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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학(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시각디자인전공 부교수)

디자인을 둘러싼 질서에 관한 몇 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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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문자성(文字性 literacy): 문자언어에 관한 오랜 편견     

'언어'는 '소리(말)'에 해당하는 음성언어(音聲言語)와 '글자(letter)'에 해당하는 문자언어(文字言語)로 구분된다. 그런데 서구 형이상학의 오랜 역사 속에서 문자언어는 음성언어를 억압하는 필요악으로 인식되었다. 문자는 기록의 역할을 넘어 음성언어의 자율성을 방해하고 찬탈(usurpation)하는 매우 사악한 존재였다. 예를 들어, 중세 필사본은 그리스, 로마의 멸망과 함께 사라지는 종교 지식과 학문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값비싼 비용과 시간을 들여가며 수백 마리 분량의 양피지를 들여 필사본으로 제작되었다.(1) 이 과정에서 서구 형이상학을 관통하는 로고스 중심주의의 큰 줄기 속 문자언어는 절대자로 존재하는 성스러운 신의 오성과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인간 정신을 대변하는 충실한 재현(再現, representation)의 도구   였다.  

데리다(Jaques Derrida, 1930 ~2004)는 『그라마톨로지(De la Grammatologie)』에서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해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레비스트로스(C. Levi-Strauss, 1908~2009)에 이르기까지 문자언어에 대한 억압의 역사를 추적하며 음성을 대리하는 대리 보충으로부터 문자의 권위 복권을 시도했다. 이 추적이 단지 음성언어의 우월함에 맞서는 문자언어의 권리 복원 시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언어, 철학, 문학을 비롯한 모든 사상이 '문자'의 문맥 속에서 생겨날 수 있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2)

이를테면, 루소에게 사람의 기억을 문자로 기록한다는 것은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회상을 연결하는 인간의 생생한 감각을 상실하게 하는 위험한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사람에게 읽히기 위한 목적으로 『고백록(告白錄, Les Confessions)』을 서술해야 했고, 자신의 정확한 회상이 문자에 의해 왜곡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했다. 말하자면 루소는 두 가지 명제 사이에 사로잡혔다. 루소 자신도 문자라는 위험한 대리보충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경험을 진정하게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한 것이다. 형이상학은 이처럼 대립을 조작하고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전략으로 스스로를 근거 짓는 가치를 훼손하는 모든 것들을 억압해야만 했다. 

한편, 소쉬르는 『일반언어학』에서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는 두 개의 구별되는 기호 체계이며, 문자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음성을 표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언어적 문체는 쓰인 낱말과 발음된 낱말의 결합으로 정의되지 않기 때문에 발음된 낱말만으로도 언어적 문체를 구성할 수 있기에 쓰인 낱말은 결국 발음된 낱말의 영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두 가지가 너무 밀접하게 섞여 있어 결국 쓰인 낱말이 발음된 낱말의 주된 역할을 빼앗아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음성에 대한 표기인 문자를 음성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모순을 만들게 되며,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해 그 사람의 실물을 보는 것보다 사진을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소쉬르는 문자는 파괴의 속성을 가진 것, 순수한 음성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사건의 한 가지 표현 방식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았다. 소쉬르는 문자에 관한 이런 생각을 ‘음성을 위협하는 폭력의 근원'으로 묘사했다. 문자는 과학과 예술에 그 거처를 정하기 때문에 과학과 예술의 진보는 망각을 영속화하고 풍속을 타락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문학은 문자에 과분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증폭시켰으며, 이러한 이유로 문학은 자기의 권리도 아닌 중요성을 부당하게 가로챈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는 문자의 횡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대중에게 압도적으로 부각되어 음성언어에 영향을 주고 이를 변경시키는데, 이러한 현상은 쓰인 문헌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문학에서 주로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이 경우 시각적 영상이 잘못된 발음을 만들어내는 병적인 현상을 빚어낸다는 것이다.(3)

레비스트로스는 유럽의 계몽주의와 문화적 우월성을 가진 서구의    관찰자로서 '원시 자연 문화'를 탐구하면서 동시에 이를 관찰자의 시점으로 파괴한다는 죄의식을 갖기도 했다. 다시 말해, 관찰자의 시선으로 대상을 분석하면서 동시에 유럽인의 뻔뻔스러운 확장주의 때문에 위협당하는 문화권에 일종의 동정을 갖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원시부족의 신화, 관습, 친족 제도, 기타 집단 표상을 다루는 그의 논의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슬픈 열대』 26장 「직선에 대하여」에서 '남비크와라족'을 대상으로 한 관찰을 통해 고유 명사와 문자의 폭력성에 관해 서술한 그는 문자가 이들에게 비난과 고발의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그 폭력성을 비판한다. 

“남비크와라족의 연구가 아무리 쉽다 하더라도 언어의 이유로 그 작업은 복잡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고유 명사의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 직계 사람들의 관례를 따라야만 했다. 즉 그들을 지칭하는 데 쓰이는 차용 명사로 원주민들을 맞닥뜨려야 했다. 줄리오(Julio), 호세 마리아(Jose Maria), 루이자(Luiza) 따위의 포르투갈 이름이 있다고 치자. 또 토끼(Lebre), 설탕(Assucar) 같은 별명이 있다고 치자. 나는 롱동(Rondon) 장군이나 그 친구 중 한 명이 대체로 잔털이 없이 매끄러운 피부를 가진 인디언들 사이에서는 희귀한 턱수염 때문에 카베낙(Cavaiggnac)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안다. 내가 어린이들과 놀던 날 그중 한 여자아이가 자기 친구에게 얻어맞고는 내 곁으로 도망쳐 왔다. 그러고는 아주 이상야릇하게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내 귀에다 대고 중얼거리기 시작해서 나는 여러 번 이야기를 반복했는데, 그동안 그 여자아이의 맞수가 잔꾀를 부려서 화난 얼굴로 비장의 비밀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발설하기 위해 다가왔다. 그 아이의 망설임과 나의 몇 가지 물음이 오고 가는 사이에 그 일의 진상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처음 내게 온 계집아이는 복수를 하기 위해, 적의 이름을 내게 말하기 위해 온 것이고, 이 아이는 때린 아이가 그것을 알아차린 후에 보복이라는 명목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발설했다. 이 순간부터, 비록 약간 경박한 일이지만, 나는 아이들을 서로 자극해 그 아이들의 이름을 쉽게 알아냈다. 그런 후에 아이들은 자기네끼리 수군대더니 별 어려움 없이 나에게 어른들의 이름까지 일러주었다. 어른들이 우리의 비밀스러운 모임을 알아차리자 아이들은 호되게 야단맞았고 나는 더 이상 정보를 알아낼 수 없었다.”(4) 데리다는 레비스트로스가 사용한 고유 명사라는 명칭 그 자체에 관한 인식을 문제 삼는다. 다시 말해, 남비크와라족에게 고유 명사라는 공동체 속 규율이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위반하는 행위가 성립될 수 없고, 그것이 적에 대한 복수의 방법으로서 만족감을 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즉, 레비스트로스가 고유 명사라고 명시한 문자의 사용은 신뢰라는 전통에 폭력을 가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문화 속에 질서로 존재해왔던 자율 기호라는 것이다. 결국 문자에 대한 무시와 무지는 이렇게 부당한 개념을 현실화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자기 자신의 충만함과 현전(現前, presence)을 꿈꾸며, 음성언어의 바깥으로 문자언어를 몰아내면서, 로만 알파벳이 아닌 문자에 대해서는 문자라는 명분조차 주기를 거절한다. 이처럼 서구 형이상학의 인식론적 전통은 절대 가치로 상정된 것들에 대항하는 일체의 가치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음성언어'라는 절대 가치의 반대편에 '문자언어'라는 낮고 보잘것없는 가치를 상정해왔다. 그리고 이런 뿌리 깊은 로고스 중심주의 전통은 쿠텐베르크 이후에도 여전히 문자를 현전의 충실한 모방 도구로 바라보는 태도로 여전히 이어져왔다.

그림1 구텐베르크 42행성경 종교유산 (그림 출처: 네이버 유용한 정보 (2023.0327)
그림1 구텐베르크 42행성경 종교유산 (그림 출처: 네이버 유용한 정보 (2023.0327)

 

옹(Walter Jackson Ong, 1912 ~2003)은 일체의 주의, 학파를 대상으로 삼는 태도를 배제하며 소쉬르 언어학의 편리함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구술 양식에 뿌리박은 사고방식과 문자 양식에 뿌리 하는 방식 간의 뚜렷한 차이를 알아차리는 것은 언제나 언어학이 아니라 문학이었으며, 쓰기는 의식을 재구조화하고, 문자는 곧 음성을 공간 속에 시각화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플루서(Vilem Flusser, 1920  ~1991)는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기원전 300년에서 2000년대 사이에 인간은 이미 구텐베르크적 의미의 책을 인쇄할 수 있는 모든 기술적 전제조건의 바탕 즉, 인쇄를 위한 먹, 평평한 종이, 또한 금속의 형(形)을 만들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인쇄하지 않은 이유는 문자 기호들을 점토판에 표시할 때 인간 스스로 유형화될 수 있는 활자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형화’에 관한 사고가 인간의 의식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구텐베르크는 문자언어의 역사에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했지만, 이런 이유로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어쩌면 인쇄술 그 자체라기보다는 문자로 유형화된 활자들의 발견일 것이다.(5) 미디어와 확장과 더불어 방대한 분량의 문자 정보 데이터가 유형화된 활자들이 만들어내는 창의성을 대체하기 시작한 지금, 문자를 음성의 외곽으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음성과의 관계에서 바라보는 일, 그리고 문자를 다양한 미디어의 외부 환경에 노출함으로써 그 확장 가능성을 열어 주는 일이 필요한 지금. 옹의 ’문자성(文字性, literacy)'(6)을 다시 한번 소환하여 이를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다시 고민할 시점이 아닐까?

그림 > OpenAI 메인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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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 A. Meggs Phillip 편집부, 그래픽디자인의 역사(History of Graphic Design), 서울: 디자인하우스, 1992, pp.71-75

(2) N. Christopher, 이종인, 데리다(Jaques Derrida), 서울: 시공사, 1999, p.29

(3) D. Jaques, 김성도, 그라마톨로지(De la Grammatologie), 서울: 민음사, 1996, p.67

(4) L. S. Claude, 박옥줄,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 서울: 한길사, 1998, pp.507-508

(5) F. Vilem, 윤종석,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Die Schrift: Hat Schreiben Zukunft), 서울: 문예출판사, 1996, pp.94-95, pp.99-100

(6) W. J. Ong, 이기우, 임명진, 구술문화와 문자문화(Orality and Literacy), 서울: 문예출판사, 1995, pp.3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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