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난해함과 신선함의 경계에서 〈후쿠오카〉(2019)

좌측통행이 보통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평론가는 ‘눈’을 총동원해 작품을 해석하며 때로는 찬탄을 보내고 때로는 신랄한 비판을 한다. 일반 관객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관에서 나오면 일제히 이래서 좋았다, 인물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된다, 결말이 아쉽다 등 나름의 ‘눈’을 펼치며 토론하곤 한다. 이때 단번에 “재밌었다!” “별론데?” 왈가왈부할 수 있는 영화가 보통이지만, “뭐 이런 영화가 다 있어?”가 절로 나오는 영화들도 있기 마련이다. 기자에겐 장률 감독의 <후쿠오카>가 그러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보통이 아닌 영화였다. 

“아저씨, 나랑 여행 갈래요?”

“꺼져.”

“일본 후쿠오카 알죠? 거기 어때요?”

“얘 진짜 또라이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헌책방. 영화는 후쿠오카 여행을 가자는 ‘소담’과 툭툭대며 밀어내는 ‘제문’의 대화로 시작한다. 책방을 운영하는 제문은 소담의 부탁을 처음엔 거절하는 듯싶다가, 어디선가 들리는 의문의 목소리에 이끌려 후쿠오카로 떠나기로 한다. 기자는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기 전 위 대화의 배경이 되는, 영화 속 제문이 운영하는 정은서점을 먼저 찾았다. 하지만 지도에 적힌 주소에 도착했을 땐 웬 작은 주택이 서 있을 뿐이었고 어리둥절한 채 그날은 돌아갔다. 얼마 후 서점 대표님과 연락해 보니 찾아오신 그 건물이 맞다 하여 굉장히 놀랐다. 사정을 들어보니 연세대학교 앞에서 오랫동안 운영을 하시다가 몇 년 전 자가로 옮기신 모양이었다. 촬영지가 없어졌을 거란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미리 제대로 찾아보지 못한 기자를 질책하면서도, 어느새 가는 게 맞는지 손익을 따지고 있는 기자였다. 결국 꿩 대신 닭이란 마음으로 며칠 뒤 다시 방문해 안으로 안내받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서점이라기 좀 뭐한 공간이었다. 책들은 끈으로 묶여 쌓여있었고 사방이 책으로 가득 찰 정도로 좁아 걷기도 벅찼다. 그런데도 왠지 할아버지 집에 있을 것 같은 촌스러운 디자인의 책들과 얼마 전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던 책이 같이 묶여있는 모습은 흥미를 끌 만했다. 하지만 기대만큼 실망도 큰 법이었다. 아쉬운 표정은 숨길 수 없었고 돌아가려 했다. 그런 기자에게 나이가 지긋한 사장님은 필요한 책 있으면 준비해 둘 테니 연락 달라며 가게 명함을 쥐여 줬다. 명함에는 ‘서대문구 연희동 78-4’가 쓰여 있었고 이는 영화 촬영 당시 정은서점 주소였다. 그제야 알았다. 여기 있는 책들은 그때 그 현장의 책들이다. 꽂혀있던 책들이 바닥에 쌓여 묶여 있을 뿐이었다. 과거와 현재가 부닥치는 순간이었다. 어리석음을 깨닫는 과정은 꽤 인상적으로 남았다. 잔뜩 상기된 기자는 며칠 뒤 후쿠오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정은서점.
▲정은서점. "순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든 것이냐?" 윤동주 〈사랑의 전당〉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좌측통행이 보통임을 상기시켰다. 우리나라에선 왼쪽으로 걸으면 이상한 취급을 받지만 여기선 오히려 그렇게 해야만 하는, 너무도 당연한 규칙이었다. 왼쪽 에스컬레이터에 왼쪽에 서서 이동하고, 버스기사가 오른쪽 자리에서 운전대를 잡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익숙하지 않음은 신선함을 의미한다. 좌측통행 덕에 같이 간 친구들과는 “야야, 왼쪽으로 걸어야지”하며 장난을 치는 등 재밌는 상황이 연출되곤 했다.

“너 일본말 할 줄 알아?”

“몰라요.”

“모른다고? 나도 모르는데.”

“걱정 마세요. 다 알아들을 거니까.”

“또라이네.”

(중략)

“저기 혹시 여기 어떻게 가야돼요?”

“まっすぐ いって信?をわたって左に少し行ってください。”

“아- 감사합니다.”

소담은 별난 여자다. 소녀같이 명랑하면서 귀신같이 불가사의하다. 소담은 지나가는 일본인에게 한국어로 길을 묻는다. 그리고 그 일본인은 일본어로 대답한다. 극 중 소담은 외국어를 할 줄 모르지만 외국인과 대화할 줄은 아는 인물인 것이다. 제문은 소담의 호칭을 또라이에서 귀신으로 바꾼다. 귀신과 함께 제문은 ‘해효’를 찾아간다. 해효는 제문의 절친했던 대학교 선배로 후쿠오카에서 작은 술집을 운영하고 있다. 제문을 보자마자 악담부터 뱉는 해효를 보니 별로 반기는 눈치는 아닌 듯하다. 소담은 28년 만에 재회한 그들의 과거를 듣게 된다. 제문과 해효는 대학시절 ‘순이’라는 여자를 동시에 사랑했고 동시에 사귀었다. 어느 날 삼자대면을 가졌고 ‘둘 중 한 명을 골라!’라는 요청에 순이는 고르지 못하고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그 후 둘은 완전히 멀어진다. 제문은 그녀가 자주 다니던 정은서점을 운영하고, 해효는 순이의 고향인 후쿠오카에 가게를 차려 살고 있다는, 소담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제문과 해효의 사이가 안 좋을 만하다. 

“형 지금은 잘 자?”

“어, 잘 자.”

“다행이네. 옛날엔 불면증 심했잖아. 어떻게 고쳤대?”

“나 원래 불면증 없거든? 그냥 네 꼴 안보니까 잘 사는 거야.”

“뭐라고?”

“그 시치미 떼지 마라 새끼야. 네가 만날 술 처먹고 새벽 3시 4시에 전화질해서 꼬장질 부리는데, 내가 어떻게 잠을 자니?”

“(웃음)”

 

▲스이쿄노텐진 신사. 제문과 해효의 위 대사를 하는 장소다. 텐진이라는 지명은 본 신사에서 유래했다.
▲스이쿄노텐진 신사. 제문과 해효의 위 대사를 하는 장소다. 텐진이라는 지명은 본 신사에서 유래했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어느새 회포를 푸는 제문과 해효다. 그러던 둘은 소담과 함께 시내를 돌아다니다 후쿠오카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헌책방에 들어간다. 소담은 들어가기 전, 야외 책 진열대에 뜬금없이 놓여있는 인형을 보고 무언가를 느낀다. 서점 주인은 반기며 또 오셨냐며 소담에게 인형을 건넨다. 소담은 해외여행이 처음인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이리에 서점은 종이비행기 같았다. 바람에 따라 내려가기도 올라가기도 하지만 천천히 하늘을 활공하는 종이비행기 말이다. 가게는 작았지만 그만큼 아늑했다. 장르는 세세하게 나뉘어져 있었고, 내심 기대했던 사장님은 영화 속 미모의 사장님이 아니어서 살짝 아쉬웠다. 배우였나 보다. 서점 내부에는 <후쿠오카> 한글 포스터가 부착돼있었다. 앞에 계신 사장님이 기뻐하며 붙이셨을 상상을 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서점엔 책장만 넘겼을 뿐인데 곧 찢어질 것 같아 도로 집어넣은 고서도 있었고, 도깨비로 가득 채워진 독특한 그림책은 일본어를 읽을 줄 몰라도 즐기기 충분했다. 이처럼 서점의 공기는 가라앉다가 붕 뜨기를 반복했다. 기자가 서점에 있는 동안 관찰한 손님은 총 2명이었다. 한 명은 작가처럼 보이는 손님이었다. 안경을 쓰고 공책을 들고 있었으며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었다. 기자와 판박이여서 흠칫했다. 다른 한 명은 키가 크고 수염이 난 손님이었다. 책을 책장에서 꺼내진 않고 몇 분 동안 가만히 제목만 읽고 있었다. 좋은 글 소재를 찾는 손님과 가만히 분위기를 즐기는 손님. 영화의 영향인지 서점의 영향인지 둘 모두에게서 신비한 느낌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이리에 서점의 내부. 뒤를 돌면 〈후쿠오카〉 포스터가 있다.
▲이리에 서점의 내부. 뒤를 돌면 〈후쿠오카〉 포스터가 있다.

 

<후쿠오카>의 핵심 촬영지는 단연 정은서점과 해효가 운영하는 술집이다. 따라서 정은서점에서 좋은 교훈을 얻긴 했지만 당시의 촬영지를 찍지는 못했기에, 가게만큼은 촬영해내리라 다짐하고 비행기를 탔던 기자였다. 하지만 사전정보가 너무 없던 탓에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독자들께 전한다. 아쉬운 마음에 장소에 대한 해설을 붙이겠다. 해효의 술집은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오가는 장소로서 기능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론 제문과 해효가 주인공인 장소다. 한 여자를 잊지 못한 두 남자의 진지하면서도 유치한 싸움이 일어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술집은 제문과 해효를 상징한다. 반대로 가게 외부에 위치해 나가면 바로 보이는 빨간 철탑은 가게를 내려다본다.

“저 철탑이 계속 보이네. 날 따라오는 거 같아.”

 

▲애플스토어 바로 위에 서있는 이 탑은 이름이 없다. 하지만 꽤 높이가 있어 어디서든 빠끔히 보인다.
▲애플스토어 바로 위에 서있는 이 탑은 이름이 없다. 하지만 꽤 높이가 있어 어디서든 빠끔히 보인다.

 

위 대사를 읽고 혹시 눈치챈 독자가 있는가? 빨간 철탑은 순이, 그리고 소담을 상징한다. 탑은 어디서든 보이면서 이름은 특정돼 있지 않다. 소담은 그런 탑이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외에도 영화는 꾸준히 소담이 순이의 귀신 또는 제문과 해효의 중개자임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소담이 만약 대학교 후배로 들어왔다면 좋아했을 것 같냐는 만담은 위 둘 모두에 해당하는 대화이다. 그들 머리 꼭대기에 있는 것 같은 소담은 밖에 보이는 높은 탑을 올라가 보자고 한다. 그 탑이 빨간 철탑인지 주변의 다른 철탑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전망대에 올라가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들, 가게를 내려다보는 제문과 해효. 소담은 뜬금없이 정은서점에 전화를 건다. 배경은 정은서점. 전화벨이 울린다. 카메라는 제문과 해효를 차례로 비춘다. 해효는 주저앉아 순이가 좋아하던 전등을 들고 있다. 전화가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서서히 들며 카메라를 응시한다. 이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무슨 영화가 이래?’ 기자와 같은 생각이 든 독자가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한다. 매듭에 둘러싸인 영화의 의문점들을 풀기 위해 취할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오스트레일리아의 미술 평론가 로버트 휴스(Robert Hughes, 1938~2012)는 창작물에 대해 “인간은 그들이 만든 영상에 자신의 역사, 신념, 마음가짐, 욕망과 꿈을 새겨 넣는다”라고 설명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영화의 이해를 향한 첫걸음은 창작자, 즉 감독을 파악하는 일이다. <후쿠오카>의 감독은 조선족 출신인 장률이다. 조선족으로서 필연적으로 겪는 민족 정체성 혼란은 역설적으로 그에게 경계를 다룰 줄 아는 눈을 선물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스스로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채 경계를 넘나드는 영화들을 다수 제작했다. 이러한 특징은 <후쿠오카>를 포함한 *도시 3부작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다시 말해, 장률 감독의 영화엔 모호함이 보통이다. 모호한 삶을 살아왔기에 모호한 작품이 나온다.

<후쿠오카>가 확실히 경계를 오가는 영화임은 맞지만 왜 배경이 일본인지는 항상 의문이었다. 취재를 끝마치고 후쿠오카를 걸으며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일본은 좌측통행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을 섞고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난해한 영화가 일본이라는 배경과 융화해 보통처럼 느껴졌다.

 

*<경주>(2014),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 <후쿠오카>.

SNS 기사보내기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

하단영역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