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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을 향한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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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에 비추어, 궁극적으로 실현되고자 하는 희망을 담아 ‘이상향(理想鄕)’을 꿈꾼다. 우리는 이상향을 으레 유토피아(Utopia)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가 1516년에 라틴어로 출간한 책 제목에서 나온 말로, 어디에도 없는(Ou) 좋은 장소(Eutopia)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상향은 이 세상에 없는 장소임과 동시에 인류의 궁극적 실현 희망이 담겨있는 중의적인 단어로 이해할 수 있다.

1학년 2학기, 교양수업에서 ‘유토피아’에 관해 배우면서 스스로 상상해보는 유토피아의 모습을 과제로 제출했었다. 과제의 이전 예시를 볼 때 학생들이 생각한 유토피아는 대부분 비슷했다. 환경, 경제, 진로, 학업, 취업 등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 마련이 주된 내용이었고 필요에 따라 시설을 세우거나 없애는 등의 조치를 해야 한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조금 더 나가고 싶었다. 환경이 바뀌지 않는 것은 환경을 살아가는 인간이 그 환경에 너무 적응해서 적응된 ‘틀’을 바꾸고 싶지 않아 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통용되는 개념을 흔들어놓은 것처럼, 고정된 사회의 틀에 박혀 변하려 하지 않는 사회를 바꾸고 싶었다. 또, 불완전하기에 완전함을 꿈꾸는 유토피아를 구상하기 위해 불완전한 세상의 사회적 근간을 흔들어 깨부수고 싶었다. 태어날 때부터 강제를 통해 자유에 약간의 통제를 부여하는 것은 유토피아를 구상할 때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통제를 가하는 세상을 다룬 문학은 많지만, 그중에 말하고 싶은 것은 ‘디스토피아 문학’으로 칭해지는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1894~1963)의 『멋진 신세계』와 로이스 로리(Lois Lowry, 1937~)의 『더 기버: 기억 전달자』이다. 『멋진 신세계』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템페스트』 5막 1장에서 따온 역설적 제목으로, 기계문명과 과학의 발달이 전체주의와 만났을 때를 가정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사회 안정’이라는 목적으로 기술이 전체주의를 위해 이용돼, 대량생산의 원칙과 우생학의 개념을 응용해 제시된 배양시험관 아기와 인간 계층이 만들어진다. 반복 세뇌학습을 통해 자신의 계급이 하는 일이 자신에게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여겨지며, 소마를 통해 노화와 감정을 통제하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촉감 영화가 일상의 탈출구로 사용된다. 『멋진 신세계』에서 인간은 어떤 욕망도 충족할 수 있어 불안을 느낄 줄 모르며 수면 학습으로 인해 자유, 권리라는 개념을 전혀 모른다. 박물관을 폐쇄하고, 역사적 기념물을 파괴하고, 서적 독서 및 출간을 탄압하고, 생각을 제거하고, 과거를 삭제하고, 역사와 사고를 재편한다. 반역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세계에 균열은 일어나지 않는다. 로이스 로리의 『더 기버: 기억 전달자』에서도 비슷하게 마을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모두가 인간적인 감정 없이 획일적으로 살아간다. 모든 감정적, 신체적 기복을 통제하고, 통제되지 않는 구성원은 방출된다. 규칙적이고 정적인 생활 이외의 모든 것을 통제하기 때문에 음악도 색깔도 없는 조용한 무채색의 일과가 계속되며, 마을 사람들은 통제되기 이전의 감정을 모른 채 살아간다.

사실 두 세계는 세계에 대한 ‘반역’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행복했을 곳이다. 우리는 문학을 통해 세계를 ‘반역’한 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통제된 세상이 잘못된 세상이라는 생각을 가지기 쉽다. 전체주의 이념에 가까운 세계에서 개인을 느끼게 된 개인, 즉 ‘반역자’는 어느 한순간 자신이 통제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이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자 하고, 독자는 자신이 살던 세계와 다르게 완전히 통제되는 사회를 보고, 자연스럽게 통제를 '자유의 박탈'로만 생각하게 된다. 사실 이는 ‘통제가 주는 역설’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자유 일부를 온전히 통제할 수 있다면, 그 통제가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통제를 통해 유토피아, 이상 사회를 구상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완벽한 유토피아'는 없을 것이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이분법적인 사고로만 바라보는 것은 완벽한 희망, 이상향의 본질적인 의미가 흐려지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두 ‘이상향’ 개념의 한계를 넘어 본질에 다가서야 한다. 기존 사회에서 무시해버리기 쉬운 ‘시도’로 구성돼, 나만이 아닌 다수를 위한 세계, 유토피아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과 관점이 비록 유토피아적으로 여겨질지라도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완벽'과 '완전'을 꿈꾸기는 쉽지 않다. 인간이 늘 꿈꾸는 이상향조차 완벽한 세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알려진 이상향의 개념의 기준을 넘어서, 완전을 향한 변화를 꿈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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