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제주도의 핏빛 바다를 기억하며

'4·3 기억 투쟁_새김과 그림'展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전시 포스터
▲ 전시 포스터

 

제주 4·3사건이 올해로 75주년을 마주했다. 1948년, 독립 후 민주화를 꿈꿨던 대한민국은 모순되게도 전혀 민주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의 비극을 낳았다. 현재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대표 휴양지이지만, 불과 75년 전만 해도 3만 명 이상이 이유도 없이 죽임을 당한 섬이었다. 이번 전시는 박경훈(1962~) 작가의 개인전으로 그는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운동 등에 참여한 문화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를 통하여 제주 4·3사건의 지워졌던 역사를 들추고 당시 피해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보자.

 <4·3 기억 투쟁_새김과 그림> 전시는 ‘새김’과 ‘그림’, 두 파트로 나누어진다. 제주 4·3사건은 1948년 4월부터 1954년 9월까지 경찰과 우익단체가 행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을 일컫는다. 이때 학살당한 민간인 피해자의 이야기가 ‘새김’에서, 경찰 및 우익단체를 비판하는 내용이 ‘그림’을 통해 차례대로 펼쳐진다.

▲'이 땅이 뉘 땅인데 무사 우리가 죽어'(1990) 한지 위에 목판, 41x34.5cm
▲'이 땅이 뉘 땅인데 무사 우리가 죽어'(1990) 한지 위에 목판, 41x34.5cm

 

먼저 ‘새김’에선 박경훈 작가의 목판화 작품 100여 점을 마주할 수 있다. 작품들은 굉장히 거칠고 대비가 강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핏빛 제주의 고통이 눈을 자극했다. 이는 목판화의 특성이기도 한데, 목판화 자체가 나무를 직접 칼로 깎아 찍어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거친 느낌이 난다. 물론 의도한다면 정교하고 부드럽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작가는 의도적으로 나무의 결을 살리고 직선적인 선을 사용해 목판화만의 투박한 매력을 살린다. 박경훈 작가도 제주도민의 살을 깎는 고통을 여기저기 깎인 나무를 통해 전달한 듯 보였다. 강한 대비또한 목판화의 특징이다. 튀어나온 부분에만 잉크가 묻기에, 그림과 배경의 경계가 뚜렷하게 나뉘기 때문이다. 거친 질감과 강한 대비는 경고와 강조의 효과가 있다. 제주 4·3사건 속 민간인의 상황을 목판화로 표현함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더욱 처절하고 아프게 보여주었다.

 박경훈 작가는 글도 그림에 적절히 활용했다. 글은 관객이 읽을 수 있기에 시각적인 효과가 매우 크다. 따라서 글을 사용했다는 건 그만큼 강조하고 싶은 내용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 땅이 뉘 땅인데 무사 우리가 죽어> (1990)는 글 없이도 충분히 강렬한 작품이지만, 아래쪽에 적힌 한 문장이 작품의 핵심을 강하게 관통하고 있다. ‘무사’, 제주도 방언으로 ‘왜’라는 의미다. 이유 없는 학살에 그들의 억울하고 외로운 외침이 작품 속에서 들려왔다.

▲'두무인명상도(頭無人冥想圖)'(2018), 한지 위에 목판, 120x186cm
▲'두무인명상도(頭無人冥想圖)'(2018), 한지 위에 목판, 120x186cm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사망한 1947년의 3·1절 발포사건을 시작으로 제주도는 민·관 합동 총파업에 들어갔다. 당시 한국의 정치적 주도권을 쥐고 있던 미국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지칭했다. 그렇게 죄 없는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두무인명상도(頭無人冥想圖)>(2018)는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전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모습 같다.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단체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상관 않고 그들의 목숨을 베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비통한 죽음과 진실은 무려 40년 동안 은폐됐다. 이에 떠돌아다녀야 했던 그들의 영혼이 이 그림을 통해 돌아온 듯 보였다.

▲'저강도전쟁 – 동족끼리 싸우게 하라'(2008), 아크릴릭, 디지털프린트, 130.3x390.9cm
▲'저강도전쟁 – 동족끼리 싸우게 하라'(2008), 아크릴릭, 디지털프린트, 130.3x390.9cm

 

두 번째 파트인 ‘그림’에선 콜라주 및 디지털을 활용한 작품을 선보인다. 앞선 목판화는 오래된 판화 기법이기에 전통성이 느껴지는 반면, ‘그림’에선 시대에 맞춰 변화하는 작가의 작업양상이 흥미롭다. 디지털 작업의 가장 큰 장점은 강조하고 싶은 것을 일정하게 반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원하는 장면이나 사진을 무한대로 겹칠 수도 있다. 그는 작품에서 이러한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또 목판 작업에서와 같이 글을 사용한 작품도 있었다. <저강도전쟁-동족끼리 싸우게 하라>(2008)는 수십 명의 한국인들 얼굴 사진 위로 ‘low-intensity war’와 ‘동족끼리 싸우게 하라’라는 문장이 여러 번 반복돼 있다. 이 작품은 미국이 *저강도전쟁 전략을 사용해 우리나라의 분열에 관여했음을 말하고 있다. 거대한 작품을 한눈에 보기 위해선 멀찍이 떨어져야 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붉은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진실은 가까이 갈 수록 끔찍했다. 제주 4·3사건은 미국이 점차 한국의 주도권을 빼앗아 갔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작가는 이 불편한 진실을 강렬하고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이번 전시의 기획을 맡은 범현이 큐레이터는 제주 4·3사건이 광주 5·18 민주화운동과 놀랍도록 닮았다고 전한다. 광주를 와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광주라는 도시가 얼마나 5·18 민주화운동을 중요시하는지, 또 이를 기억하기 위한 노력이 도시 곳곳에서 보이는지 말이다. 광주는 누구보다 제주 4·3사건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도시가 아닐까. 한편, 놀랍도록 비슷한 사건이 32년 만에 반복됐다는 점에서 은폐·왜곡된 역사의 미래는 밝지 않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완연한 봄이 왔지만 과거 우리나라의 봄은 겨울보다 지독했다. 4월엔 제주도가, 5월엔 광주가 그리고 6월엔 한국 전체가 시들었다. 민주화 정신이 깃든 도시 광주에서, 매력적인 목판화를 통해 제주도의 핏빛 바다를 마주하길 바란다.

 

 

*저강도전쟁(low-intensity war): 물리적 전쟁이 아닌 정치, 경제, 사회, 심리 등 제 요소가 통합적으로 운행되는 전쟁의 양상을 의미한다. 반대되는 말로는 고강도전쟁(high-intensity war)이 있다.

 

 

전시기간: 2023년 3월 30일(목) ~ 2023년 6월 18일(일)

전시장소: 광주시립미술관 제 3, 4 전시실

관람시간: 화~일 10:00~18:00

관람요금: 무료

SNS 기사보내기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

하단영역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