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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원근법(遠近法 perspective): 시각이라는 감각의 기하학적 환원

디자인을 둘러싼 질서에 관한 몇 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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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이 아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인간은 오랜 역사 속에서 다섯 가지 감각 중 특히 시각에 특권을 부여했다. ‘윤리적 보편자는 정신의 눈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초기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러한 생각의 근원은 이후 르네상스, 인쇄술의 발명, 현대과학, 예술, 디자인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데카르트(Rene Descartes)에게 진실은 ‘변함없는 정신의 응시에 의해 구별되는, 뚜렷하고 분명하게 구별되는 관념’이었고, 베이컨(Francis Bacon)에게는 관찰과 시각을 통해 얻은 지식만이 객관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1) 이러한 시각중심주의(ocularcentrism)적 사고는 시각적 은유가 실재에 관한 인식을 제공한다고 믿으면서도, 참된 세계를 인식하는 기관은 오직 정신의 눈이고, 육체의 시각은 환영의 세계만을 보여줄 뿐이라고 보았다.(2)  

시각에 관한 이러한 관념은 정신의 시각과 육체의 시각을 분리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 시각을 ‘절대적 이데아(신)의 눈’과 ‘그 눈을 대신할 권리를 부여받은 인간 정신을 통한 눈’, 그리고 ‘물리적인 육체의 눈’으로 구분한 것이다. 서로 다른 것을 대비, 대립해야만 의미와 가치가 생산되기 때문에 인간은 늘 이렇게 새로운 혼돈의 영역을 범주화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이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도 이런 구분과 범주화의 습성을 유전 받았다. 하지만 명확한 범주로 구분되지 않고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는 영역은 늘 존재한다.(3)   

육체의 시각을 균일한 수학적 세계로 환원할 수 있는 계기는 데카르트가 본격적으로 제공했다. 그는 공간과 물질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에게 물질의 본성은 연장(延長)이다. 물질이 연장된 부분 역시 물질이 점유한 공간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장된 부분은 물질의 속성일 뿐이므로 공간도 개별 사물이 존재하듯 물질로 존재한다. 공간을 그냥 텅 빈 존재가 아닌 미립자라 불리는 최소의 물질 입자로 가득 찬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공간은 분할 가능한 것이고, 공간의 연장 가능성이란 다시 말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미립자의 분할 가능성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연장된 물질 공간은 기하학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방법이 유클리드 기하학(Euclidean Geometry)이다. 그는 이것을 공간의 중요한 특징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공간을 수학적으로 기술하기 위해 3차원 직교좌표계, 소위 데카르트 좌표계( Cartesian Coordinate)라는 것을 제안함으로써 연장된 물질 공간을 실체화 할 수 있는 수학적 인식 틀을 제시했다.(4)

The History of Perspective: Perspective (그림 출처:  http://www.essentialvermeer.com/technique/perspective/history.html, 2023.03.05)
The History of Perspective: Perspective (그림 출처:  http://www.essentialvermeer.com/technique/perspective/history.html, 2023.03.05)

 

이러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적 방식은 16세기 초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된 원근법의 지배 아래 놓인다. 원근법은 모든 것을 관찰자의 눈으로 집중해서 보는 태도이자 전략이다. 버저(John Berger)는 원근법이 현실의 모든 이미지를 신과는 달리 한 시간에 한 장소에 밖에 있을 수 없는 한 사람의 관찰자를 주장하기 위해 구조화했다고 주장했다.(5)

이처럼 원근법은 모든 것을 무한의 소실점을 기준으로 하나의 시각으로 수렴되게 만든다. 가시적 세계는 마치 우주가 처음부터 하나의 절대자를 위해 마련된 것처럼 하나의 관찰자를 향해 놓인다. 이런 구조에서 상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절대성은 애초에 타자와의 관계 안에 있을 이유가 없다. 신은 그 자신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Agents of Change: Camera Obscura (그림 출처:   https://magazine.artland.com/agents-of-change-camera-obscura, 2023.03.08)
Agents of Change: Camera Obscura (그림 출처:   https://magazine.artland.com/agents-of-change-camera-obscura, 2023.03.08)

 

카메라의 등장은 시각에 관한 이러한 관념에 힘을 더한다. “카메라는 실재로부터 대상을 분리함으로써 모든 이미지에 시간이 없다는 관념을 깨뜨린다. 다시 말해, 시간의 경과라는 관념을 시각적 체험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6) 이렇게 카메라는 시각에 관한 데카르트적 관념을 더 굳건하게 만들었다. 카메라의 조리개는 하나의 수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지점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기호의 축적과 조합을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카메라는 관찰 주체의 위치를 공간적으로 시각화하여, 이를 자연의 외부 평면으로부터 추론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법칙을 바탕으로 신의 눈으로 세상을 향하는 관점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모든 관점을 하나로 관찰자의 시각으로 통일한다.(7)

베르그손(Henri-Louis Bergson)은 사물들을 필연적으로 공간화해서 사유하는 실증과학에 문제를 제기했다. 즉, 실증과학은 공간적인 것을 정확하게 잴 수 있고 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믿고, 대상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수학 법칙에 따라 규정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실증과학은 공간을 지배하는 기하학적 법칙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고, 이것을 사물의 존재 바탕에 이르는 모든 것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8)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환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데카르트와 이를 토대로 한 원근법에 따른 시각의 통일, 그리고 카메라의 발명으로 인한 시각과 시공간에 관한 논리적 귀결에 이르기까지 정신의 시각과 육체의 시각을 분리하여 육체의 시각이 가진 감각 기관으로서의 주관성을 배제하고, 이것을 기계 장치의 일부로 환원하려는 인식론적 전통은 실재 세계를 재현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한편, 디자인은 근대 산업이 태동하던 18세기 이후 예술과 새로운 급진적 제조 형식이 낳은 산물이다. 유럽에 이어 1920년대 전후 경제적 호황을 맞은 북미 대륙을 중심으로 혁신적 생산 방식이 보편화하고 이로 인해 소비가 촉진되는 과정에서 디자인은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 최전선에 인쇄 광고가 있었고, 이에 종사하게 된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근대적 의미의 시각(그래픽)디자이너가 탄생했다.(9) 이후 마케팅은 다수에게 발송되는 엄청난 광고 미디어의 힘에 편승하여 소비자의 욕구를 이미지화했다. 좋은 디자인은 가공된 무형의 브랜드 이미지로 자본의 확장에 기여할 수 있어야만 했다. 점점 더 정교해진 마케팅은 다양한 매체를 동원하여 순환 전략과 기법을 동원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다. 자금의 회수를 위해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측할 수 있도록 계량화된 시스템이었다. 디자인은 점점 더 감각에 의존한 창조 과정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면서 추론과 데이터에 의존한 논리에 더 많은 신뢰를 부여했다.

문제는 이러한 관념과 시스템이 자연과학이 그랬던 것처럼 디자인 대상을 임의로 선택하고 조작한다는 데 있다. 이렇게 될 때 디자인은 자기 자신의 얼굴과 자기 자신의 가정만을 보게 된다. 디자인의 대상이 타인이 아닌 디자인 자신이 되는 것이다. 디자인이 디자인 대상을 스스로 선정하는 순간 디자인은 객관적으로 대상을 본다는 착각 속에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보게 된다. 오늘날 시장에서 마케팅의 성공이 더는 제품의 질을 보증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한 장소와 한순간에만 존재하는 하나의 관찰자가 현실의 모든 이미지를 한 가지 방법으로 바라보게 한 원근법이라는 근대적 전략.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디자인을 통해 부단히 좇아야 하는 잠재적 창의성을 여전히 굳건하게 가로막는 많은 뿌리 깊은 장벽 중 하나는 아닐까?

 

 

(1) Georgia Warnke (1993) Ocularcentrism and Social Criticism in Modernity and the hegemony of vision, (ed. David Michael Levin), 1993, pp.187

(2) 정성철 (2006) ‘시각의 헤게모니 속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연구소, Visual vol.3, p.7

(3) Baudrillard, 하태환, Ibid., p.22, 역자주 18: 이성은 자의적 기준에 의해 덩어리를 구획하여 범주화하는 습성을 가졌다. 합리-비합리, 선-악, 참-거짓 등, 이성은 언제나 사회적 도덕적 범주를 정하여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원래 논리(logos)와 말씀(parole)은 신의 상징이다. 태초의 대혼돈은 신의 섭리에 따라 말씀에 의해 하나하나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의 이성은 신의 이성이며 그를 모델로 신적 순수 상태를 지향한다. 때문에 이성은 언제나 구별과 차등에 의해서만 자신을 확보할 수 있다. 

(4) 서양철학회 역 『서양근대철학의 열 가지 쟁점』 서양철학회, 창비, 2004, pp.37-38, Dalia Judovitz (1993) Representation and Technology in Descartes in Modernity and the hegemony of vision, (ed. David Michael Levin), 1993, pp.63-86  

(5) John Berger (1972) Ways of Seeing, 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 and Penguin Book, p.16

(6) Ibid., p.18

(7) Jonathan Crary (1992) Chapter2: The Camera Obscura and Its Subject, Techniques of the Observer: On Vision and Modernity in the 19th Century, An October Book, MIT Press, pp.25-66 

(8) 조현수 (2007) ‘베르그손 철학에서 시간과 공간의 관계와 형이상학의 과제: 베르그손 철학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시론(1), 철학, Vol.91

(9) Penny Sparke (2013) An Introduction to Design and Culture: 1900 to the Present 『디자인의 탄생』 이희명 옮김, 안그라픽스 2013,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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