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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하기에, 〈동백꽃 필 무렵〉(2019)

동백꽃은 겨울에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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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필 무렵' 포스터/출처 : KBS
▲'동백꽃 필 무렵' 포스터/출처 : KBS

붉은빛의 꽃잎이 수려한 동백꽃의 개화 시기는 대략 11월 말부터 4월까지다. 동백의 동(冬)은 겨울 동자로 겨울에 피는 꽃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보통 꽃이라 하면 봄이 오는 3월부터 피어나기 시작하는데, 그런 면에서 동백꽃은 독특하다. 그리고 이 특이한 동백꽃처럼 불행하다면 불행한, 유별나다면 유별난 인생을 산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도 ‘동백’이다.

2019년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2019)는 박복한 삶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동백이의 성장 과정을 담았다. 드라마가 종영한 지 4년이 지난 지금, 기자는 동백이의 흔적을 따라 포항으로 떠났다.

▲동백이가 운영하는 '까멜리아'. 지금은 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동백이가 운영하는 '까멜리아'. 지금은 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동백이 : 내 인생은 모래밭 위 사과나무 같았다. 파도는 쉬지도 않고 달려드는데, 발밑에 뻗어 움켜쥘 흙도 팔을 뻗어 기댈 나무 한 그루가 없었다.

동백이는 8살짜리 초등학생 아들 필구가 있다. 남편은 없다. 부모도 없다. 고아에 미혼모인 데다 살인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꼬리표가 달려서 뭐만 하면 동네 사람들에게 오해와 미움을 사기 일쑤다. 그래도 동백이는 기죽지 않는다. 동백이는 술집 ‘까멜리아’를 운영하고 있다. 무려 자영업자 사장이다. 까멜리아는 포항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주말에 이곳을 방문했던 기자는 생각보다 많은 인파에 당황했지만 이내 동백이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사람이 아직 많은 것으로 생각했다. 주로 가족과 연인끼리 놀러 와 동백꽃 필 무렵 촬영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마을 골목 곳곳의 사진을 못 찍은 것이 아쉽긴 하다.

까멜리아에서 왼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동백이 집 200m’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기자는 동백이의 퇴근길을 상상해보며 까멜리아에서 곧장 동백이의 집으로 걸어갔다. 거리는 가까웠지만 경사가 생각보다 높아 금세 숨이 찼다.

▲동백이의 집으로 향하던 중 발견한 동백꽃나무
▲동백이의 집으로 향하던 중 발견한 동백꽃나무

 

동백이의 삶에 불쑥 들어온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황용식’. 불의를 보면 절대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경찰이 되어 서울로 올라가지만, 그 불같은 성격 탓에 사고를 쳐 고향인 옹산으로 좌천된다. 그 후 우연히 서점에서 처음 본 동백이에게 한눈에 반한다. 동네에서 우연히 도와준 필구가 동백이의 아들임을 알게 되지만 그건 그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용식은 이미 동백이가 아니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른 지 오래다.

용식 : 고아에 미혼모가 필구를 혼자서 저렇게 잘 키우고 자영업 사장까지 됐어요. 남 탓 안 하구요. (중략) 그런데 누가 너를 욕해요! 동백 씨, 이 동네에서요. 제일로 세고요. 제일로 강하고, 제일로 훌륭하고, 제일로 장해요!

동백이가 불꽃이라면 용식은 부채 같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온갖 편견에도 굴하지 않고 버텨온 동백이라지만 동백이도 사람이니까, 지치기 마련이다. 용식은 그런 동백이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힘을 불어넣어준다. 흔한 드라마의 백마 탄 왕자님처럼 여주인공의 삶을 극적으로 바꿔 주는 것이 아닌, 동백이가 지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용식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 하나하나가 동백이의 삶의 온도를 조금씩 높여준다. 자신조차도 편견에 갇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던 동백이지만 자신을 위해 좋은 말과 행동, 사랑을 아끼지 않는 용식에게 서서히 스며든다. 그리고 뭐든 씩씩하게 잘 해내던 동백이에게 단 한가지 서툴렀던 일. 용식으로 인해 사랑받는 법을 배우게 된다.

▲동백이의 집.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동백이의 집.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동백이네 집은 마을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눈을 돌리면 마을과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바다를 품은 채 조그만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마을. 동백이의 집에서 내려다본 동백이의 마을은 참 아름답다. 전 남자 친구 ‘종렬’이 옹산에 대해 좋게 평가한 것만으로 바로 내려와 정착했다는 게 살짝 무모하다고도 생각했는데, 동백이의 결정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 집엔 동백이와 아들 필구가 산다. 그리고 어느 날, 이곳에 한 명이 더 들어오게 된다.

동백이 : 엄마. 나는 엄마 덕분에 진짜 드럽게 못 살았어. 학교 때는 고아라고 왕따. 다 커서는 부모 없이 자란 애라고.. 나는 엄마 덕분에 재수 없는 년으로 살았지만 나 그냥 그러려니 했어.

“죽는대도 연락하지 마” 동백이가 치매에 걸린 엄마 ‘정숙’을 만나고 한 말이다. 동백이는 어린 자신을 버린 엄마가 밉다. 자신도 부모가 되어보면 이해가 될까 싶었지만, 필구를 낳고 나선 더더욱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 동백이에게 7년 3개월짜리 엄마가 찾아왔다. 사실 어려운 환경에서 자신의 아이를 고아원에 맡기는 선택은 부모에게 있어 최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어른의 입장으로 본 것이다. 부모는 아이들의 세상이다. 아이는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는 만큼, 혹은 그보다 더 부모를 사랑한다. 아마 어린 동백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동백이는 시간이 흐른 후 자신을 떠나던 날 엄마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되돌려주며 엄마를 버린다. 비록 잠시뿐이지만 말이다. 동백이에게 다시 찾아온 엄마는 그리운 불청객이 아니었을까. 다신 안 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나도 그리웠던 존재.

▲동백이의 마을 앞 바닷가.
▲동백이의 마을 앞 바닷가.

 

동백이 : 제가 진짜 계속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요, 저 이제 알겠어요.

용식 : 뭐, 뭐를요?

동백이 : 그냥 내가 만만했던 거에요! 그동안!

마을 밑 바닷가에 도착하자 짠내가 확 느껴졌다. 아마 기자는 평생을 내륙에서 살아온 데다가 바다를 본 지도 몇 년만이라 더욱 그렇게 느낀 걸지도 모른다. 바닷가 길을 따라 걸으니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귀를 가득 채운다. 파도 소리가 머릿속 상념들을 쓸어가버리는 듯했다. 이곳은 동백이가 종종 산책을 나오던 곳이다.

동백이는 일명 ‘까불이 살인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하다. 연쇄살인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데다가 범인은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나였다면 이미 옹산을 떠나 아주 먼 곳으로 갔을 텐데 동백이는 그러지 않았다. 사실 가해자와 피해자 중 떠나야 할 사람을 고른다면 가해자인 것이 당연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동백이는 도망치지 않는다. 사건 이후 몇 년이 지난 뒤 다시 까불이의 도발이 시작되지만 동백이는 절대 굴하지 않는다. 무섭긴 해도 숨지 않는다. 동백이는 동백이가 지킨다.

동백이는 한겨울에 피어난 동백꽃 같다. 척박한 환경에서 남들보다 조금 일찍 개화했지만 그 무엇보다 활짝 피어있는. 설경 속 내리는 눈을 얹은 채 피어있는 동백꽃은 그녀의 삶을 닮았다. 동백이는 앞으로도 씩씩하게, 잘 살아갈 것이다. 이제 그녀의 곁에는 필구가, 엄마가, 그리고 용식이 있다. 동백이의 삶의 희로애락은 TV 밖 시청자들에게 웃음과 감동과 위로를 동시에 전해줬다. 그리고 그녀는 말해준다. 과정의 어려움은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분명한 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 누구나 자신만의 멋진 삶을 이뤄낼 수 있다는 것. 그녀 자신의 삶이 이를 완벽하게 증명한다.

정숙 : 동백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어. 버림받은 일곱 살로 남아있지 마. 허기지지 말고 불안해 말고 훨훨 살아. 훨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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