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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국뽕’은 어떻게 소비되는가

국뽕, 애국심과 국가주의 사이에서의 아찔한 줄타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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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뽕’만 있나? 자국 혐오주의로 전개되는 ‘국까’의 등장

한국 사회, 양극단의 국가관으로 골머리 앓아

무조건적으로 애국심을 강조하고 조장하는 것을 국뽕이라 한다면, 이와 반대로 애국적 요소를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현상을 ‘국까’라고 한다. ‘국가주의’와 ‘-을 까다’의 합성어인 국까는 초기에는 국뽕의 반작용으로서 인터넷상에서 애국심을 조장하는 현상을 비판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까는 국가를 긍정적으로 나타내는 것에 반발하고, 심지어는 국가와 자국민을 부정하는 뜻으로 확장되며 변질됐다. 이로 인해 해외에서 자국 스포츠 선수의 활약이나 문화 산업의 성장이 두드러짐에도 이를 다른 국가와 비교하며 그들의 활약을 폄하하고 평가절하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현 한국 사회에 대해 정당한 비판이 아닌 무조건적인 비난이 형성됐으며, 이는 ‘대한망국론’, ‘독재정치로의 회귀’와 같은 담론을 통해 자국민에 대한 부정과 다른 국가 없이 성장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국까 현상은 자국의 긍정적인 요소를 부정하고 다른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선망을 보인다는 점에서 사대주의와 비슷한 양상을 드러낸다. 국까 현상은 단순히 인터넷상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계나 정치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국뽕에 경도된 사람들이 한국 역사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유사역사학 서적 『환단고기』의 내용을 주장한다면, 국까에서는 자민족의 열등감을 부각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위기가 있었던 시절을 언급하며 자국민과 국가를 부정하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헬조선’, ‘대한망국’ 등 현 한국 사회에 대한 낮은 신뢰도와 경제적 기반이 없으면 무엇 하나 이루기 어려운 사회 제도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20, 30대 층에서는 한국에서의 삶은 가망이 없다며, 복지국가로 잘 알려진 북유럽 사회제도에 대한 열망과 이를 충족해주지 못하는 국가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국민성 부정과 사대주의적 양상을 나타내는 국까 현상은 오래전 중화사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조선부터 조선조까지 정치, 경제, 외교 등 많은 분야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시대적 상황에 있어 중화사상의 긍정적 측면이 존재했지만 과도하게 경도된 중화사상으로 인해 자국의 실리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못한 외교로 원의 침략, 병자호란 등의 국가적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후 국까적 역사관에는 극우 세력으로 지칭되는 뉴라이트의 친일 식민사관이 있다. 이들은 당시 일본의 식민 통치가 조선에게 있어 경제적인 향상에 밑바탕이 되었음을 말하며, 일제강점기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필요했던 시기라고 주장한다. 또한, 식민지배의 원인이 조선인들의 무지에 있음을 말하며 조선인에 대한 열등함을 부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당시 대다수 조선인은 일본의 식민통치로 인해 경제적 혜택을 받기보다 식량 차출, 일본군 ‘위안부’, 강제 징집 등의 수난을 받았으며, 식민통치 당시 경제적 향상에 대한 지표가 조선총독부에 있었기에 뉴라이트의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또한, 근거 없는 조선인에 대한 왜곡과 당시 소수의 친일파 외에는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점에서 친일 식민사관이 우리 국민의 속성을 폄하하고, 우리나라의 주체적 성장을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논란이었던 ‘일간베스트’나 극우 세력에서 주장하는 민주주의 운동 부정, 독재정치 미화도 국까 현상의 한 사례로 나타난다. 이들은 현 한국 사회의 미비한 경제 성장을 과거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높은 경제적 성장률과의 비교를 통해 독재 정치를 미화한다. 또한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과 같이 현재 우리 국민성으로 상징되는 민주주의 운동을 부정하고 조롱하여 사회적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국까 현상은 과거 국뽕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극단적 국가관인 국뽕과 국까간의 경계가 모호함을 드러냈다. 또한 지난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에 반대하며 일어난 태극기 시위에서도 자국 혐오를 확인할 수 있다. 시위 참여자들은 박 대통령의 파면을 대다수 국민들의 요구로 보지 않고 북한 세력의 음모라고 말하며, 이를 위해서는 전적으로 과거 행해졌던 반공과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따라서 시위에 등장한 태극기와 성조기는 과거 높은 경제적 성장에 대한 향수와 전후(戰後) 경제적, 문화적 지원 및 반공에 앞장서 우리나라를 도와준 미국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대주의와 자국혐오를 함축하는 국까 현상은 용어만 다를 뿐, 그 기원은 사대주의의 양상을 보인 중화사상에 있었으며 최근에는 젊은 층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국뽕과 국까는 서로 대립되는 입장에서 한쪽은 자국에 대해 과도한 부정을 다른 한쪽은 자국에 대한 과도한 긍정을 하지만 사실 이 둘은 객관적인 비판 의식이 결여됐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또한, 자국에 대한 한쪽으로 치우친 주장을 한다는 점 역시 공통점으로 꼽힌다. 이처럼 양 극단에 있는 국뽕과 국까는 서로 다른 주장을 하지만 왜곡되고 과장된 내용으로 사람들에게 그릇된 국가관을 심어주고 있다.

 

 

‘뽕’ 맞은 한국 사회에 요구되는 처방전

국가에 대한 의문부터 애국심 재정의까지, 기존 우리의 사고방식 돌아봐야 해

국뽕과 국까는 사회적으로 많이 사용되며 그 영향력은 커졌으나 대중들은 점차 그 둘의 극단적인 국가관에 반감을 표하며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실제 취업난과 주거 부족 문제 등으로 헬조선을 논하는 젊은 층은 애국심을 무조건적으로 강요하는 세태에 반발하며 국가가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서는 현 사회의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영화, 드라마에서 흥행을 위해 사용되는 국뽕 요소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표하며 더 이상 문화적 요소에 치우친 애국심을 더해 상업적 흥행을 얻으려 하는 것을 비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국까 현상에 대해서도 반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까 현상이 국가에 대해 객관적인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닌 자국민 부정과 같은 비난의 형태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까로 분류되는 일베, 극우 세력의 민주주의 운동 부정, 친일 식민사관이 국뽕으로도 사용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일베나 극우 세력의 주장이 현재 한국 사회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국까로 나타나고 있지만, 이들의 논리가 과거 군부 시절이나 식민통치 시절에는 애국심 조장을 위해 사용됐던 만큼 국까가 자칫 국뽕의 또 다른 형태로 활용될 수 있음을 염려하는 것이다. 이처럼 맹목적인 애국주의나 자국 혐오를 바라보는 우려의 시각이 증가함에 따라, 양극단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객관적인 자세로 우리나라를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 대두되고 있다.

과거 군부 시절에는 정치적 수단으로 애국심을 강요하기 위해, 특정 시간대에 경례를 강제하거나, 이를 지키지 않을 시에는 종북 세력의 사회적 낙인을 찍는 등 국민보다 국가가 우선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집단에서 개인주의가 증가하게 되고, 일방적인 애국심 조장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이 늘어나게 됐다. 이처럼 애국심에 대한 관념이 무조건적으로 가져져야 한다는 것에서 애국심을 반드시 가질 필요는 없다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애국심이 과연 필요한가에 대한 의문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의문을 품는 이들은 국가라는 용어가 근대 이후 생긴 개념으로 상상된 허구의 공동체 집단일 뿐이라는 이론을 근거로 애국심을 비롯해 국가에 대한 어떠한 감정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계화가 이루어지고 국가 간의 경계가 모호해짐에도 여전히 사회·문화적으로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음을 볼 때 국가라는 개념은 단순히 상상된 허구의 공동체가 아니며 자국민이 공유하고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지적 또한 잇따르고 있다. 따라서 국민이 자국에 대한 좋고, 싫음을 판단할 수 있다면, 애국심이라는 정서 역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국뽕과 국까 양극단 사이에서 국가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 대두되는 만큼 애국심에 대한 재정의도 요구되고 있다. 이에 애국심이 단순히 자국의 긍정적인 요소만을 부각하는 것이 아닌 자국의 현 사안에 비판할 줄 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국민의 노력을 의미하듯, 국뽕 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 우리의 사고관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환단고기』나 친일 식민사관과 같이 우리 역사를 과도하게 격상하거나 격하하는 사고에서 벗어나 비판적으로 우리 역사를 서술할 수 있어야 하며, 자국의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태도가 요구된다. 또한 추상적인 애국심 강요가 아닌 현실 문제 개선을 통해 국민이 자연스럽게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느낄 수 있도록 국가 차원에서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 사회 스스로 투명한 거울과 마주할 수 있어야

마약은 짧은 시간 동안 신체에 환각 증세를 일으키면서 기운을 돋움과 동시에 몸에 활력을 찾게 하는 효과를 일으킨다. 그러나 이런 기분 좋은 변화는 잠시뿐, 순간의 쾌락에 눈이 멀어 장기간 마약을 복용하게 된다면 결국 마주하는 것은 망가진 자신의 신체와 피폐해진 정신뿐이다. 최근 우리 사회가 복용해온 국뽕도 이와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올바른 애국심을 넘어서서 과도한 애국주의의 환각에 빠진 사회는 일순간 국민들의 사기를 북돋을 수는 있으나, 이는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 결국 진짜 해결해야 하는 사회 전반의 본질적 문제들은 외면한 채 자긍심이란 허울 좋은 눈가리개 속에서 스스로의 동력을 잃어나갈 뿐이다. 지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광복 71주년 축사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이를 방증한다. “취임 후 여러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우리 국민들이 이뤄낸 오늘의 대한민국에 무한한 자긍심을 느꼈다”라며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라고 지적한 이 연설에 대하여 대부분의 대중들은 냉소를 보냈다. ‘엽전’에 이어 또 다시 우리 스스로를 자조하는 표현이 사회 곳곳을 넘나드는 현실 속에서, 그 동안의 정책 실패에 대한 반성과 대안 제시는커녕 ‘국뽕 연설’로 이를 외면했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는 그동안 ‘뽕’ 맞아온 우리 사회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점차적으로 흘러나오는 모양새다. 일례로 무조건적인 애국주의 코드로 점철된 문화 컨텐츠에 대한 대중들의 평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으며, 이러한 반응을 토대로 해당 업계 내부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컨텐츠 자체의 질을 높이려는 노력이 수반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다시 한 번 유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자정작용이 자칫 지나친 자기 비하로 흐르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나친 자기도취와 자기비하의 양극단에서 한걸음 걸어 나와 꾸밈없는 거울 속 모습과 마주할 수 있는 사회만이 진정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우리 역시 이제는 환각 상태에서 벗어나 더 이상 ‘뽕’이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김민우 기자(kimsioa@mail.hongik.ac.kr)

김정운 기자(rhra011@mail.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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