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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은 오늘도 한 칸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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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에서 ‘폰’(Pawn)은 가장 하위의 기물로, 첫 움직임을 제외하고는 오직 앞으로 한 칸 전진만 가능하다. 반대로 ‘퀸’(Queen)은 가장 강력한 기물로, 가로세로 대각선 8방향을 칸수 제한 없이 움직일 수 있다. 이렇게만 보면 폰은 별 가치가 없는, 다른 상위 기물을 보호할 뿐인 기물이고 퀸은 가장 중요한 기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체스에는 ‘퀴닝(Queening)’이라는 흥미로운 규칙이 있다. 폰이 체스판의 반대편 끝 칸에 도달하는 순간, 폰은 그 즉시 퀸으로 승격한다는 규칙이다. 이 규칙으로 인해 폰은 게임의 후반부에 그 잠재력을 발휘한다.

지난 3월 6일(월) 고용노동부는 ‘주 최대 52시간 근로제도’로 알려진 현행 근로제도를 주 최대 69시간 근로까지 허용하는 ‘근로 시간 제도 개편 방안’을 발표했다. 개편안에 따르면 노사가 합의했을 경우 ‘주’를 기준으로 연장근로 시간을 관리하던 현재 제도를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변경할 수 있다. 또한 연장 근로했던 시간만큼 모아 장기 휴가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도’도 도입될 예정이다. 하지만 개편안이 발표되자 여론과 노동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주 69시간 근로 시간표’라는 제목으로 주6일 근무에 퇴근 이후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한 사진이 퍼졌다. 누리꾼들은 “그냥 사람 뽑기는 싫고 회사에 있는 사람들 굴리고 싶은 게 아니냐”, “당장 공무원들도 장기 휴가 가려면 좌천성 인사를 각오해야 하는데 저축 제도가 사기업에서 되겠냐”라는 반응을 보였다. 또한 개편안이 산술적으로 사흘 내내 퇴근 없이 근로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점과 야간 휴식권이 명시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는 글도 줄을 이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8일(수) 국회의사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번 개편안을 ‘노동개악’으로 규정했다. 야당 대표는 “정부 계획대로 노동시간을 살인적 수준으로 연장하면 국민에게 과로사를 강요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라며 "특히 사용자와 갑을 관계에 있는 노동자 입장에서 장기휴가 활성화 같은 그런 방안들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탁상공론이거나 아니면 국민을 기만하는 발언에 불과하다"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진보성향 변호사 단체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도 7일(화) 발표한 성명에서 “정부는 제도 지향점이 선택권과 건강권, 휴식권 보장이라고 했지만, 이번 개편안으로 늘어나는 건 사용자가 근로 시간을 부여할 선택권뿐”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만약 정부가 발표한 이번 개편안이 이대로 시행된다면, 보통의 근로자들이 연장 근로 후 장기 휴가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을까? 기자는 평소 휴가를 당연하게 사용한다는 직장인보다 당장 주어진 연차도 회사 내 분위기 때문에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사연을 훨씬 더 많이 접했다. 한 번에 여러 칸도 이동할 수 있는 ‘고용노동부’라는 퀸과 달리 ‘보통 근로자’라는 폰은 퀸이 위협한다면 앞으로 한 칸 나갈까 말까 한 하찮은 존재다.

개편안이 발표된 같은 날, 외교부는 지난 2018년 10월과 11월 대법원이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에 강제노역 피해자 15명에게 직접 배상하라고 확정판결했던 약 40억 원의 배상금을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이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판결금 재원에는 포스코 등 국내 기업이 참여할 뿐 일본 가해 기업에 구상권 청구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강제노역 피해 생존자 중 한 명인 양금덕 할머니는 7일(화) 국회의사당 앞 비상 시국선언에서 “나는 그런 돈 죽어도 안 받는다. 내가 우리나라에서 고생했느냐. 일본에 가서 고생했다”라며 정부가 발표한 피해배상 방안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이러한 피해자들의 강한 반발에도 외교부는 끝까지 판결금 변제를 수락하지 않는 경우 공탁*이 가능하다며 맞서고 있다. 이 상황에서도 강력한 ‘퀸’은 양국 정부다.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라는 ‘폰’이 끝까지 배상을 거부하더라도 결국은 지지부진한 법정 공방을 치러야 한다. 

고용노동부와 보통 근로자들, 양국 외교부와 강제노역 피해자들처럼 이 세상이라는 체스판 위에는 수많은 폰과 퀸이 있다. 기자도 그 폰 중 하나다. 이번 호 보도 취재 과정에서는 유난히 비협조적인 인터뷰이가 많았다. 이제 총 10번의 발간 중 고작 두 번째인데 3월부터 이런 일이 계속 생기니 기사에 대한 걱정으로 밤에 잠도 오질 않았다. 지난 6일(월) 시사인 대학 기자상 수상자 인터뷰에서도 비관적인 이야기만 입에서 자꾸 흘러나왔다. 아무리 노력해도 체스판 속 가장 먼저 잡히는 폰이 된 것 같아 허무했다. 그러다 문득 기억 속 ‘퀴닝’ 이 튀어나왔다. 자기보다 강력한 기물들의 위협을 물리치고, 한 칸씩 꾸준히 전진해 적진의 가장 맨 끝에 도달해 퀸이 되는 폰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렇기에 기자는 오늘도 폰이 되어 한 칸 전진하려 한다. 맨 끝 칸에서 왕관을 쓴 채 체스판을 바꿀 그날을 기대하며.

 

*공탁: 금전, 유가증권, 기타의 물품을 공탁소에 임치(任置)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때 가해자 쪽이 적절한 금액을 법원에 맡겨 합의에 최선을 다했음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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