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7.12.2 토 17:45
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혜윰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2000), 이상과 현실의 협주

80년대 영국은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마가렛 대처가 신자유주의라는 칼을 휘두르며 새로운 영국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2000)는 대처 시대에 더럼이라는 탄광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더럼의 탄광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파업을 한다. 대처는 그들을 ‘내부의 적’이라고 비난한다. 파업한 이들은 파업하지 않은 노동자들을 비겁한 배신자라 욕하고, 두 축이 서로 마주치는 날에는 으르렁대며 싸우기 바쁘다. 더럼에 사는 주인공 빌리 엘리어트(이하 빌리)는 11살 소년으로, 치매기가 있는 할머니, 강경한 파업 노동자인 형과 아버지로 이루어진 집안의 막내다. 얼핏 들으면 다소 우울한 성장 스토리가 펼쳐질 것만 같은 배경설정이다. 우연히 접한 발레에 푹 빠져 도서관에서 발레에 대한 책을 훔치고, 가족 몰래 화장실에서 발레 연습을 하다 욕조에 빠져버리는 빌리.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 그를 보며 희망과 용기를 얻는다. 황무지에서 피어난 꽃이 더 눈부신 법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꽃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꽃이 피어나는 황무지까지도 영화의 대상이다. 


더럼이라는 탄광촌은 거친 남자들의 폭력적인 노동 투쟁의 현장이다. 어린 아이의 섬세한 감수성이나 예술가적 기질이 자라기에 적당한 환경은 절대 아니다. 사회가 소년에게 요구하는 것은 강한 남자로 성장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권투를 가르친다. 할아버지부터 아버지를 거쳐 3대째 이어져오는 권투 글러브는 더럼에서 생존하기 위한 남성성의 상징이다. 아버지는 전통적인 성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권투와 발레를 구분한다. 때문에 당연하게도 아버지는 빌리의 발레를 용납할 수 없다. 더럼과 빌리의 집안에서 발레란 여자의 전유물이다. 하지만 빌리는 권투 글러브보다는 발레 슈즈에 끌린다. 관객은 아버지와 형의 투쟁을, 그리고 그들의 남성적 이데올로기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더럼에서의 생존을 부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빌리의 발레도 응원한다. 투쟁과 권투로 대표되는 남성성과 발레로 나타나는 여성성. 그것의 대립과 공존. 관객 스스로 빠져드는 이 모순 덕에 영화의 긴장은 계속 유지시킨다. 더럼은 억압의 공간이면서도 소년에게 소중한 성장의 배경이다. 그리고 발레의 꿈을 억압하면서도, 그 꿈이 이뤄지게 한 공간이다. 현실과 이상이 공존하는 공간인 것이다. 얼핏 보면 폭력적으로만 보이는 더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쪽으로 치우쳐진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빌리의 재능은 마침내 아버지를 설득한다. 크리스마스 날 밤 체육관에서 춤추다 마주친 아버지를 빌리는 피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맞서서 자신의 춤을, 발레를 보여준다. 빌리의 얼굴에는 발레를 허락해 달라는 애절함, 발레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 현실에 대한 답답함 등 많은 것이 깃들어 있다. 그 결연한 표정과 몸짓을 보고 아버지는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고는 윌킨슨 부인에게로 달려가 감사를 표한다. 돈 문제는 알아서 하겠다는 대사는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그리고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는 그동안 귀중하게 여겨온 가치들을 내던진다.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면서까지 자식을 위하는 부성애는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발레는 ‘계집애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발레를 반대하던 아버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빌리를 위해 바치게 된다.


빌리는 가족의 희생으로 발레를 계속하게 되고, 런던에 있는 왕립 발레 학교에서 오디션을 보게 된다. 지난한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빌리의 합격 소식이 날아든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쉽게 관객을 놓아주지 않는다. 빌리의 합격 덕분에 최고조에 이른 영화의 분위기는, 파업의 실패 소식으로 순식간에 바닥까지 떨어진다. 이 하강은 지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갱도로 내려가는 아버지와 형으로 표현된다. 아버지와 형의 표정은 참담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수평이동이다. 런던으로 떠나는 빌리의 버스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형이 탄 지하철의 도착으로 이어진다. 빌리를 위해 지하로 내려가야 했던 아버지와 형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비로소 상승한다. 아버지의 몸은 올라가는 방향의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다. 내려가는 것에 익숙한 늙은 아버지는 ‘올라가는 것’이 어색하기만 하다. 내려갔던 아버지가 다시 올라가는 화면과 함께 분위기는 다시 고조된다. 그리고 나타나는 예술관의 모습. 관객은 이후의 화면을 짐작한다. 그리고 기대하기 시작한다. 발레리노가 된 빌리의 모습을, 그의 공연을, 두 시간이 넘는 런닝 타임동안 바라던 아름다운 결말을. 그리고 아버지는 그 상승의 끝에서 훌륭하게 자란 막내 아들을 보며 감격스럽게 눈물짓는다. 지난날의 희생을, 그리고 자신이 지켜낸 자존심을 보상받는 순간이다. 


빌리는 영화 내내 뛰어오른다. 하지만 사람은 날 수 없다. 이상을 향한 도약 뒤에는 현실로의 착지가 기다리고 있다. 빌리의 그 모든 뜀박질들 역시 슬프게도 중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땅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 빌리는 넓은 어깨를 가진 듬직한 발레리노로 성장했다. 작고 연약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마침내 빌리는, 자신을 위해 희생한 가족들이 보고 있는 무대 위에서 한 마리 백조가 되어 멋지게 날아오른다. 

 

서덕원(국어국문2)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