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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다림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연극 '분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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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분장실' 포스터/ 출처: 인터파크
▲연극 '분장실' 포스터/ 출처: 인터파크

 

“인간, 사자, 독수리, 그리고 뿔 달린 사슴, 거위, 거미, 물속에 사는 말 없는 물고기, 불가사리,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 한마디로 모든 생명, 모든 생명, 모든 생명이라는 생명은 모두 슬픈 순환을 마치고 사라져 버렸다…….”

 

막이 오르고 배우 C가 등장해 독백을 시작한다. 안톤 체홉(Anton Chekhov, 1860~1904)의 희곡 ⌜갈매기⌟(Чайка) 속 주인공 ‘니나’의 대사이다. 언뜻 보기에는 연극 <갈매기> 속 한 장면 같지만, 이내 배우 C는 대사를 까먹은 듯 고개를 젓는다. 공연장의 모든 조명이 켜지고 전과는 다른 표정으로 다시 대사를 외우는 배우 C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관객들은 이제야 무대 위의 인물이 니나가 아님을 알아차린다.

▲3월 19일 오후 6시 공연의 캐스트 보드.
▲3월 19일 오후 6시 공연의 캐스트 보드.

연극 <분장실>은 일본 극작가 시미즈 쿠니오(清水 邦夫, 1936~2021)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원작은 1977년 처음 막을 올린 이후 지금까지 일본에서 가장 많이 상연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국내에서는 2021년 첫 한국 라이선스 공연을 올린 뒤 올 봄부터 다시 상연 중이다.

본 극은 연극 <갈매기>를 상연 중인 극장의 분장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분장실은 총 네 명의 배우가 함께 쓰고 있다. 이렇다 할 배역 하나 없이 극단의  *프롬프터 신세를 전전하고 있는 배우 A와 B, 주연인 니나 역을 맡은 인기 배우 C, 그리고 배우 C의 프롬프터 역할을 하고 있는 D이다. 건강 악화로 자리를 비웠던 D는 퇴원 후 돌아와 C에게 니나 역을 돌려달라는 황당한 요구를 한다.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배우들은 다양한 고전 명작 속 유명한 구절들을 인용한다. 안톤 체홉의 희곡 ⌜갈매기⌟부터 ⌜세 자매(Три сестры)⌟,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희곡 ⌜맥베스(Macbeth)⌟까지. 배우들의 입을 거치는 순간, 그 구절들은 본래 가지고 있던 의미를 넘어선 다른 가치를 지닌다. 니나 역 역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니나 역을 지키려는 C와 뺏으려는 D. 니나 역은 단지 배역 하나의 의미가 아닌 배우로서 무대에 서고자 하는 강한 열망과 의지를 나타낸다.

 

▲커튼콜(Curtain Call) 당시 모습.
▲커튼콜(Curtain Call) 당시 모습.

 

“난 갈매기야…… 아니, 이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그래, 난 배우야!”

 

무대에 나가기 위해서는 분장실을 지나야 한다. 분장실은 무대라는 목표를 위해 잠시 머무르는 곳이지, 결코 누군가의 도착지가 아니다. 유일하게 니나 역을 성취한 C와 달리 A, B, 그리고 D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배역 하나 얻지 못한 채 분장실에 계속해서 머무른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끊임없이 연기한다. 니나 역을,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역할들을 갈망한 채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커튼콜 당시 모습.
▲커튼콜 당시 모습.

 

니나를 연기하는 C는 끝내 자신의 배역을 지키고, A와 B, D는 분장실을 지킨다. 관객이 없는 무대에 어떻게 설 수 있겠냐는 A와 B의 말에 D는 “배우가 없는데 어떻게 관객이 있을 수 있겠어요?”라며 설득한다. 그들은 오랜 기다림을 멈추고 스스로 무대에 선다. 누군가 불러서 나가는 무대가 아닌, 오로지 자신의 의지만으로 막이 내린 무대에 선다. 그리고 그들은 오래도록 수도 없이 연습해왔던 연극 <세 자매> 속 인물들을 연기한다.

연극 <분장실>은 비단 배우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우리의 욕구와 갈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모든 기다림은 언젠가 끝나고, C의 말처럼 “오로지 전진, 오직 전진!”이다. 모두의 기다림에 언젠가는 끝이 있기를. 그리고 그 끝에는 오랜 시간 꿈꿔왔던 결실이, 달라진 미래가 자리해 있기를. 연극 <분장실>의 마지막 대사로 마무리 짓는다.

 

"세월이 흘러 우리가 세상을 영원히 떠나면 사람들은 우리를 잊을 거야. 우리 얼굴도, 목소리도, 그리고 우리가 몇 명이었는지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중략) 아, 동생들아. 우리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살도록   하자! 음악이 저처럼 밝고 기쁘게 연주되는 걸 들으니 조금만 더 있으면 우리도 알게 될 것 같구나. 어째서 우리가 살고 있는지, 왜  우리가 괴로워하고 있는지…… 그걸 알 수만 있다면, 그걸 알 수만 있다면……."

— 안톤 체홉, ⌜세 자매⌟, 『체호프 희곡 전집』, 2010, 시공사

 

*프롬프터: 연극이나 TV드라마에서 관객에게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기자에게 대사나 동작을 일러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공연기간: 2023년 3월 4일(토) ~ 5월 14일(일)

공연장소: 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2관

관람시간: 화~금 19:30 / 토~일 14:00, 18:00 / 월 공연 없음

관람요금: R석 66,000원 / S석 5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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