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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휘훈, 그림책공작소, 2020

'사회학의이해' 왕혜숙 교수가 추천하는 『하루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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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그림책을 본 적이 언제인가. 그림이 있는 책 말고 진짜 그림책 말이다. 줄거리나 이야기가 메인이고, 그림은 보조 수단인 그런 그림책 말고, 그림이 당당히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진짜 그림책 말이다. 문자만 편식해야 하는 직업이다 보니 문자 하나 없이 오직 그림으로만 가득 찬 책을 뒤적이고 그 안에서 여백과 상상을 곱씹어 보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그림책은 목적지 없이 시작한 뒤죽박죽의 여정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의외의 발견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하루거리』를 추천하는 이유도 그림을 통한 다양한 상상의 세계로의 여행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루거리』의 페이지마다 펼쳐지는 수묵담채화들은 비록 웅장하고 세련되진 않지만, 토속적이고 정감 어린 이 땅의 풍경들을 선사하며 아득한 향수를 자극한다. 논과 밭, 마을 어귀와 너른 들판···. 이 책은 가난하지만 정이 있었던 시대로의 여행을 선사한다.

그래도 오늘 소개하는 책은 그림책‘치고는’ 꽤 글이 있는 책에 속한다. 이 책이 그림과 같이 풀어내는 이야기 역시 곱씹어 볼 만하다. 책의 주인공은 어린 소녀 ‘순자’이다. 순자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친척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소녀다. 하루 종일 들에서 나물을 캐다가 장에 내다 팔고, 물을 긷고, 집안일을 하느라 친구들은 그녀가 노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런 그녀가 가끔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우물 속을 뚫어지게 쳐다본다든지, 달구지 위에 맥없이 누워 있다든지···. 친구들은 그녀가 *하루거리, 즉 ‘학질’에 걸린 것이라고 진단하고, 병을 낫게 하기 위해 기발한 방법들을 동원한다.

어느 날, 친구의 손에 이끌려 소원을 들어준다는 약수터에 간 순자가 “죽게 해달라고 빌었다.”라고 내뱉은 말은 충격적이다. 어른들의 말처럼 학질의 통증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그렇게나 고통스러운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녀를 죽고 싶게 한 것은 몸의 병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나물 바구니와 물지게에 얹혀 있는 삶의 무게는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이었다. 아무 걱정 없이 뛰어놀고 부모님에게 어리광 부려야 할 나이에, 그녀는 너무 빨리 고단한 현실에 내던져져야 했다. 그런데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순자에게 별다른 처방전은 필요 없었다. 그저 난생처음,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날이 저물도록 원 없이 놀자 병이 사라진다. 결국 치유의 힘은 관계로부터, 사회로부터 나온다.

강의를 하며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만나다 보면, 학생들이 순자와 같이 이름 모를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될 때가 있다. 열정과 패기가 넘쳐야 하는 청춘들이 보여주는 무기력하고 무덤덤한 표정들이 그렇다. 장기화되고 있는 경기침체, 점점 더 심화되는 취업 경쟁, 몇 년간 지속된 코로나19···. 뭣 하나 녹록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병들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이들에게 필요한 처방전은 그 어떤 치료도, 약도 아니다. 청춘이 항상 그랬듯이,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맘껏 젊음과 무모한 낭만을 즐기는 것이 아닐까. 이왕이면 친구들과 함께! 청춘을 박탈당한 청년들에게 치유가 절실한 이 봄에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다.

할머니의 경험을 토대로 그렸다는 작가의 말처럼. 순자와 친구들은 우리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어린 시절들을 보여준다. 어린 순자는 지금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노년층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지금 모든 병을 치유하고 평화로운 노년을 즐기고 있을까? 가끔 언론을 통해 말도 안 되는 억지와 아집을 부리거나, 분노로 똘똘 뭉쳐 화를 주체 못하는 노인들을 접하게 된다. 혹시 이런 노인들을 보게 되면 혐오의 시선으로 회피하지 말고, 순자처럼 응석을 부려보지 못하고 어린 나이부터 묵묵히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세대라서 지금 몽니를 부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러나 비단 어려서 못 부려본 생떼를 지금 부리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OECD 통계상 한국의 노인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이 1위라는 반갑지 않은 뉴스를 보면, 이 사회에는 여전히 마음의 병을 치유하지 못하고 죽게 해달라고 빌고 있는 순자들이 아직 많은 것은 아닐까.

 

*하루거리: 하루씩 걸러서 앓는 학질. 하루는 힘들고 하루는 괜찮기를 반복하며 아픈 증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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