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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과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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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 프랑스 잡지에서 1950년대의 퀴즈쇼 질문과 1990년대의 퀴즈쇼 질문을 비교 분석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50년대의 질문들에는 그리스 3대 비극작가의 이름을 묻는 것처럼 인문적 지식과 관련된 것들이 많았던 반면, 90년대의 질문들에는 마이클 잭슨의 노래 제목을 묻는 것처럼 대중문화와 관련된 것들이 많았다는 설명이 있었다. 어차피 단순 지식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 것인지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사회의 문화적 풍경이 크게 변화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텔레비전의 등장 이후 영상은 인류의 일상을 점차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했고, 문화 경험의 중심은 문자에서 영상으로 점차 이동해갔다. 이러한 변화를 겪은 20세기를 규정하는 표현들 중 하나로 ‘스크린의 시대’(레프 마노비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 조그만 요지경을 통해 등장한 동영상 스크린은, 영화(cinematographie)의 발명을 통해 대중사회의 전면에 등장했고, 오늘날에는 컴퓨터와 결합하여 우리의 삶을 점령해버렸다.

영상매체와 관련된 인문적 질문은 결국 하나로 수렴된다: “영상은 사유할 수 있는가?” 상업적 가상이 범람하는 오늘날에도 이 질문이 끈질기게 제기되고 있지만, 영화/영상이 시선의 예술이자 사유의 매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흔히 ‘고전(classic)’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식자들이 인정한 훌륭한 작품들이다. 대개 전통적인 예술작품과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는 용어지만, 사상서적이나 각종 이론서적과 관련해서도 흔하게 사용된다. 고전을 가까이하는 것이 정신적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20세기의 예술’인 영화와 관련하여 혹은 다른 종류의 영상물과 관련하여 ‘고전’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역사의 서술이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당연히 중요한 영화/영상 작품들이 있지만, 전환점을 제시하는 이 작품들에게 전통적으로 공인되어 온 고전 작품들과 동일한 무게감을 부여하려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영상의 시대에도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욱, 시청각 이미지의 가치에 대한 의심이 피어난다: “영상매체는 결국 (광의의) 스펙터클 아닌가?”

현재 인터넷에서 홍수를 이루고 있는 짧은 영상들, 유튜브의 쇼츠와 같은 영상들은 그러한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는 증거인 것처럼 보인다. 1분 내외의, 때로는 그보다 훨씬 더 짧은 영상들 속에서 재미의 요소들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그로부터 사유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짧은 영상의 범람은 초기 영화사의 현상과 아주 유사한데, 어쩌면 인류는 영상 매체의 사유 가능성을 포기하고 매체의 시작과 함께 즉시 즐길 수 있었던 기능만을 남겨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길이가 길다고 반드시 어떤 인문적 통찰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늘 비슷한 주제를 변주할 뿐인 할리우드 장르영화에서 혹은 텔레비전 장르 드라마에서 어떤 통찰을 기대할 수 있을까?  

스펙터클을 즐기는 것에 왜 시비를 거냐고 말할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스펙터클을 즐기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만 한다는 것에 있다. 스크린의 시대에 우리는 영상물에서 사유가 멸종되어 가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영상은 결국 고전의 지위를 차지할 수 없는 걸까? 영상물의 제작이 아날로그 방식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뭔가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영상물의 언어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움직이는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배치를 통해 구성된다: 공간의 배치(장면연출)와 시간의 배치(편집). 영상의 역사 속에는 이러한 형식을 통해 사유의 흔적을 보여주었던 ‘고전’ 작품들이 많이 있다. 영상 형식의 낯설음 때문에 전통적인 고전 작품들과 동렬에 놓이지 못했을 뿐이다. 영상이 사유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던 작품들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관심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오늘날에도 사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영상물들이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에릭 로메르가 말했듯이, “우리 시대의 가장 고급한 사유가 영화를 통해 표현되기를 선택”했을 수 있기에, 깊은 통찰의 흔적이 보이는 영화/영상물들을 우리는 되새김질하면서 반추해야 한다. 영화와 영상물이 ‘시선의 예술’임을, ‘시선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우리의 사유의 영역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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