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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예술로 승화하다

김영원(조소68) 동문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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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원(조소68) 동문
▲김영원(조소68) 동문

 

광화문의 세종대왕 동상,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와 본교 대학로캠퍼스 앞에 굳건히 서 있는 인체상들. 서울에 산다면 이 조각가의 작품을 보지 못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희수(喜壽)를 보내면서도 누구보다 활발하게 예술 활동 중인 김영원(조소68) 동문을 만나봤다.

 

Q. 동문은 본교 조소과를 거쳐 본교 대학원 조소과까지 졸업했다. 조소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데 입학 전부터 조각가를 꿈꾼 것인지, 언제 조각가의 꿈을 이뤘다고 실감했는지 궁금하다.

A. 농사를 지으라는 할아버지를 설득해 뒤늦게 들어간 고등학교에서 만난 미술 교사의 권유로 조각을 시작했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입시 공부하고 합격했지만, 몇 년 동안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했던 애들이랑 상대가 안 됐다. 그래서 한 일주일을 학교도 가지 않은 채 이 길이 맞는지 고민했고, 일 년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했다. 그렇게 2학년 학기 말에는 성적도 A로 올라갔다. 그리고 독재 정권에 접어들면서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렇게 현실을 바탕으로 합리주의 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사실주의 예술을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때 ‘아, 이제 내가 조각가가 됐구나.’라고 생각했다.

 

Q. 전반기(7~80년대) 작품은 독재 정권 시대의 아픔을 담았고, 중반기(90년대) 작품은 작가가 체험한 선(禪)의 세계를 은유적으로 형상화했으며, 후반기(2000년대) 작품은 사회의 전환기를 맞아 인체를 통해 현실과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석된다. 이렇듯 작품을 제작할 때 주로 영감을 주는 존재가 무엇이며, 그것이 작품에 반영되는 과정이 궁금하다.

A. 초기에는 현실주의 예술을 하자고 천명했었다. 현실을 은유적인 상징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민주화가 되면서 그 당시 나를 지탱했던 것이 사회 현상적인 것에서 인간의 실존주의에 대한 철학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1978년 민주화 운동 즈음 "인간은 왜 고통받고 괴롭고 힘든가?" 혹은 "왜 약자가 있고 강자가 있어야 하는가?"와 같이 실존주의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우리가 너무 이상적인 이데아, 진리라는 것에 취해있던 것 아닌가. 현실을 나타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 어떤 유토피아가 있는 것도 아니니 있는 그대로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이라는 것도 있는 그대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는 고통스러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접근했다. 그렇게 인간의 실존을 담기 위해 ‘인체’라는 소재를 주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90년대에 “큰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탈각 해야겠다.”라고 깨달았다. 내가 나를 부정하고, 나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동안 만든 작품을 깨고, 때려 부수고, 깨진 작품들을 얼기설기 잇기도 했다. 내가 만든 작품을 내가 부정하면서 깨뜨리니까 내 몸이 함께 깨지기 시작했다. 누워서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몸이 망가지자 친구가 "너 이러면 큰일 난다. 내가 기공 명상하는 데가 있는데 거기서 일단 몸이라도 회복시켜라."라고 해서 기공 명상에 입문했다. 현실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내 삶에도, 예술에도 하나의 변곡점이 생겼다.

 

▲DDP에서 진행한 전시 '나 미래로'의 '그림자의 그림자-길'(2016)/출처: 김영원 홈페이지
▲DDP에서 진행한 전시 '나 미래로'의 '그림자의 그림자-길'(2016)/출처: 김영원 홈페이지

 

Q. 지난 1994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전시장 가운데 흙으로 만든 원형 기둥을 세워놓고 ‘기(氣) 춤’을 추다가 응축된 기를 분출하며 날카롭게 흙기둥을 긁어내는 퍼포먼스를 펼친 바 있으며, 회화연작 <Cosmic force>를 제작하는 과정을 공개하기도 했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을 퍼포먼스로 대중에게 공개하겠다고 결심한 계기와 그 의미가 궁금하다.

A. 기공 명상을 배우면서 이 세상에는 시간과 공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믿거나 말거나 이를 몸으로 깨달은 적이 있다. 그 이후부터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별로가 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은 중요하게 느껴지는 변화를 겪었다. 남들은 기공 명상을 일 년 정도면 관두는데 그날의 일이 나한테 큰 충격으로 작용해서 지금까지 끌고 오게 됐다. 이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선정됐다. 그때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주제가 "너의 예술을 지탱하고 있는 지지체가 무엇이냐, 즉 너의 철학이 무엇이냐."였다. 지인은 "네 지지체는 해체가 아니냐. 깨고 부수고, 새롭지 않느냐."라고 말했지만, 그 깨달음 이후로 인체를 만들려고 흙을 만지고 있으면 손이 안 가서 하루 종일 흙만 주무르다 끝나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스승에게 어떡하면 좋을지 물었더니, "당신 마음이 가는 대로 한번 해보시오."라고 해서 흙기둥을 하나 세워놓고 그 앞에서 기춤을 췄다. 긁고, 할퀴고, 당기며 흠집을 내는, 그런 작품 몇 개를 상파울루에 가기 전에 만들었다. 그리고 망하더라도 내 몸속에서 진정으로 이루어져 나오는, 내 마음이 향하고 싶었던 작품인 기춤을 비엔날레에서 선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양의 기 문화를 담아낼 수 있는 흙기둥을 만들어 상파울루에 갔다. 기춤은 연출하고,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퍼포먼스와 달리 스스로에게 집중하면 몸 전체로 들어오는 기운에 반응하는 것이다. 나는 시현을 한 것이지, 퍼포먼스라고 생각한 적 없다.

 

▲지난 4월 8일(토)부터 진행중인 '한국의 네오모 더니스트: 氣오스모시스 조각과 회화'
▲지난 4월 8일(토)부터 진행중인 '한국의 네오모 더니스트: 氣오스모시스 조각과 회화'

 

Q. 2024년 김해시에 시립 김영원 미술관이 설립된다. 자신만의 미술관이 만들어진다는 게 예술가로서 감회가 남다를 텐데, 소감이 궁금하다. 또 어떤 과정으로 미술관 설립이 결정됐는가.

A. 김해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선산도 거기 있고, 집사람하고 나는 이미 10년 전에 선산에 가묘도 해놨다. 김해가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그런 김해를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옛날 고대 시대 철기·도기 문화의 발상지로, 그걸 디딤돌 삼아 발전할 수 있는 충분한 역사적인 여력이 있는데도 멈춰져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해시에서 제의가 왔다. 나의 새로운 예술의 싹을 틔울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김해를 오가면서 느꼈던 내 나름대로의 사명감이 있었다. 광화문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은 높은 좌석에 있으니까 자세히 볼 수가 없고, 대중들과의 소통이 어려웠다. 그런데 파리 부르델 미술관에 갔다가 마주한 <알베아르 장군 기념상>(1915~1923)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만약 세종대왕 동상도 기념상 처럼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게 원형을 복원해놓는다면, 그 이상의 감동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조각을 모르는 사람도 김영원 미술관에 와서 조각 애호가가 될 수도 있고, 조각 문화를 확산시키는 하나의 단초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해시에게 "내가 세종대왕 동상 원형이 있는데, 이걸 세울 공간을 달라."라고 제안했다. 이제 자대 없이 그대로 세운 세종대왕 동상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고 느끼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또 소장 작품을 전시한 박물관 같이 딱딱한 분위기를 갖는 게 싫었다. 살아 움직이면서 나 자신이 지향하는 예술을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했다. 김영원 미술관이 김해의 문화가 크게 확장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되길 바란다.

 

Q. 조각가, 그리고 각 예술 분야의  거장이 되길 꿈꾸는 본교 학우들을 위해 조언의 한마디 부탁드린다.

A. 예술의 길이라는 건 정답이 없다고 본다. 니체가 말한 인간의 정신 발달 3단계와 요즘 돌아보는 내 삶이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 1·2학년 때까지는 도덕적인 순종을 하며 낙타 같은 삶을 살았다. 짐을 쥐여주면 짐을 지고, 교수가 가르친 것들은 다 받아들였다. 3학년 때부터는 사자의 삶, 나대로의 삶을 살고 싶어 했다. 교수들은 나의 그런 변화를 싫어했고, 괜히 왜 그러냐며 큰일 난다, 어쩐다 말이 많았다. 그럼에도 나만의 의지를 가지고 발언하는 사자의 삶을 이뤄냈다. 그리고 이제는 명상을 통해서 어린아이 같은 삶, 어떠한 경계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작품 또한 경계가 없는 것들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배울 때는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예술 세계를 비판하려면 철저히 알아야 한다. 함부로 얕은 머리로 반응하고, 조정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니까 배울 때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배워라. 그리고 저절로 세상을 향해서 의지를 펴게 될 때 거리낌 없이 펴라. 특히 예술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그렇다. 여기저기 눈치 보는 건 네 삶이 아니니, 너는 너의 삶을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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