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갈등과 이해 그리고 사랑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자는 지난 3월이 무척 힘들었다. 몸이 힘들었다기보단 마음이 힘들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는 건 기자에게 매우 힘든 일이다. 기자는 다툼을 보는 것이 싫어, 먼저 한발 물러나거나 그 자리를 회피함으로써 싸움을 피하곤 한다. 지난 3월 기자 주변에는 사소한 갈등들이 많았다. 그중 직접 연관된 일은 없었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것은 꽤나 고통이었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관계 속, 서로 다투는 마음들이 집합된 곳에 있는 것은 고역 같은 일이었다. 그것 때문에 기자는 지난 한 달간 엄청난 회의감에 휩싸여 살았다.

기자는 어릴 적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나만큼 해내지 못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답답해하며 그들을 무시했다. 하지만 기자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기자의 인생에서 18살은 굉장히 힘들었던 시절로 남아있다. 코로나19가 시작된 2020년, 즉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일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어수선한 학교, 미래를 장담해 주지 못하는 성적, 그리고 친구 관계 때문에 기자는 고등학교 2학년 생활을 우울하게 보냈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 말투와 표정은 늘 가시가 돋듯 날이 서 있었고 기자는 사람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기자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있다. 바로 기자의 담임선생님이다. 그 당시 기자는 누군가의 호의를 있는 그대로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예민했다. 그럼에도 기자의 담임선생님은 그런 기자를 끊임없이 믿고 격려해 줬으며 사랑을 베풀어줬다. 그런 선생님이 옆에 있었기에 기자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고 지금처럼 밝게 웃을 수 있게 됐다.

사람과의 갈등은 참 힘든 일이다. 부모님, 친구들 그리고 조별 과제 조원 등과 우리는 무수히 많은 갈등을 만들며 살아간다. 이러한 문제 속 맞고 틀리고를 구분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여기에 기자는 ‘이해’라는 답을 내려보았다. 그 순간에 필요한 건 남이 틀렸다는 것과 내가 맞았다는 것을 주장하는 마음이 아니다. 바로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 다른 말로 보태자면 ‘존중’이라는 단어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 기자가 내민 손을 거칠게 내치고 호의를 거절하면 기자도 사람이기에 당연히 상처받는다. 타인에게 무관심한 세상 속, 나와 다른 이들을 이해하자는 기자를 보고 누군가는 오지랖이 넓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과하다고 평가내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자는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지난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그때 기자에게 담임선생님이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면 기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기자에게 사랑을 베풀어 줬기에 기자는 변화할 수 있었고 타인을 존중할 줄 아는 어른이 될 수 있었다. 기자도, 기자의 옆에 앉아 있는 모두도 다 미숙할 뿐이다. 틀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까 언급했던 ‘이해’에서 ‘사랑’으로 넘어가 보자. 이해를 넘어 타인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갈등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하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3월에서 4월, 지난 회의감 속에서 다시 신발 끈을 질끈 묶고 앞으로 한 발 나아갈 수 있는 건 기자의 얘기를 들어주고 함께 짐을 나눠 들어준 동료들 덕분이다. 기자의 앞에는 새로운 갈등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상처를 주는 것도 사람이지만 결국 힘든 나를 도와주는 것도 옆에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그것을 넘어 그들을 사랑하는 것. 어렵지만 함께 살아가는 세상 속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조그마한 구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모두가 받는 행복보다 주는 행복이 더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우리 모두 나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자는 말을 전하며 기자는 글을 마친다.

SNS 기사보내기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

하단영역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