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걱정, 근심을 물리치는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운 마법

검은 도화지에 그리는 오색빛깔, 불꽃놀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까만 밤하늘에 아름다운 색과 모양으로 빛을 수놓는 것은? 정답은 별도 달도 아닌 불꽃놀이이다. 밤바람 쐬기 좋은 가을철이면 어김없이 여의도 지하철역을 한차례 마비시키는 이 불꽃놀이는 이웃 나라 중국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에서 꽃을 피운 화약기술이다. 오늘날 불꽃놀이는 특별한 행사나 기념일에 빠질 수 없는 하이라이트로 자리매김하며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인류의 진화에 필수적인 생존요소였던 불이 화학작용과 만나 불꽃을 만들어내고 놀이가 되기까지 이 흥미로운 불과 빛의 진화 모습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불꽃놀이의 원리

불꽃놀이는 화약이 터질 때 나는 큰 소리와 함께 꽃잎처럼 휘황하게 퍼지는 불꽃을 즐기는 민속놀이이다. 즉, 화약의 원리를 이용한 불빛인 것이다. 불꽃놀이는 크게 두 가지의 요소로 구성되어있는데, 바로 색과 모양이다. 우리가 불꽃놀이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달, 별과 다른 화려한 색채이다. 이 화려한 불꽃의 색채는 연소와 불꽃반응, 두 가지의 과학 현상을 결합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먼저 연소는 우리의 일상생활과도 밀접한 현상으로, 대개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면서 빛, 열, 불꽃 등을 발생시키며 타는 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이 연소가 어떻게 색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바로 타는 ‘물질’에 달려있다. 물질을 구성하는 다양한 원소 중에서는 연소하면서 특유의 불꽃색을 발현하는 것들을 활용하는 것이다. 바로 이를 가리켜 ‘불꽃반응’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보통의 불꽃반응은 원소를 무색 불꽃 속에서 가열했을 때 나타내는 색을 확인한다. 본래 불꽃반응은 물질의 성질이나 원소의 종류를 확인하기 위한 정성분석을 위해 이용되는 실험이지만, 불꽃놀이에서는 이렇듯 아름다운 색을 발현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바륨의 경우 초록색, 알루미늄은 흰색, 스트론튬은 붉은색, 나트륨은 노란색, 구리는 파란색을 띤다. 흔히 우리가 보는 불꽃놀이는 발사포에 화약을 채워놓고 불을 붙여 그 폭발력을 통해 화공품을 공중에 쏘아 올리는 방식이다. 여기서 이 화공품을 연화(煙火)라고 하는데, 공 모양의 옥피 화약과 성(星)을 채워 넣어 만든다. 성은 가운데에 핵 역할을 하는 무명씨에 발연제, 색화제 등의 혼합화약을 입혀 만든 것이다. 바로 이 성의 구조가 불꽃의 모양과 색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다. 불꽃이 폭발하는 것을 꽃에 비유하여 개화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연화의 내부구조에 달려있다. 

  

불꽃놀이의 출발지, 중국

이렇듯 기본적인 제조방식 하에 다양한 변수를 통해 색다른 형색을 보이는 불꽃놀이의 기원은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불꽃놀이의 착상은 고대 인도와 페르시아 등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 형태로 처음 등장한 것은 바로 7세기 초 중국 수나라 양제 무렵이다. 불꽃놀이는 처음부터 즐기기 위한 오락의 용도는 아니었다. 전쟁 시에 아군 내에서 각종 암호를 교신하기 위한 신호로 사용되었던 것이 원형이다. 

이 외에도 종교 축제에서 이용된 불꽃놀이는 화약을 채운 대나무 관을 불 속에 던져 폭발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강력한 폭발음이 악한 기운을 쫓아버린다는 미신에서 기원한 행사이다. 중국 북주 시절 동자학사(童子學士)라고 불리던 종름(宗懍)이 쓴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를 보면, 정월 1일 마당에서 대나무를 터뜨려 산조(山噪)와 악귀를 쫓았다는 구절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산조는 깊은 산 속에 사는 뿔이 넷 달린 괴수로, 매년 춘절 때마다 나타나서 가축과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쳤다고 전해진다. 이 산조가 밝은 빛과 큰 소리를 무서워하는 것을 안 사람들이 산조의 침입을 예방하기 위해 춘절 전야가 되면 폭죽을 터뜨리는 풍속이 전해 내려오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꽃피운 불꽃놀이

우리나라에서 불꽃놀이가 처음으로 시작된 때는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의 불꽃놀이는 국가에서 대규모로 여는 화산대(火山臺)와 민간에서 흔히 즐기던 줄불과 딱총 놀이로 나열해 볼 수 있다. 화산대는 화약이나 폭발물을 포통에 넣고 마구리와 겉을 전부 종이로 겹겹이 쌓아서 속에 꽂은 심지에 불을 붙여 터뜨리는 방식의 불꽃놀이이다. 당시 각종 궁중 행사에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때부터 오늘날의 불꽃놀이와 쓰임이 유사하다. 

한편, 민간에서 많이 사용했던 줄불은 기다랗게 만든 종이전지에 숯가루와 솜을 다져 넣고 끝을 봉해 나뭇가지에 달아매고 밑에서 불을 붙이는 방식이다. 이 모양은 꼭 줄줄이 소시지와 비슷한데, 연속적으로 튀면서 불꽃이 흩어지는 형태를 보인다. 딱총은 줄불과 다르게 솜 대신 유황 같은 것을 숯가루와 한데 버무려 콩알만하게 만든 것을 종이에 싸놓은 것이다. 이것을 장난감 총에 넣고 방아쇠를 당기면 큰 폭발음이 난다. 

이렇게 궁중과 민간 모두에서 즐겼던 불꽃놀이는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그 기술의 발전 정도가 중국을 능가했다. 1413년에는 한양을 방문한 일본 사신이 불꽃놀이의 요란한 소리와 화력에 놀라 도망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 시기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중국 사신들을 대접할 때 진행했던 불꽃놀이는 폐지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1538년에는 외국 사신에게 불꽃놀이를 보여주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화산대와 같은 대규모 불꽃놀이는 중단된 지 오래되었으나, 줄불이나 딱총 놀이 같은 민간의 불꽃놀이는 아직도 지방의 전통민속놀이로 전승되고 있다. 강릉의 단오제에서는 횃불 행진, 횃불 싸움이 남아있으며, 안동 하회에서는 뱃놀이와 함께 줄불놀이를 연행하고 있다. 

  

바다를 건너간 불꽃놀이

불꽃놀이가 유럽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이탈리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가 화약을 전파하면서부터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유럽왕실에서는 대관식이나 세례식, 결혼식과 같은 대규모 행사에서 불꽃놀이를 사용했다. 특히 프랑스의 루이 14세(Louis XIV, 1643~1715)는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에서 이 불꽃놀이를 자주 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주도하에 16~18세기에 걸쳐 유럽의 불꽃놀이 문화가 발전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바로크 시대에 절정을 맞았다. 중세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에는 모든 축제가 해가 떠 있는 낮 시간대에 이루어졌던 것에 반해, 바로크 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꽃놀이와 함께 밤에 축제가 열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 때문에 당시의 왕과 귀족들은 동이 틀 무렵까지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밤에 즐기는 행사에는 빛이 필요했고, 당시 엄청난 고가에 이르던 양초가 수천 개까지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불꽃놀이는 일반 시민들과는 먼 이야기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 접어들면서 유원지의 활성화를 통해 일반 시민들 역시 불꽃놀이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본래 유원지는 궁정의 축제문화를 상업적으로 모방하여 조성한 것으로 정의되는데, 입장료를 지급하면 콘서트나 불꽃놀이를 관람할 수 있었다. 유원지의 밤 시간대 개장으로 인해 고급 사교 클럽이나, 카페, 레스토랑의 영업시간이 늦춰지게 되었다.

  

이렇듯 불꽃놀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본래의 목적과 달리 축하 분위기를 고취시키기 위한 오락적인 기능으로 오늘날 우리 곁에 남아있다. 그러나 밤하늘의 불꽃을 보는 순간만큼은 걱정과 근심을 잠시나마 잊어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안 좋은 기운을 내쫓는다던 본래의 의미를 잃지 않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밤하늘 위로 터지는 아름다운 불꽃을 위해 기꺼이 고개를 든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꿈꾸니 말이다. 

 

<참고문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KISTI의 과학향기 칼럼,<불꽃놀이, 그 화려함에 대하여>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상을 바꾼 발명품 1001』(2010), 잭 첼로너, 마로니에북스

SNS 기사보내기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

하단영역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