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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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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푸른 점/출처: NASA
▲창백한 푸른 점/출처: NASA

 

최근 ‘문송합니다’라는 유행어가 생길 만큼 인문 계열 학과들의 위기가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대학에서 인문 계열 학과들이 사라지거나 통폐합되고 공학 계열 학과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요즘, 인문학은 정말로 실효성 없는 학문일까. IT업계의 선두자 애플(Apple)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는 “기술과 인문학이 결합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인문학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한 바 있다. 대체 무엇이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당신을 위해, 이번 주제기획에서는 ‘인문학의 필요성’을 주제로 대한민국 속 인문학의 현실과 인문학이 가야 할 방향에 대해 다룬다. 나아가, 조금 색다른 관점에서 인문학을 바라보고자 한다.

 

▲서울 소재 대학교 학과 신설·폐지 현황/출처: 강득구 의원실
▲서울 소재 대학교 학과 신설·폐지 현황/출처: 강득구 의원실

 

[인문학의 위기가 도래하다]

사전적인 정의의 인문학이란, 자연과학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주로 인간과 관련된 근원적인 문제나 사상, 문화 등을 중심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을 지칭한다. 자연과학이 객관적인 자연현상을 다루는 학문인 것에 반해 인문학은 인간의 가치와 관련된 문제를 연구의 영역으로 삼는다. 미국 국회법에 규정된 내용을 바탕으로 할 때, 인문학은 언어·언어학, 문학, 역사, 법률, 철학, 고고학, 예술사, 비평, 예술의 이론과 실천, 그리고 인간을 내용으로 하는 학문을 일컫는다.

과거 인문학은 국가 차원에서 중시하는 학문이었다. 대표적인 예시로 세종대왕은 효 사상과 유교적 예법을 담은 『삼강행실도』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배포했고, 최고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는 인간과 사회의 심리, 도덕 등을 논하는 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은 인문학의 ‘성행’과 ‘위기’라는 이원적 구조가 나타나고 있다. 인문학 강연, 도서 등 인문학 관련 사회적·교육적인 활동들은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인문 계열 전공자들의 취업난, 대학 내 인문 계열 학과의 폐지 및 통폐합 등 인문학의 심각한 위기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강득구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 받아 공개한 ‘서울 소재 대학 학과 통폐합 현황’에 따르면, 지난 3년 간 서울 소재 대학 중 17개의 인문·사회 계열 학과가 폐지된 대신 23개의 공학 계열 학과가 신설된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인문학은 순수 학문의 영역에 머무르면서 현실과 다소 괴리감이 있다는 오해를 받고 있다. 이는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문과 계통 전공자의 취업난과도 무관하지 않다. 결국 대중들에게 인문학은 인간의 실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어렵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이공계 낮게 평가되거나 실효성 없는 학문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이처럼 대한민국에 ‘인문학의 위기’가 도래한 지는 꽤 오래됐다. 1996년 11월 국공립대 인문대학 학장들이 발표한 ‘인문학 제주 선언’, 2001년대 국공립대 인문대학 협의회의 ‘2001 인문학 선언’, 2006년 9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들이 발표한 ‘인문학 선언문’과 80여 개 대학의 인문대학 학장들이 발표한 ‘오늘의 인문학을 위한 우리의 제언’ 등을 통해 대한민국 인문학의 위축과 관련된 문제 의식이 꾸준히 제기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선언 발표 이후 교육부는 인문학 부흥을 위한 인문한국지원사업을 시작했고, 문화체육관광부의 주도로 다양한 인문학 대중화 사업이 진행됐다. 즉, 인문학을 대중화하는 과정이 곧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하는 방안으로 자리 잡았고 여러 영역에 인문학이 접목되기 시작했다. 이런 인문학의 대중화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긴 했지만, 일각에서는 인문학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거나 오히려 인문학의 정체성을 잃게 됐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이공계과 인문학의 관계]

그동안 인문학은 실효성 없는 학문으로 굳이 시간을 내서 배울 필요가 없다는 오해를 받아 왔다. 특히 인문 계열 학과가 사라지고 공학 계열의 학과가 신설되는 등, 과학과 수학 등을 탐구하는 이과 계열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인문학의 필요성, 나아가 이공계와 인문학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공계 대학생에게 인문학이란

본지에서는 이공계 전공생들이 생각하는 인문학의 필요성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이공계 대학생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도시공학과에 재학 중인 A씨는 “도시는 사람이 사는 곳이다. 따라서 전공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공학적 설계보다도 사회적 배경을 기반으로 한 미적·인문학적 설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라고 답했다. 게임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는 B씨는 “생각의 깊이에 따라 만드는 게임의 깊이도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깊이 있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선 문학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한편, 전자·전기 공학부에 재학 중인 C씨는 “사람과 관련해서가 아닌, 전공으로만 따진다면 필요하지 않다. 기술이나 시스템적으로 이공계열의 학문이 인문학에 기여하는 바가 있을진 몰라도 반대는 없다고 생각한다.”라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인터뷰 내용을 종합적으로 볼 때, 이공계열 중에서도 도시공학, 게임 등 사람과 밀접하게 관련된 전공일수록 인문학의 필요성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이공계열 학문 자체만을 따졌을 땐 인문학은 필요 없을 것이란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공 계열 학문 그 자체에는 인문학이 필요 없다.”라는 인식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통념일지 모른다. 다만, 여기까지는 대학에 재학중인 학생들의 의견이다. 실무자들의 생각은 어떨까.  

기계·시스템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현대자동차 연구원 D씨는 인문학의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 “매우 필요하다. 기계를 다룰지라도 이를 운용하는 건 사람이다. 고객에 대한 이해 없이는 무엇도 할 수 없다.”라는 입장을 보였다. 박솔휘(컴퓨터공학15) 게임프로그래머는 “게임 프로그래밍은 이공계 범위에 속하지만 산출되는 게임은 인간의 문화와 큰 영향을 주고받는다. 인문학만으로 게임을 만들 순 없으나, 좋은 게임은 인문학이 기반이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넥슨 밸런스디자인팀 박석희(컴퓨터공학18) 게임기획자는 “데이터를 많이 다루는 직업이기에 인문학보단 컴퓨터를 다루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다만 게임기획자는 자신의 생각을 문서화 시키는 능력이 필수이기에 인문학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이처럼 이공 계열을 졸업하고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이들은 인문학의 중요성을 높이 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렇다면 기초과학에는 인문학이 필요 없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다음 과학자들의 사례를 통해 기초과학과 인문학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왼쪽부터)아인슈타인, 슈뢰딩거, 보어
▲(왼쪽부터)아인슈타인, 슈뢰딩거, 보어

 

인문학과 과학자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 ~1955)의 「특수 상대성 이론(Special theory of relativity)」은 20세기 과학계 최고의 성과로 불리는데, 이러한 생각을 가능케 한 배경에는 ‘철학’이 있었다. 영국 에든버러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 교수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의 미공개 편지를 통해 그가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의 저서 『인간의 본성』을 즐겨 읽은 것을 알 수 있다. 해당 책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이 담긴 책으로, 물리학계에선 흄의 『인간의 본성』이 아니었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평가했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과학자와 철학자와의 모임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며 다양한 철학책과 문학작품을 읽고 토론하기도 했다. 이처럼 아인슈타인이 가져온 과학적 성과는 철학적 사고가 바탕이 되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인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 1934 ~1996)은 시카고 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서 인문학 학사 과정을 수료했다. 또한 ‘보이저 계획(Voyager Project)’에 참여했던 그는 몇몇 과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태양계 끝에서 지구의 모습을 촬영하는 데 성공한다. 보이저 1호가 찍어온 티끌만한 지구를, 칼 세이건은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칭하며 자신의 저서 『창백한 푸른점』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 행성은 우주의 어둠에 둘러싸인 외로운 티끌 하나에 불과하다. 이 광막한 우주 공간 속에서 우리의 미천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는 데 외부에서 도움의 손길이 뻗어올 징조는 하나도 없다.”

칼 세이건은 ‘창백한 푸른점’을 통해 인류의 거만함과 미천함, 역사 속 끊임없는 유혈 다툼과 혐오 등의 무의미에 대해 강조하며 이 작은 행성에서 살아갈 앞으로의 우리 삶에 대해 고찰하게 한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땐 별 볼일 없는 사진일지라도 인문학적인 관점에선 큰 의미를 가진다. 이건 인문학적인 관점으로 과학을 바라봤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인슈타인과 칼 세이건 등 해당 과학자들의 사례들은 인문학이 결국 모든 학문에서 필요한 것임을 시사한다.

 

▲서점의 인문학 코너/출처: MoneyS
▲서점의 인문학 코너/출처: MoneyS

 

[인문학을 바라보는 자세]

미국의 세인트존스 칼리지(Saint John’s College)에는 전공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학생들은 동일한 교육과정을 따라 4년 동안 총 200여 권의 고전을 읽고 토론하며 에세이를 쓴다. 세인트존스 칼리지의 총장은 “고대 그리스에서 수사학과 수학을 함께 배웠듯이 교양 교육은 인문학과 과학이 만나는 연결 지점을 탐구하는 것”이라며 인문학과 과학의 연계를 강조했다. 프랑스의 대학 입학시험인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는 철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예술은 인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와 같은 주제에 대한 논술을 쓰게 한다. 학생이 해당 주제에 대해 얼마나 고민했고, 자신의 생각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또한 2021년 기준 의학, 물리, 화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37명 배출한 막스플랑크 협회(Max-Planck-Gesellschaft)는 주로 자연과학 위주의 학문을 연구하나 인류학과 같은 인문학을 연구하는 연구소도 함께 두어 연구자들끼리 자유롭게 교류하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외국에선 인문학에 중점을 둔 교육·연구 환경을 조성하는 등 한국에 비해 더욱 체계적인 방식으로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본지에서는 인문학의 필요성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을 듣기 위해 본교에서 <서양철학입문> 강의를 담당하는 윤병렬 교수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윤 교수는 인문학과 실생활의 연관에 관한 질문에 “실생활과 가장 깊이 연관돼 있는 것이 인문학이다. 우리의 일상은 끊임없는 타자와의 만남과 교류이기에 인문학적 지식이 꼭 필요하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면 훌륭한 리더십은 나오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또한 “오늘날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으며 이건 일시적인 흐름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인문학이 빈약하다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라며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윤 교수는 국가 차원의 인문학 교육 사업 지원이 필요한 때라고 덧붙였다. 

1940년 폴란드군의 장교로 전쟁에 참여한 화가이자 작가인 유제프 차프스키(Jozef Czapski, 1896~1993)는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 그라조베츠 수용소로 이송된다. 그곳에서 차프스키를 포함한 포로들은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전공 분야를 살린 강의를 하며 서로에게 지적 자극을 줬다. 이때 차프스키는 프랑스의 대문호인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주제로 강연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인문학을 활용했다. 즉, 인문학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인간의 삶에 밀접한 학문이 있을까.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학문인 인문학. 현재 대한민국에서 인문학의 필요성이 과소평가 되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래도 인문학이 여전히 필요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인문학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과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참고문헌]

신동순. 한국의 인문학 위기와 인문학의 대중화 담론 일고. 한중인문학포럼 발표논문집. 2015. 272-280.

칼 세이건. 현정준 옮김. 「우리는 여기에 있다」. 『창백한 푸른점(PALE BLUE DOT)』 민음사. 1996. (21~27)

 

이지원 기자(easyone001@g.hongik.ac.kr)

장혁재 기자(dooary123@g.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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