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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건축의 이해

현대도시들이 아름답지 않은 이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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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위 하늘을 빼앗긴 도시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하늘이 보이는 골목길 대신 하늘 없는 복도와 엘리베이터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태는 세대 간의 자연스러운 교류를 막았다. 과거 대문앞 골목길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생각해보자. 아이들은 모여서 놀았다. 그 동네에는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 같은 것이 필요 없었다. 아이들은 모여서 축구와 야구를 골목에서 하고 (어떻게 그렇게 작은 골목에서 온갖 스포츠를 다 했는지 의아하다. 어린이의 스케일은 확실히 어른과는 다르다.)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자연스레 어머니들은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골목길이라는 외부공간은 우리에게 길 이외에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는 하늘을 향해 열린 공간이었다. 건축가 코르뷔제는 각각의 세대에서 바라보는 자연이 많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는 그저 바라보는 자연일 뿐이었다. 실제로는 자연과 항상 소통하면서 세대 간의 교류를 촉진했던 골목길 없이, 세대는 분리되고 소외될 뿐이었다. 자연은 일상에서 체험된 다기 보다는 보기만하는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계획안은 실패하였다. 자연을 바라보는 대상으로만 이해했을 때 건축디자인은 실패한다.

빨래가 없는 도시

마지막으로 소통이 없는 도시를 만드는 주범인 “발코니 확장법”을 말해보자. 위의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우리는 멋진 도시경관을 만들 수도 있었다. 홍콩이나 베니스를 가보면 필자를 미소 짓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라 건물의 입면에 널려있는 빨래이다. 빨래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당연하게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전에 주병진씨가 경영하던 보디가드라는 속옷브랜드의 광고문구 중에 하나를 대충 기억해 본다면, “얘야, 속옷 빨래 널린 것을 보니 뼈대 있는 집안이구나”라는 것이 있었다. 이 광고 문구는 빨래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하나의 훌륭한 도시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건축물도 중요하고 자연환경도 중요하다. 하지만, 결국 도시를 훌륭하게 완성하는 것은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이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삶을 담아낼 수 있어야 성공적인 도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삶은 도시환경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이런 면에서 홍콩의 도시 속에 널린 빨래를 쳐다보자. 그 건축은 빈민촌에 가까운 풍경이지만, 빨래가 도시에 컬러를 입히고 생동감 넘치게 해준다. 반면 우리나라의 아파트단지들은 모두가 오피스 건물처럼 유리창으로 도배가 되어있다. 그 안에 사람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필자가 80년대에 강남의 아파트를 보았을 때는 발코니가 그 집안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들어서 한두 채씩 발코니에 알루미늅 새시를 하면서 발코니가 사라졌고, 언제부터인가 발코니를 확장해서 집을 넓힐 수 있게 법적으로 허용을 하면서 우리의 도시에서 발코니는 없어지고 모두 창문만 남아있게 된 것이다. 우리의 아파트가 삭막하긴 하지만, 그나마 발코니가 사적인 외부공간으로서 약간의 개인 마당 같은 역할을 했었다. 그런 발코니마저 새시를 통해서 내부공간화 시키고, 발코니 확장으로 방을 만들어 버리면서 우리의 도시풍경은 우리의 삶이 보이지 않는 삭막한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된 것이다. 몇 년 전 다행스럽게 이런 문제점을 알고 서울시에서 도시에 새롭게 들어서는 건물의 입면에 일정비율을 발코니로 남겨놓게 하는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만들려고 했었다. 안타깝게도 실효성이 없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대부분의 건축가들은 이런 법이 있기를 바랄 것이다. 경제성과 상업성만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용적률을 극대화 할 수 있는 현재의 방식이 정답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도시의 풍경은 너무나도 상막한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도시가 살만한 거리로 채워지게 하기 위해서는 건축물에 사람냄새가 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유리창 대신에 발코니가 있는 건축물을 만들어야 한다. 그 보다 더 좋은 방식은 우리나라 도시의 특징인 경사지와 구릉지를 이용해서 하늘을 향해 열려있는 테라스를 만드는 것일 것이다. 최근 들어서 몇몇 아파트 브랜드들이 테라스식 집합주거를 광고하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마당을 빼앗기고 골목을 빼앗긴 우리 자녀들에게 테라스라도 선물해 주고 싶다.

 

우리나라 아파트 재개발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70-80년대에 지어진 아파트를 혐오하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우리나라 국민은 과거의 것들은 모두 없애야할 대상으로 여기는 지도 모르겠다. 새마을 운동을 하던 시절에는 과거의 유산인 초가집이 철거되어야 할 대상이었고, 초가집을 헐어낸 자리에 우리는 수십 년간 양옥집과 아파트단지를 지었다. 그리고 40년이 지나서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다시금 삼십 년 된 아파트 단지를 철거하지 못해서 안달난 사람처럼 보인다. 앞서서 현대 도시가 아름답지 못한 것이 재료의 통일성이 부족하고 삶의 흔적이 남겨져 있지 못해서라고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다시 정리한다면 어쩌면 우리의 도시가 아름답지 못한 이유는 오래된 건축이 없어서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사는 도시에는 오래된 건축이 없다. 건축이 사람의 수명보다 오랫동안 지속되면 그 자체가 사람의 삶을 담아내고, 사람의 냄새가 베어나는 ‘환경’이 되는 법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에는 한국전쟁 이후에 새롭게 지어진 건축물들만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사람냄새 나는 도시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 사람냄새 나는 도시를 만들 수 있을까? 가장 간단한 방법은 ‘보존’이다. 필자는 여기서 문화재청 사람의 마인드로 보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개선하고 발전시킬 것은 하되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그리는 그림은 좀 자제하자는 것이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 사생대회에 나갔을 때의 경험이 생각난다. 유치원 시절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사생대회에 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 그림을 그리다가 망쳐서 맘에 들지 않으면 울면서 새로운 도화지에다가 그렸던 기억이 난다. 내가 머릿속으로 그리는 멋진 그림은 있는데 그것이 내 도화지에 그려지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어서 계속 다시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재개발의 모습이 어쩌면 울면서 새로운 도화지를 달라고 떼쓰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몇 십 년 도시를 아파트로 지어대보니 유럽의 사진 속에 나오는 그림 같은 도시가 아니더라. 그러니 부수고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그런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아닐까?

우리가 부러워하는 산토리니 섬이나 파리의 중층형 집합주거의 형태도 사실 알고 보면 그 당시의 기술력과 경제력으로 지어낸 나름대로의 시대정신의 산물이다. 파리는 19세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전형적인 도시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지금 보기에 끔찍한 아파트로 가득 찬 서울도 100년 200년 지나고 나면 전 세계에서 비행기를 타고 구경하러 올 20세기를 대표하는 도시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정체성을 너무 거창한 데서 찾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도시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대로 유지를 하고 묵히면 자연스럽게 건축이 환경이 되면서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강남의 오래된 판상형 아파트 단지를 환멸의 대상이 아니라 약간은 인내심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도 삼십년이 넘은 아파트 단지들은 나무들이 건물을 가릴 만큼 자라서 그렇게 흉측해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연의 힘이 위대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좋은 예처럼 보인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지금 드리는 말씀은 앞으로도 계속 아파트만을 지어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향후 새로운 건축을 우리는 해야겠지만, 개발도상국 시대의 발전의 상징이었던 지금까지 지어진 아파트단지를 어느 정도는 유지를 하는 쪽으로 도시와 건축문제를 접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는 과거를 부정하고 비판하는데 만 익숙해 있다. 우리의 과거도 자랑스럽게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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