 보려 했지만,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내부는 구경할 수 없었다. 이후 기자는 당시 전두환의 독재 정치에 항거하여 수많은 시민이 시위를 위해 나온 광장을 마주했다. 기자가 찾아간 날에는 광장이 텅 비어있었지만, 그날 광주 시민들로 가득찬 광장의 모습을 상상하며, 광장 한 바퀴를 돌아보았다. 한편, ‘너’는 도청에 남아 계엄군의 총에 맞고 죽어간 사람들과 유족의 슬픈 모습을 지켜봤다. ‘너’는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도 끝까지 도청에 남아있겠다고 했다. 무엇 때문에 ‘너’는 도청에 남아있겠다고 한 것일까. 결국, ‘너’는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음을 당하고, 혼이 되어 계엄군에게 버려진 죽은 ‘너’와 수많은 사람의 시체를 보게 된다.

▲광주 도청
▲광주 도청

우리들의 몸은 열십자로 겹겹이 포개져 있었어. 내 배 위에 모르는 아저씨의 몸이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였고, 아저씨의 배 위에 모르는 형의 몸이 다시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였어 (···중략) 이상하게도 나는 혼자였어. 그러니까 혼들은 만날 수 없는 거였어. 지척에 혼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린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 저세상에서 만나자는 말 따윈 의미없는 거였어.

 

그날 이후 살아남은 인물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고통 받으며, 사과나 보상을 받기는커녕 국가에 제지를 당하기도 한다. 실제 피해를 당한 광주시민은 국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국가와 국민이 전도된 상황에서 그들의 상실감은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죽은 ‘너’를 그리워하는 ‘너’의 어머니는 그날 저녁 ‘너’를 집에 들어오라고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또, 그자가 광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구호를 외치려 하지만, 오히려 경찰관에게 저지당하며 경찰서에 잡혀 들어간다. 그렇게 ‘너’를 잃고 삼십 년을 살아간 ‘너’의 어머니는 그날 이후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해왔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너’의 어머니에게 있어 ‘너’는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렇게 ‘너’의 어머니는 ‘너’를 기억한다.  

▲5·18 민주광장
▲5·18 민주광장

네가 여섯 살, 일곱 살 묵었을 적에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느이 아부지가 있는 가게까지 날마다 천변길로 걸어갔제.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 끌었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기자는 한참 광장에서 시간을 보낸 후, 그날의 상황을 더욱 자세히 알고자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을 찾아갔다. 5·18 민주화운동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방대한 기록유산을 갖고 있었다. 수많은 광주 시민의 아픔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남겨진 기록관에는 당시 광주 민주화운동을 알리기 위한 신문 기사나 사진들이 주를 이뤘다. 기록관에서의 관람을 모두 마친 후, 기자는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는 대선 개표결과가 방송되고 있었다. 방송을 보며, 기자는 오늘날 국민이 외쳐온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지난 37년 전,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시작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1980년 5월 18일은 아픔의 역사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픔을 밑거름 삼아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꽃이 핀 더 밝은 곳으로 가기 위한 광주시민들의 노력이자 염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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