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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한 발짝 더, '아무도 없는 곳'(2019)

남겨진 이들의 쓸쓸한 발자취를 따라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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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없는 곳(2019)' 포스터
▲ '아무도 없는 곳(2019)' 포스터

 

김종관 감독의 <아무도 없는 곳>은 7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소설가 ‘창석’이 총 5개의 에피소드에서 5곳의 장소와 5명의 인물을 들여다보는 영화다. 창석은 자신이 발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누군가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그런 창석에게 작중에서 아무도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김종관 감독이 『씨네 21』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제목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해 “반어적인 의미가 담긴 제목이다. 사람들이 제목을 보고 여러 의문점을 떠올릴 수 있었으면 한다.”라고 답한 이유다. 창석과 그와 대화를 나누는 모든 인물은 영화 내내 ‘상실’을 읊조린다.

 

미영 : “누구…? 누구세요?”

창석 : “안녕하세요. 제가 여기서  누구를 기다리고 있어서요.”*

미영 : “누군데 누구를.”

(중략)

창석 : “뵙기로 한 분이 여기 있는데? 미영 씨랑 여기서 뵙기로 한 사람입니다.”

미영 : “아…!”

 

‘미영’은 창석의 어머니로 치매를 앓고 있다. 따라서 현재 미영은 스스로를 수십 년 전의 미영으로, 창석을 현재는 죽은 남편이자 선을 보기로 한 상대로 인식하고 있다. 재미없고 지루하다며 창석에게 미운 말을 하지만 창석은 별다른 대꾸 없이 어머니께 집중한다.  정신이 든 미영은 자신이 언제 치매가 있었냐는 듯 ‘나이 듦’에 대해 이야기 한다.

 

미영 : “애기야 사람이 늙으면 별 수 없어. 죽거나 고장나는 거지. 여긴 별로 바뀐 게 없다. 다행이야.”

 

을지로3가역 지하에 위치한 ‘시티커피’는 첫 에피소드의 배경으로, 창석과 미영이 대화를 나누는 장소다. 4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킨 커피숍으로, 미영의 표현대로 별로 바뀐 게 없다. 앉으면 엉덩이가 푹 꺼지는 낡은 의자, 오래된 커피머신. 기자는 2,000원짜리 ‘스페샬 커피’를 주문하고 영화 속 미영이 앉았던 자리를 찾았다. 그렇게 앉아 가만히 주위를 둘러봤을 때, 비록 아무도 없었지만 영화 속 카페를 이용하는 노인들의 모습이 영사됐다. 그들은 홀로 신문을 읽거나 바둑을 둔다.

▲시티커피
▲시티커피

 

창석은 장소를 옮겨 대학 후배이자 출판사에 다니는 ‘유진’을 만난다. 창석의 소설과 관련한 공·사적 대화를 넘나드는 둘의 대화는 형식 없이 자유로워, 듣는 이를 즐겁게 한다. 느지막한 오후, 유진은 전 애인이 피우던 담배를 물고 담담하게 자신의 낙태사실을 알린다. 비록 큰 상실을 경험했음에도 유진의 목소리에는 힘이 남아있고, 무너지지 않고 계속 살아가려는 노력이 보인다.

 

유진 : “얼마 전에 애를 가진 적이 있었어요. 용기가 안 나서 지웠어요. 남자친구가 유학생이었는데 지웠다니까 이해하더군요.”

 

보따리 취재는 총 이틀간 진행됐는데, 유진과 대화를 나누는 장소인 경희궁은 특별히 두 날 모두 방문했다. 첫날은 도착했을 때부터 달이 머리 꼭대기에 떠 있었기에 앞을 제대로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경희궁 안에는 전통을 지키려는 의도인지 가로등이 몇 개 없기 때문이다. 경희궁을 지키는 흥화문을 거쳐 앞으로 가다보면 가파른 돌계단을 만나게 된다. 촬영지가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른 채 마냥 걸었다. 그렇게 경희궁에서도 가장 안쪽, 궁궐 뒤 공터에 다다르니 그곳이 촬영지였다. 셔터음을 듣기 위해 버튼을 눌렀지만 고대하던 찰칵 소리는 나지 않았다. 풍경을 담을 빛이 부족해서였다. 결국 다음날 재방문해 영화 속 앵글과 똑같은 사진을 얻어냈다.

▲경희궁 뒷길
▲경희궁 뒷길

 

석호 : “창석씨, 나 실은 정말 신기한 일이 있어요.”

 

창석의 들어줌엔 끝이 없으리. 카페에서 조용히 책을 읽던 창석에게 불현듯 ‘석호’가 찾아온다. 계획된 만남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만난 석호에게 창석은 합석을 권한다. 어렵게 구했다며 청산가리를 꺼내는 석호. 청산가리 한 스푼을 자신의 커피에 넣으며 아내가 아파 인생이 많이 힘들다고 토로한다. 창석은 이번에도 경청한다. 석호는 우연히 만난 스님이 아내를 치료하라고 준 마법의 약수와 실제로 상태가 호전된 아내의 이야기, 그리고 오늘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이 있는데 그가 귀인일 거라는 이야기까지 늘어놓는다. 자신이 석호의 귀인이라는 말에 창석은 조용히 웃는다. 석호가 잠시 전화를 받으러 나가있는 동안 창석은 테이블에 놓인 청산가리를 챙긴다. 돌아온 석호는 아내가 죽어서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말한다. 

보따리의 작품 선정에 있어서 고려할 것 중 하나는 촬영지 정보가 공개돼있어 기자가 헤매지 않고 취재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아무도 없는 곳>의 경우 그러한 작품은 아니었다. 감독의 촬영지 관련 인터뷰로 파악한 장소는 두 군데가 전부였다. 따라서 영화 속 배경을 참고해 촬영지를 대략적으로 유추해야 했던 경우도 있었고, 아예 백지상태인 중요 장소도 있었다. 석호와의 대화 장소는 전자의 경우로, 결국 촬영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주은’과 대화를 나누는 바(BAR)는 후자에 해당한다. 온갖 검색엔진을 사용해도 바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했기에 기자는 몸으로 뛰어 촬영지를 찾아야 했지만, 놀랍게도 운 좋게 발견해냈다. 하지만  그 바를 찾아간 날 하필 휴무였고, 당시 휴무인 점을 이용해 어느 강연자가 강연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결국 내부 사진은 찍을 수 없었다.

 

▲사바하
▲사바하

종로구의 바 ‘사바하’는 주은이 일하는 장소로, 창석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 교통사고로 기억을 상실한 경험이 있는 주은은 손님들에게 술 한 잔을 주는 게임을 한다. 믿을 수밖에 없는 기억을 들으면 공짜로 술을 주는 구조다. 소설가 창석은 지어낸 이야기인지, 직접 겪은 이야기인지 모를 어릴 적 이야기를 펼친다. 그렇게 창석은 주은에게 기억을 불어넣어준다.

 

주은 : 그는 기다린다. 느리게 술잔을 비우고 친목과 대화 속에서. 사소한 거짓말들로 그는 기다린다. 그는 사실 기다린다는 말로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오는 사람 없지만 그는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에피소드, 창석이 공중전화부스에 들어가 헤어진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 장소는 배화여중•대학교 앞이다. 배화여중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도착한 정류장은 그대로였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영화 개봉 후 시간이 꽤 흘러서인지 전화부스가 사라졌다. 영화 속 창석이 외로움을 토로하고 다시 한 번 상실을 느낀 전화부스는 결국 철거됐다. 안내를 도와준 여중생들도 전화부스가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전화부스가 있던 자리
▲전화부스가 있던 자리

 

상실된 장소는 전화부스 뿐이 아니었다. 촬영지 왼편에는 감독의 전작이자 본지에서도 다룬 적 있는 영화 <최악의 하루>(2016)의 촬영지인 ‘커피한잔’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끔 종로에 들릴 때마다 커피를 마시던 곳이라 반가웠다. '커피한잔' 옆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커피한잔' 사장님이 가게에 들어오셨다. “저, 이제 가게 접으려고요.” 카페 자리를 옮기신다고 한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던 가게 하나가 상실된다. 영화 속 인물부터 촬영 장소까지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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