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외면해왔던 진실을 깨닫는 순간 여태까지의 평화는 고통으로 수렴한다.

일상적 삶의 구차함이 쌓아 올린 보금자리, 『녹천에는 똥이 많다』(199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녹천역을 향해 달려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름으로만 들었던 이 소설을 책으로 직접 마주하였을 때가 떠오른다. 낡아서 바스러질 것만 같은 표지에 덕지덕지 붙은 빛바랜 테이프와 군데군데 흐려진 붉은 색의 ‘녹천에는 똥이 많다’라는 글씨. 그 강렬함은 소설의 제목만큼이나 노골적이었다. 녹천에는 똥이 많다는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제목은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굽이굽이 펼치게 하였다. 이 소설은 영화 <초록물고기>(1997), <밀양>(2007), <시>(2010) 등을 통해 영화감독으로 두각을 나타낸 이창동 작가의 단편집에 수록되어 있다. 작품은 주인공인 준식이 자신의 평범한 삶에 만족하면서 살다가 이복동생인 민우가 등장하면서 자신이 이룬 것이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아 무너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민우가 사업에 문제가 생겼다며 준식에게 도움을 청하자 준식은 그를 외면할 수 없어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온다. 민우와 함께 집에 가는 길, 준식은 옆자리에 앉아 악몽을 꾸는듯 잘게 떠는 추레한 몰골의 청년이 그토록 촉망받았던 엘리트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하며 회상에 빠진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한없이 작게 만드는 존재가 있을 것이다. 준식에게는 동생 민우가 그런 사람이었다. 삶에 치여 아등바등 살아가는 자신과는 달리 고고하기만 했던 동생의 낯선 모습에 그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아득해질 무렵, 소설의 도입부와 똑같은 무미건조한 안내 음성이 녹천역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녹천(鹿川)이라, 이름 한번 시적인데?”

민우가 역사의 꼭대기에 붙어 있는 간판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준식도 고개를 쳐들어 어둠 속에서 환히 불을 켜고 있는 그 간판을 보았다.

한낮의 녹천역은 다른 역보다 내리는 사람이 드물었다. 안전문 설치 공사 때문에 곳곳이 파인 바닥과 그로 인한 파편들은 기자에게 당혹감을 주기 충분했다. 개중에 멀쩡한 부분을 골라 밟으며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들어 역 간판을 바라보았다. 녹천의 역명은 한자로 사슴 록(鹿)자와 내 천(川)자를 쓴다. 역 이름의 유래를 알아보니 중랑천이 범람하면서 홍수가 난 마을에 푸른 사슴이 이 근방의 개울에서 목욕을 하고 간 뒤 마을의 일들이 잘 풀려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민우의 말마따나 시적이다 못해 신화적인 분위기까지 담고 있는 이름이었다. 준식이 사는 아파트는 이 개울 너머에 있다고 했다. 그가 일궈낸 성취이자 완벽한 안식처였던 아파트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갑작스럽게 내려간 기온과 거센 바람에 맞서며 역 밖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이곳이 어째서 마치 시 구절에라도 나올 것 같은 고상한 지명을 갖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 의문은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이름이 유일한 흔적이라곤 전철역 가까이 흐르고 있는 초라한 개울뿐인데, 그나마 공장 폐수와 오물이 뻑뻑하게 괴어 있을 뿐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준식의 아파트로 향하는 녹천교 아래의 중랑천은 느지막이 저무는 해의 빛을 받아 자글자글하게 반짝였다. 개천 옆에 조성된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에서는 꽤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여유를 만끽했다. 소설에서의 묘사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맑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흙탕물이 회색빛 철문사이로 스며 나와 개천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맑은 풍경 곳곳에 있는 거뭇거뭇한 얼룩들이 눈에 들어와 위화감을 느꼈다. 물가에 용도를 알 수 없이 박혀있는 플라스틱 박스는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고 주인을 잃은 차가 강물에 반쯤 몸을 담근 채 일렁였다. 그 모습을 보던 기자는 준식이 아내의 타박에 사 온 금붕어를 떠올렸다. 민우가 처음 집에 왔을 때 불청객을 보듯 굴던 아내가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높은 이상에 매료되어 눈을 빛냈다. 사실 민우는 사업 실패가 아닌 노동 운동가이기에 경찰에게 쫓기고 있었다. 이를 알고 찜찜해하는 준식과는 달리 아내는 민우를 더욱 대단한 존재로 바라본다. 민우가 오기 전까지는 아내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오랜 고생과 굴욕 끝에 살게 된 ‘진정한 집’의 거실을 남부럽지 않게 꾸미는 것이었다. 그런 아내가 더 이상 집을 꾸미는 일에도 관심 두지 않았다. 하지 않았던 화장을 하고, 부르지 않았던 노래를 부르고, 들려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모든 변화의 시발점에는 민우가 있었다. 준식은 자신처럼 꿈이나 열망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녀의 변화에 그런대로 유지되었던 가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느꼈다. 어쩌면 그는 봉지 안에 갇힌 채 자신도 모르게 생겨버린 틈으로 물이 새어나가 죽어버린 금붕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을지도 모른다.

 

이 어마어마하고 위풍이 당당한 고층 아파트들을 떠받치고 있는 지반이 실인즉 거대한 쓰레기의 퇴적층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놀라웠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그 위에 나무를 심고 잔디를 가꾸면서 그럴듯하게 조경을 꾸며 살 것이다.

녹천역의 주변에는 다른 건물보다도 아파트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러한 아파트가 지어지기까지 무수히 많은 공사가 있었고 이를 위해 투입된 노동자들로 녹천역 근방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들을 위한 나름의 편의시설이 마련되었지만 유난히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것이 바로 화장실이었다. 별다른 오물처리 장치 없이 대충 구덩이를 파고 이를 판자로 둘러싼 간이 화장실이 있었고 그마저도 인원보다 턱없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녹천역 주변은 구린내가 진동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공사과정에서 발생하는 폐기물까지 더해졌으니 그 지독함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이러한 오물들이 땅에 묻히고 그 위에 그대로 공사가 진행되었으니 소설의 제목과 꼭 들어맞았다. 문득 티 없이 파란 하늘을 이고 우람하게 서 있는 아파트가 준식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의 부조리를 외면하며 쌓은 이익으로 한껏 몸을 부풀린 그에게 온갖 오물들을 밟고 선 아파트는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결국 준식이 일하는 학교에 형사가 찾아온 것을 계기로 시작된 말다툼이 애써 저편으로 미뤄둔 감정의 범람으로 이어졌다. 이제까지의 삶이 부정당한 순간 그는 끝내 민우를 형사에게 넘기기로 결심한다.

 

이 거대한 오욕의 세상, 이미 모든 순결함과 품위를 잃어버린 이곳에서 나 또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가자, 하고 그는 어둠 속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설득했다. 이 어마어마한 쓰레기의 퇴적층 위, 온갖 오물과 증오와 버려진 꿈들을 발아래에 두고 저 까마득한 허공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23평짜리 내 보금자리를 향해

자신으로 인해 준식과 아내의 사이가 극단으로 치닫자 민우는 떠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이미 형사에게 민우의 위치를 털어놓은 준식은 그런 그를 데려다주겠다며 녹천역으로 데려가다가 막상 형사를 보자 동생을 끌고 도망친다. 이미 민우는 잡혀버렸지만 뜀박질하는 발은 멈추지 못하여 공사장 바닥에 널린 똥을 밟고 넘어지고 만다. 마지막에서야 발작적으로 옳은 일을 하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하고 만 것이다. 잘못된 것을 알아도 그에 안주할 수밖에 없는 생의 구차함이 잔인하게 다가왔다. 진정한 삶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여 그것을 알게 되더라도 그대로 살 수 있을지 불확실한 현실에서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낫지 않을까. 각박한 삶 속에서 회피해온 각성의 전조를 애써 누르는 준식의 모습이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느 때와 똑같은 풍경이 새삼 낯설게 다가와 씁쓸했다.

SNS 기사보내기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

하단영역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