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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도 정겨운 도시에서, 『빛나: 서울 하늘 아래』(2017)

서울이 선사하는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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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을 돌아다니는 6712번 버스
▲ 서울을 돌아다니는 6712번 버스

 

서울의 공기는 참 다양하다. 작년 2월 말, 기자는 본격적인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가끔 놀러 오던 이곳이 이젠 마음 붙여야 할 곳이 된 것이다. 배정받은 기숙사 방에 짐을 풀었다. 건물에선 한강이 내려다보였고, 조금만 걸어 나가면 감성 넘치는 식당과 카페가 즐비했다. 화면으로만 보던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기도 하고, 깜깜한 밤에도 사람들은 반짝이는 모습을 하고 이곳으로 몰렸다. 기자는 오묘한 설렘에 휩싸였다. 설렘을 가지고 바라본 서울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에너지가 느껴졌고, 매번 기분 좋은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또 어떤 날의 서울은 너무 차가웠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 마음 놓고 실수하기 어려운 곳, 의지할 곳 없다는 게 느껴지는 순간. 그런 날에 바라본 서울은 뿜어내는 잿빛이 너무 울렁거려 토할 것 같았다.

 『빛나: 서울 하늘 아래』(2017)는 200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Jean Marie Gustave Le Clezio, 1940~)의 작품이다. 작품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소설의 배경은 서울이다. 외국인 작가가 본 서울의 모습이 궁금했던 기자는 이 책을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 ‘빛나’의 고향은 전라도이지만 부모님의 바램인 명문 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에 있는 고모네 집에 들어가 산다. 고모와 사촌 동생은 그런 빛나를 못살게 군다. 빛나가 얹혀살기 때문에 집안일을 당연히 해야 한다는 듯이 압박을 가한다. 그런 빛나에게는 습관이 하나 생긴다. 사람을 구경하는 것이다. 서울에 혼자 올라와 의지할 곳 없는 도시에서 유일하게 빛나가 숨통을 틔우는 순간은, 사람 구경을 할 때다. 빛나는 6712번 버스를 타고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그 사람들이 가졌을 법한 이야기를 상상해낸다. 이름, 직업, 가는 길, 종교, 고민, 연애사 등 구체적인 상상을 하고 작은 수첩에 적어둔다.

 

▲ 6712번 버스 안에서 본 바깥 모습
▲ 6712번 버스 안에서 본 바깥 모습

 

빛나를 따라 숨통을 틔우고 싶었던 기자는, 홍대입구역에서 빛나가 탔던 6712번 버스를 탔다. 6712번 버스는 방화동에서 시작해 홍대입구역, 신촌역, 이화여자대학교, 서강대학교 등 신촌 주변 대학을 거치는 경로로 서울을 달린다. 기자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기자가 탔을 당시 조금씩 비가 내려 사람들은 모두 색깔 다른 우산을 손에 쥐고 있었다. 비 오는 서울 거리를 걷는 이들의 표정은, 서울 공기만큼이나 다양했다. 평소였다면 의식하지 않고 지나칠 사람들이었지만, 가만히 표정을 살피고 그들의 이야기를 상상하니 조금 특별했다. 밝은 표정으로 떠드는 이들을 보면 마음이 편안했고, 조금 찡그린 표정을 보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하고 괜히 걱정이 됐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말이다.

 

“마치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나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사람들 이름과 만난 장소를 적는다. 하지만 다시 만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걸 나는 잘 안다. 서울은 너무 커서 수백만 번 같은 길을 걷는다 해도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는 사람 없는 서울에 온 기자가 누군가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사람이 되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본가에서 생활할 때는 의지할 수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가까이 있었지만, 툭 내던져진 무연고의 도시에선 처음 보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찾아 참석해야 한다. 설레는 만큼 에너지 소비가 많은 그런 자리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미소 짓는 사이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기자의 기대와 달리 한동안 우울해진 적도 있고, 본래 모습과는 다르게 행동하며 공허함을 느낀 적도 있었다. 또 그런 날 느끼는 서울의 분위기는 다양한 이들의 기분이 뒤섞여 너무나도 오묘하다.

 

▲ 종로에 있는 지하 대형서점
▲ 종로에 있는 지하 대형서점

 

빛나가 사람들을 제대로 구경하는 장소는 따로 있다. 바로 서점이다. 빛나는 학교가 끝나면 곧장 대형서점에 가 문 닫을 때까지 책과 사람들을 구경한다. 버스 안에서처럼, 이런저런 사람들을 마음껏 보며 그 사람의 이야기를 마음대로 상상한다. 그런 빛나에게 서점 직원이 대뜸 어떤 쪽지를 준다. 몸이 아파 밖을 나가지 못하는 인물 ‘살로메’가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부탁이 적힌 쪽지였다. 빛나는 살로메의 부탁에 응하고, 살로메의 집에 찾아가 상상과 현실이 뒤섞인 이야기들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 강남 서래마을. 살로메가 사는 동네다.
▲ 강남 서래마을. 살로메가 사는 동네다.

 

기자는 빛나가 이야기를 가지고 살로메를 찾아간 곳, 강남 서래마을로 향했다. 오후수업을 마치고 늦은 시간에 찾아간 강남 서래마을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길이 너무 어두울까 봐 걱정했는데, 밤 10시를 향하는 느지막한 시간에도 거리엔 아직 사람들이 있었고, 카페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빛나가 전라도에 살면서 들었던 이야기, 서울에 와서 경험한 환경과 감정,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과 살로메와의 관계. 이 모든 게 섞여 빛나의 상상을 만들어낸다. 빛나가 살로메에게 해준 이야기가 빛나의 실제 삶에 당연한 듯 등장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통해 상상과 현실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체감할 수 있다. 비둘기로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하려는 조씨 아저씨 이야기도 빛나가 할머니에게 들은 얘기와 상상이 섞였고, 초보 살인자 이야기도 그렇다. 살로메에게 들려준 스토커 이야기도 지어낸 것 같았지만 사실은 빛나가 실제로 겪고 있는 일이었다. 읽으면서 재밌었던 건, 작가의 현실과 이 허구의 소설도 그렇다는 것이다. 2007년쯤 작가 르 클레지오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강의한 적이 있는데, 이 소설에서 빛나도 대학교에서 기초프랑스어를 강의한다.

 

“새로운 전철역도 마음에 들었다.  2호선 지하철은 합정역을 지나 한강을 건너 당산역에 이르고, 신도림에서 내려 1호선 지하철로 갈아타면 지상으로 나왔다. 1호선은 날림으로 지은 3층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서민적인 동네들을 지나갔고, 그러다 보면 오류동에 이르렀다.”

 

▲ 빛나가 새로 이사 간 동네, 오류동역
▲ 빛나가 새로 이사 간 동네, 오류동역

 

빛나는 방을 여러 번 옮긴다. 처음엔 고모네 집에서 나오기 위해 살로메가 준 돈으로 신촌에 반지하 방을 얻는다. 하지만 쥐와 바퀴벌레가 나오는 비위생적인 환경에 질려 구로구 오류동으로 한 번 더 이사한다. 빛나는 오류동을 마음에 들어했다. 쥐도 없고, 고향과 비슷한 길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오류동역 계단을 내려가면 있는 철교도 참 좋다고 했다. 빛나의 새로운 귀갓길을 따라 2호선을 타고 신도림에서 내려 1호선 인천행 전철에 몸을 실었다. 서울이지만 시끄럽지 않고, 학교가 몰려있는 중심지와 그리 멀지 않은 곳. 기자가 오류동역에 도착했을 때 받은 인상도 그러했다. 초저녁에 도착해서 더 그렇게 느껴졌는진 알 수 없지만, 고향처럼 정겹고 차분했다.

 기자는 학교 기숙사에 살기 시작한 초기, 커다란 전광판 조명과 창문을 열면 들리는 클럽 음악 소리에 시간을 빼앗긴 적이 종종 있다. 화려한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은 홀린 듯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홀린 듯한 상태에선 무언가 차분하지 않은, 자극이 필요한 느낌을 계속 받는다. 그러면 밤새 핸드폰 화면을 보거나, 조용히 있기가 힘들어 이어폰을 귀에 꽂아둔 채 잠들곤 한다. 아마 마음 둘 곳 없이 동떨어진 듯한 불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기가 거의 불가능한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로메는 진정 내게 관심을 가져주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내가 자기만을 위해 살기를 바랐고, 바깥세상에 관해 이야기해주기를 바랐다. 그녀는 나를 이용했다. 하지만 나를 보호해 준 것도 사실이다. 살로메를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내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밖을 나갈 수 없는 살로메는 빛나가 공포라는 감정을 들려주길 바라며 빛나에게 스토커를 붙였다. 때로는 우위에 있는 듯 자기가 원할 때 살로메를 찾아가던 빛나였지만 반대로 살로메 역시 빛나를 이용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또 서로에게 관심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서로의 필요가 충족돼 서로를 찾았다. 이용하는 관계, 하루 볼 사이. 반대로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전적으로 서로의 편인 관계까지 만날 수 있는 도시가 서울이다. 뜨겁기도 차갑기도 한 이 도시에서 수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이들을 만나보고 있는 이들은 지금도 바쁘게 서울의 공기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빛나가 방을 여러 번 옮긴 것처럼, 진정으로 마음 둘 곳을 찾기 위해선 여러 번의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어쨌든 관계나 경험은 옳고 그름보단 본인이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거니까 자신을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낯선 환경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가장 활성화되어있는 도시가 이 서울이 아닐까 싶다. 외롭고 희망차고 오묘한 이 서울 하늘이 지금 독자들 마음에는 어떻게 느껴지는지 궁금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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