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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부리는 법

작용 반작용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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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일상을 돌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둘 이상의 실체 간 상호 작용이다. 한쪽이 발화 또는 침묵하면 다른 한쪽 역시 발화 또는 침묵한다. 그리고 이는 계속 반복된다. 그렇기에 인간은 대화로 살아가며, 일상이기에 알아차리기 쉽지 않지만 이따금 우연적 순간을 맞이하고 삶의 작은 부분이 바뀌곤 한다. 누군가 “납득이 안 가니 예를 들어봐라.”라고 요구한다면 기자는 하마구치 류스케(はまくちりゅうすけ, 1978~)의 작품을 권하겠다. 대화의 양태 자체를 담아낼 줄 알기 때문이다.

 이번 호에서는 영화계의 아이돌이라 할 수 있는 하마구치 감독의 작품 중 <우연과 상상(偶然と想像)>(2022)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영화는 옴니버스식 구성을 띠는 세 편의 단편 모음집으로, 내용적으로 긴밀히 연결돼있진 않지만, ‘우연’과 ‘상상’이라는 각각의 테마를 변주하며 전개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인데, 우리는 정말 불가사의한 시간을 보냈어. 그런 경험은 처음이라고 서로 확신했지.” 친구의 연애담은 언제나 흥미진진한 법이다.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 ‘메이코’는 친구 ‘츠구미’가 첫눈에 서로 반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메이코는 츠구미가 남자의 이름, 직업, 2년 전 실연당했다는 연애 경력 등 그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꺼낼 때마다 표정이 굳는다.

 츠구미를 보내고, 메이코는 택시를 돌려 어느 건물에 도착해 한 남자를 찾는다. 그녀가 만난 이는 이야기 속 남자이자 메이코의 전 애인 ‘카즈아키’였다. 메이코의 일방적인 잘못으로 2년 전 어그러졌던 관계였기에 카즈아키는 그녀를 밀어내고 화를 내지만, 그녀가 왜 왔는지 물으며 묘한 기대감도 비춘다.

 메이코는 그런 그를 다룰 줄 안다. 질투와 관심을 내비치면서도 자존심을 살살 긁는데 선수다. 메이코를 잊지 못한 카즈아키였기에 그는 밀고 당기기에 당했다. 결국 경계하던 고양이의 눈빛에서 순종하는 강아지의 눈빛이 된다. 하지만 건물에 방해꾼이 들어오는 바람에 메이코의 유혹 작전은 어중간한 실패로 돌아간다. 며칠 뒤 카페에서 메이코와 츠구미는 우연히 카즈아키와 합석한다. 카즈아키를 소개해주는 츠구미를 두고 메이코는 한 가지 상상을 한다. “츠구미, 미안해. 카즈의 전 여자친구가 나야. 난 카즈를 사랑해. 두 사람이 만난 건 나와 카즈를 위한 마법이었단 걸 깨달았어.” 하지만 상상의 끝은 파국이었고, 사랑과 우정 모두 잃을 순 없었던 메이코는 자리를 피해버린다.

 제1화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모호한 메이코의 감정을 중심으로 충동적이고 일탈적인 언행들이 리드미컬하게 튀는 에피소드다. 배우들의 표정 연기와 대사는 인물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사랑 아닌 감정을 떠나보내는 방법을 보여준다.

 

 

[문은 열어둔 채로]

여대생 ‘나오’는 자신의 성적 파트너인 ‘사사키’의 요청으로, 교수 ‘세가와’를 유혹하기 위해 그가 쓴 소설을 들고 학교로 향한다. 사사키가 세가와를 유혹하라고 한 이유는 단순히 ‘그가 싫어서’다. 나오는 녹음기를 켜고 교수의 방을 찾는다. 나오는 천천히 그의 소설을 낭독하기 시작하는데, 성적 행위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그 내용은 가만히 듣고 있기 부끄러울 정도다. 교수의 얼굴이 꿈틀거린다. 나오는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문을 닫지만, 세가와 교수는 닫힌 문을 다시 연다. 세가와 상, 의외로 철벽남이다. 몇 차례 유혹을 더 해봤지만 세가와는 무반응이었고, 대화가 지속될수록 어느 순간 나오는 자신의 약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며 교수에게 위로받고 있었다. 나오는 세가와 교수에게 자신이 그를 유혹하려 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세가와 교수는 개의치 않아했다. 하지만 녹음했다는 사실을 알자,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들으면서 다신 이런 일이 없을 것 같아서 녹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쓴 글을 아름다운 목소리로 듣는다는 건 황홀한 기분이었어요.” 이에 나오는 기꺼이 녹음 파일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때 우연이 틈입한다. 나오가 파일 수신자를 ‘세가와’가 아닌 ‘사가와’로 적는 바람에 녹음 내용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어 나오와 세가와는 잠적하게 된다.

 제2화 ‘문은 열어둔 채로’는 나오의 사소한 실수로 인생이 망가지는 다소 충격적인 엔딩에 주목하기 쉽다. 하지만 에피소드의 중심에서 극을 이끌어가는 나오가 세가와를 유혹하려는 의지가 꺾이고 도리어 상담과 위로를 받게 되는 대화의 과정이 돋보인다.

 

 

[다시 한번]

여자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한 ‘나츠코’는 동창회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다.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허탈한 표정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그 순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고등학교 같은 반이었던 전 애인과 마주친다. 부리나케 에스컬레이터를 다시 내려가는데, 그 친구도 나츠코를 알아채는 눈치인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위에서 기다려!” 엇갈림 끝에 만난 둘, 나츠코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친구는 나츠코를 집으로 초대한다. 집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둘은 어느 순간 대화가 부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기억이 엇갈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솔직히 말하면 네 이름이 기억이 안 나.” “진담이야?” “넌 내가 누군지 알아?” “유키 미카.” “아… 코바야시 아야. 난 코바야시 아야고 네 동창이 아니야.” 둘은 서로 자신의 기억 속 누군가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즉 ‘아야’는 나츠코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착각했음에 민망해하는 나츠코는 서둘러 자리를 피하지만 아야는 그녀를 붙잡는다. 나츠코는 아야에게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는다. 자신이 전 애인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다고, 그래서 오랫동안 찾고 있었다고,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싶다고. “혹시 괜찮다면 내가 미카 씨를 할까?” 아야를 과거 연인으로 상상하며 쌓아왔던 감정을 털어내는 나츠코였다. 나츠코 역시 아야의 이야기를 듣고 상대역이 돼준다. 역할극을 통해 오랜 시간 묵혀둔 말들을 꺼내면서 서로를 위로해준다.

 제3화 ‘다시 한번’은 사고와 같은 우연이 치유의 발판이 되는 기적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나츠코와 아야는 서로 상대의 결핍을 채워주고 마음속에 뚫린 구멍을 메꿔준다.

 

 

[감독의 철학이 마법을 만든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독특한 대본 리딩 방식으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Drive My Car)>(2021)에서 자세히 소개됐듯이, 배우들에게 카메라 앞에 서기 전까지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오직 대사를 기계적으로 읊게 한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조금의 연기도 들어가선 안 된다. 수십 번 읽은 대사에 처음으로 감정을 부여해줄 때 나오는, 다시 말해 *슛에 들어갔을 때만 나오는 ‘우연’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다. 덕분에 하마구치 감독의 작품은 기이한 힘을 가지게 된다. 형용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카메라는 포착한다. 여기서 ‘무언가’는 추상적인 표현으로서 기자의 문장으로는 온전히 담기 힘들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 ‘무언가’를 영화적 체험으로서 분명히 느낄 수 있다.

 하마구치 감독이 다루는 대화의 주제는 항상 인간의 복잡하고 내밀한 감정과 심리이다. <우연과 상상>에서는 기존의 작법에 ‘우연’과 ‘상상’의 상호작용을 첨가한다. 이는 마치 작품 속 인물 간의 대화처럼, 마치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처럼, 필연적으로 주고받는다. 세 에피소드 모두 우연을 계기로 의도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고 우연적 사건에 인물의 상상을 더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채워나간다. 그리고 이때, 마법 같은 장면이 탄생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마법은 예고하고 나오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맞닥뜨리는 울림에 관객들이 마법이란 이름을 붙인 것뿐이다. 감독이 부리는 마법은 인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고 가는 말 사이에 느껴지는 어느 연결지점, 말과 동행하는 충동적인 행동에서 '마법'이 발생한다.

 

*슛: 영화 따위의 촬영을 시작하는 일. 새로운 과거, LP의 세계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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