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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사람들’과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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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라는 영화가 있다.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분리주의가 극성이던 시기에 NASA(미국항공우주국)의 우주탐사 과정에서 벌어지는 인종과 젠더 차별이 주제이다. 미지의 우주 탐색에 나설 정도로 최첨단의 기술을 갖추고 있는 과학적 현실이지만, 흑인 여성 전산원들의 사회적 현실은 열악하다. 개인적 유능성에도 불구하고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일상적인 분리와 차별에 시달리며 ‘숨겨진’ 역할을 강요당해야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세 흑인 여성이 차별에 도전하면서 깨는 금기는 우주비행이라는 거대한 실험보다 더 극적인 성취를 보여준다. 지구 밖으로 인간을 보내는 인류적 쾌거와 비교할 때 영화 속 흑인 여성들이 NASA안에서 자기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는 상황은 더디고 고통스럽다. 과학적 현실과 사회적 현실간의 ‘지체’ 현상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주 탐험이라는 인류 차원의 거대 과제보다도 일상의 금기들을 깨는 후자의 변화가 더 빛나 보이기조차 한다. 

  영화의 장면들은 최근 몇 달간 우리가 겪은 정치적 변화를 떠오르게 한다. 소위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인류 공통의 미래에 대응해야 하는 우리 앞에 놓인 사회적 현실은 과학적 현실보다 진보되지도 않았고 단순하지도 않다. 이례적인 장미대선이 끝났다. 지금은 1987년 이후 30년 간 이어진 민주주의의 실험이 새로운 고비를 맞이하는 시점이다. 대선 기간동안 ‘통합’이라는 구호가 내내 시선을 끌었지만, 서로의 다름을 이어낼 상위의 공통 가치들에 접근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통합은 갈등의 단순한 봉합이 아니다. 용광로(melting pot)처럼 모두의 정체성을 함몰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타협과 협상이라는 명분으로 권력을 나누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통합은 공동체가 공통으로 지향해야 할 더 높은 가치를 중심으로 서로의 다름에 대한 인정과 화해에 기초한 것이어야 하고, 공통의 가치와 이익이 만나는 지점에 대한 적극적 공동 탐색에 기초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한, 모두가 기여해야 할 몫들이 있고 모두가 사회관계 안에서 향유해야 할 몫들이 있기 때문이다.

  <히든 피겨스>는 숨겨진 숫자들과 숨겨진 사람들이라는 중의적 의미가 있다. 영화에서 히든 피겨스는 우주비행이라는 큰 도전을 가능하게 하는 모종의 수식과 관련되기도 하고, 우주궤도비행의 해법을 위해 함께 몰두하면서도 인종차별로 인해 그 공로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주인공 흑인 여성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으면서 역사나 사회의 발전을 안에서 받쳐내는 진짜 인물들이 있다.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회 속 숨은 코드는 사회를 ‘안받침’ 하는 무수한 숨은 인물들의 노력 속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의 거대한 성과들은 결국 구성원 모두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차이는 사소화하고 더 높은 가치 안에서 ‘통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영화의 현실에서 나타나듯이 개인의 존엄과 주권은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공동체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숨겨져 있지만 ‘알짜’인 구성원 전체의 존엄과 기여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높은 가치 안에서 각 개인의 존엄이 실현될 수 있도록 정의의 감각을 예민하게 갖추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차이를 단순하게 봉합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미래사회’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한 큰 그림을 공동체적 가치 속에서 소통적으로 그려나가야 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 등으로 상징되는 미래사회는 과학이 제공하는 도구적 가치들로 표상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미래사회도 결국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라는 것이 간과되기도 한다. 사회적 현실은 과학적 현실에 비해 그 변화의 속도와 질이 뒤처진다. 인류의 무한한 도전이라는 과학적 현실과 불균등한 사회적 현실 간의 지체와 간극이 지속되는 한 미래의 성과를 낙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공동체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은, 탐구에 의해 밝혀져야 할 숨겨진 숫자들(과학)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결국 사람(사회)에게 있기 때문이다. 새롭게 열린 민주주의 안에서, ‘숨겨진 사람들’의 존엄과 기여가 충실히 인정되고, 더 높은 가치 실현을 위한 공동의 해법을 찾아나가는 진정한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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