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알베르 카뮈, 김화영 역, 책세상, 1991

〈논리적사고와글쓰기〉 김남미 교수가 추천하는 『페스트』: 페스트에 저항하는 의무, 성실성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87년 1월, 20대 소녀는 알베르 카뮈를 좋아했다. 카뮈는 소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거의 모든 것, 이성에 대한 믿음, 정의에 대한 신뢰, 자유에 대한 희구, 공존에 대한 당위성마저도 전복시켰는데도 소녀는 그가 주는 고차원적 고뇌에 의미부여 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하지만 시대는  소녀가 절망을 습관화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소녀는 스스로를 실존적 관념에 빠진 지적 허영 상태라 규정하고는 카뮈로부터 도망쳤고, 낙인찍힌 고뇌는 기저로 가라앉고 말았다.

2023년 1월,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제자가 와우서고의 원고를 요청했다. 거의 망설임 없이 카뮈의 『페스트』를 꺼내들었다. 이 선택에는 두 가지의 관계 맺음이 들었다. 첫째는 이제 중년이 된 아줌마는 인간의 절망과 고뇌로부터 도망친 소녀를 정면으로 대응할 용기를 가졌다는 믿음이고, 둘째는 1940년대의 가상도시 오랑과 2020년대의 지구촌을 관통하는 감염병에 대한 인간 저항의 보편성을 짚어보겠다는 호기로움이다. 기이하게도 다시 만난 『페스트』는 생각보다 명료했다. 그냥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부조리 상태에서의 인간 의무를 아주 직설적으로 정리했다.

페스트에 저항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다. 페스트는 ‘미래를 삭제하고(249쪽), 가치판단을 삭제하고(250쪽), 사랑의 에고이즘과 거기서 얻는 혜택을 상실하게(p250)하는’ 존재다. 부조리는 절망적 한계 상황으로 인간을 ‘계속되는 탈진 상태(255쪽)로 이끌어 제자리걸음(252쪽, 255쪽)’시키는 저항해야 할 병이다. 카뮈는 ‘절망에 습관이 되어버리는 것은 절망 그 자체보다 더 나쁜 것(247쪽)’임을 강조하며 페스트로 상징되는 부조리에 대한 저항은 필연적이며 의무일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의무 수행에 성실성이라는 말까지 사용했다.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224쪽)’이며 그 ‘성실성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224쪽)’이다. ‘질병이 눈앞에 있으니 그것과 싸우기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189쪽)’이다. 중요한 것은 이 의무가 온전히 개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페스트의 ‘본연의 실체는 모든 사람의 문제(189쪽)’이다. 그러니 영웅들만이 이런 의무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의무수행의 필연성을 『페스트』는 이렇게 정리한다.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175쪽)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페스트와 싸우는 것이었다. 그 진리는 찬탄 받을 만한 것은 못 되고 다만 필연적인 귀결이었다’(185쪽).

그리고 이 저항은 현실을 대면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페스트 안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함께 사랑하든가 함께 죽든가 해야지. 그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어. 그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192쪽). 1987년의 소녀는 자신이 나약하기에 카뮈에게서 도망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중년이 된 2023년 아줌마는 안다. 그때 그 소녀는 현실 바깥에서 사유하는 대신 페스트 안의 절망과 대면하는 길을 선택했고 그 안에서 저항력을 기르는 것을 의무로 삼은 것이다. 부조리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현실 안에서 병을 직시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삶은 유형무형의 페스트들에게 지지 않는 스스로의 저항력을 키우는 과정이어야 한다.

『페스트』는 우울한 소설이다. 거대한 힘 앞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하지만 『페스트』는 절망을 다루는 소설이 아니다. 우리는 눈앞의 재앙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그 재앙에 저항하는 내 안의 투지 역시 미지의 것이므로. 재앙 앞에 연대해 성실히 저항하는 의무를 놓지 않기 위해 나를 우리를 궁금해하는 것이 절망하는 일보다 더 급박한 일이지 않은가?

*부조리(Absurdity, 不條理, L’Absurde): 절망적인 한계상황을 지시하는 실존주의의 용어

정리 김세원 기자

SNS 기사보내기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

하단영역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