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디자인을 둘러싼 질서에 관한 몇 가지 질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질문3> 

몸(身體 body):

몸의 지향성과 관계의 미학

 

대략 1990년대를 전후로 최근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은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변화를 경험한다. 이전과는 현저하게 다른 그 양상의 특징은 소위 ‘디자이너의 저자성’, ‘경험과 스토리’, ‘작은 커뮤니티’, ‘접촉과 협업’, ‘노동의 가치’, ‘생산과 소비의 연결’, ‘사물과 도구’에 관한 인식 따위였다. 이런 변화는 디자인이 과거에서 산업 생산과 소비에 기여하던 시기를 넘어 분업화가 남긴 노동과 소비의 재회를 시도하고, 성장 일변도의 목표가 지속 가능한 협업과 공유로 전환되기 시작한 사회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나’와 ‘타자’의 ‘존재’, ‘관계’와 ‘공존’에 관한 인식론적 질문이 있다. 소위 ‘몸 철학’이다. 이런 인식 변화는 문학, 예술을 거쳐 디자인과 일상에서 지금도 여전히 감지되고 있다. “집회, 만남, 시위, 협력, 게임, 파티, 연회, 즉 만남과 관계를 만드는 모든 방식들이 오늘날 그 자체로 미학적 탐구 대상의 전형이다.”1)라는 부리오의 진단은 1990년대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만 존재하는 이벤트로 존재하는 경향을 보여 온 현대 미술의 특징을 잘 설명한다. 이런 경향의 현대 미술은 실행되고 나면 자료만 남을 뿐 자료와 작품은 구분된다. 이러한 유형의 예술은 관객과의 약속, 다시 말해, 일정한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런 경향은 플럭서스(Fluxus) 이래 예술이 시간성을 중대한 쟁점으로 끌어들인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는 예술가와 관객 사이의 약속 형태로, 때로는 예술가와 작품 자체의 만남 형태로 일어난다. 그에 앞서,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은 하루 중 일정한 시간에 그의 손안에서 발견되는 첫 번째 오브제를 레디메이드(ready-made)로 변환할 것을 규정하기도 했고, 배리(Robert Barry)는 1969년 3월 5일 오전 중 어느 순간에 0.5㎥의 헬륨을 공기 중에 풀어 놓은 작품을 고안하기도 했다. 카와라(On Kawara)는 1970년 이후로 수십 년 동안 그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리는 전보를 지인들에게 발송하기도 했다.2)

이렇듯 현대미술은 예술가가 관객에게 던지는 약속의 계약 관계 안에서 또는 예술가 스스로 지정한 계약 관계 안에서 한 지점에 머물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통해 관객과 만난다. 20세기 인류가 목격한 각종 스펙타클의 조각들은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가 바터시 파워스테이션(Battersea Power Station)에 띄운 플라잉 피그(Flying Pig)로 형상화되기도 했고, 고든(Douglas Gordon)이나 페어허스트(Angus Fairhurst)처럼 작가가 선택한 카페의 손님들에게 전화하여 다양한 지시를 하거나, 불법 전파 장치로 두 갤러리를 연결하여 상대 갤러리에서 걸려온 전화로 오해하게 만드는 매우 거칠고, 공격적이며, 우발적이고, 혹은 불편한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했다.3) 이처럼 현대 미술은 접촉과 만남이라는 방법을 통해 관객 혹은 예술가 자신에게 때로는 조용한 물음으로, 때로는 거친 몸짓으로 말을 건넨다. 예술가의 이러한 몸짓은 어떤 초월적 목표 또는 치밀하게 의도된 것이기보다는   예술가 스스로가 관객에게 던지는 ‘몸짓’이자 관객 역시 의미의 생산과 재생산에 가담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의 배경에 ‘나’와 ‘타자’, 그리고 이 둘의 ‘관계’에 관한 인식론적 변화가 있다. 그 근원적 물음은 ‘나라는 일반적 관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나와 다른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였다. 퐁티(Merleau-Ponty)는 다른 모든 문화적 대상 중 첫째이자, 그 모든 대상이 존재하게 하는 것을 “행동의 운반자로서 타인의 몸”이라고 보았다. 그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오직 두 가지만이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바로 펼쳐진 존재로서 ‘즉자(卽自)’와 의식의 대상이자 의식하는 존재로서 ‘대자(對自)’가 그것이다. 즉자는 ‘나’라는 주체이고, 대자는 ‘나 이외의 모든 사물’이다. 그리고, 타인은 ‘나’에게 ‘즉자’이면서 동시에 ‘대자’이다. 따라서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사물의 세계이고, 그 사물의 세계에 ‘나’라는 존재가 있다. 다시 말해, ‘나’는 나의 ‘몸’에 의해 대상이 되고, 반대로 대상에 의해 ‘나의 몸’이 지위를 갖는다.4)

‘나’와 ‘타자’를 바라보는 이런 인식은 “시각적인 ‘몸 이미지’는 멀리 ‘타자’의 손에 쥐어진 ‘나의 몸’을 다시 내 의식의 중심으로 되찾아오려는 심리적이며 사회적인 반응”이라는 관점으로 이어진다.5) 즉, ‘타자’가 ‘나’를 바라볼 때, ‘타자’의 시선을 내가 다시 의식하는 시각적 반향이 뒤따르고, 이러한 시각적 메아리는 거울의 방처럼 무한하게 지속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상대방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의식하는 순간 상대방은 시선을 재조정하면서 나의 의식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즉, ‘타자의 시선’이 ‘나’에게 의식이 된 순간, ‘나’는 열중하던 내 일에서 벗어나 새삼 ‘타자의 눈‘으로 ‘나’를 돌아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타자의 타자’인 ‘나’와, ‘나의 타자’인 ‘타자’가 서로 만나게 하는 방법은 인식의 상호 바깥인 ‘몸’을 통해서이다. ‘나’와 ‘타자’는 각각 주체의 안쪽이고, ‘나’와 ‘타자’의 ‘몸’은 인식의 바깥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몸’을 주체의 감각 기관의 종합 정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주체’, 심지어는 ‘유일한 주체’로 인식하기 때문에 가능한 관점이다. 이런 ‘주체’에 관한 인식은 ‘관계’에 관한 인식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주체’는 감각적 기능, 즉 오감을 통해 ‘타자’와 소통한다. 예를 들어, 나의 시선이 나의 ‘몸’에서 떨어지자마자 주위 대상은 그 시선으로부터 의미를 받아들인다. 그 의미는 내가 만들 수 있는 것만이 아니고, 나의 행동이 동시에 만드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의미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감각이 만드는 모종의 행동 속에 어떤 윤곽으로 존재한다. ‘몸’은 이처럼 의미의 정교함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장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의 몸’과 ‘타자의 몸’은 늘 상호 ‘몸’이 만들어내는 의미의 ‘연장’ 혹은 의미의 ‘흔적’의 ‘익명성’ 안에 놓이는 관계인 것이다.6)

‘몸’과 ‘몸의 감각’이 만들어내는 ‘몸짓’을 ‘나’와 ‘타자’를 하나의 ‘장’을 향해 연결하는 각각의 ‘바깥’, 그리고 그 ‘장’을 향하는 ‘흔적’으로 인식하는 이런 관점은 ‘나’를 중심으로 ‘주체’를 설정하고, ‘주체’ 외부의 모두를 ‘타자’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와는 매우 다른, ‘주체’, ’타자‘, ‘관계’에 관한 이해 방식이다. 낭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리로서의 몸” 또는 “자리를 만들어내는 몸”, “‘타자’를 향하는 발원지로서 ‘몸’” 이해 방식이다. 그런데, 한 가지 어려운 문제는 어쨌든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상호가 아닌 각자의 편에서 체험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타인의 아픔’을 그의 아픔을 감각하는 것으로부터 인지한다. 다시 말해, ‘타인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 아니라 ‘그가 체험한 아픔으로부터 내가 인식하는 아픔’이다.7) 이러한 문제는 내가 몸을 통해 지각하는 타인의 슬픔과 분노가 곧바로 나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설령 내가 몸을 통해 타인을 접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로 남는다. 이는 곧 ‘몸의 사유’로 세계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일정한 갈등과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뜻으로, ‘나’와 ‘타자’를 양자택일해야만 하는 극단적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는 뜻이다.8) ‘절대적 주체’와 ‘참여된 주체’의 구분이 필요한 지점이다. ‘나의 몸’과 ‘타자의 몸’이 하나의 장을 이루기 위한 각각의 ‘바깥’이고, 결국 ‘타자의 몸’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순간 도래하는 것이 ‘나의 몸’이라면, ‘나’는 ‘나를 지각하는 타자’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상대적 존재일 뿐인데, 어떻게 ‘나’는 ‘나의 주체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카프카(Franz Kafka)의 단편에 등장하는 중국 사신의 비유는 이를 잘 설명한다. 이 중국 사신의 등에는 황제의 문서가 새겨져 있다. 문서에 자신의 운명이 걸려 있음에도 사신은 그것이 자신의 등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절대 그 내용을 읽을 방법이 없다. ‘몸’이 ‘나의 것’이지만, 모순적으로 그 주체성은 ‘타자의 시각이 소유하는 것’이다.9)  “‘주체의 고독’과 상호 소통은 양자택일의 두 항이 아니라, 한 가지 현상의 두 계기여야 한다.”는 퐁티의 입장10)은 이러한 모순에 직면하기 위한 ‘절대적 주체’와 ‘참여된 주체’의 구분 필요성에 힘을 보탠다. 즉, ‘나’를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세계 안에 놓고 그 속에 ‘참여된 주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주체’, ‘타자’, 그리고 ‘관계’를 바라보는 이런 현상학적 인식 위에 ‘나’를 포함한 ‘절대적 주체’는 ‘몸’을 통해 ‘타자’, 즉 ‘또 다른 절대적 주체’와의 접촉을 시도하며, 그 접촉의 장    (사회적 세계)은 단순한 ‘절대적 주체의 총합’이 아니라, 그 어떤 ‘절대성’으로부터도 벗어난 ‘참여된 주체’와 ‘참여된 주체’의 ‘상호 반응이 공존하는 장’이라는 관점이 있다. 우리는 사회적 세계로부터 멀어질 수는   있어도 그 관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나를 사회적 세계의 관계망을 향해 어떻게 열어 두는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나’와 ‘타자’를 연결하는 가장 유일하고 중요한 방법은 나를 결정짓는 모든 관념과 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참여된 주체’의 ‘장’으로 ‘나의 몸’을 향하게 하는 일뿐이다.11) 이것이 우리가 참조해야할 ‘몸의 지향성’이다. 

그렇다면 ‘몸의 지향성’은 우리에게 어떤 미학적 단서를 제공하는가? 우리는 늘     의미를 찾는다. 무엇인가 명제화하여 참과 거짓의 명증 세계에 올려놓아야 그것이 의미를 획득한다고 믿는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것이 창의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무언가 의미를 벗어나면 우리는 혼돈에 빠진다. 낭시(Jean-Luc Nancy)의 표현을 빌리자면 “휘청거린다.” 정작 굳건하게 못 박아 놓은 의미 안에서는 절대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드는가? 낭시는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이 질문에 일종의 단서를 제공한다. “플라톤은 제대로 된 연설은 머리, 배, 꼬리를 갖춘 커다란 짐승과 같이 잘 조직된 몸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뿌리 깊은 플라톤주의자인 우리는 머리, 배, 꼬리를 갖추지 못한 것을 넌-센스라고 단정한다. 그런데 사실 넌-센스는 부조리도, 전도되거나 비틀린 의미도 아니다. 그것은 ‘의미 없음’이 아니라 ‘의미 아님’에 가깝다.”12)

여기서 ‘머리’, ‘배’, ‘꼬리’는 선험적 관념에 의존하여 의미를 규정짓는 관습의 상징이다. 우리가 규정해놓은 모든 관습으로부터의 탈주, 즉 ‘머리도 꼬리도 없는 글쓰기’, ‘의미 없음’이 아니라 ‘의미 아님’ 안에 머물기 위한 모종의 전략이다. 낭시가 제안하는 머리도 꼬리도 없는 ‘글쓰기’는 몸으로     만들어내는 ‘의미-쓰기’, 즉, 크든 작든 어떤 관념으로부터도 영향 받지 않는, ‘몸’ 그 자체의 감각과 ‘움직임’ 만으로 써 내려가는, 정신의 어떠한 지배도 받지 않는, 순수한 ‘몸짓’에 의한 행위이다. 또한, 창의성 측면에서 보는 ‘몸-쓰기’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꽉 채워져 있지도, 텅 비어 있지도 않은, 열린 ‘자리’의 상징이기도 하다. ‘바깥’도 ‘안’도, ‘부분’도 ‘전체’도, ‘기능’도 ‘목적’도, ‘꼬리’도 ‘머리’도 없는 ‘장’이다. 낭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접고, 되접고, 펼치고, 중첩하고, 접혀 들어갔다가 다시 돌출하고, 구멍을 뚫고 새나가거나 새어 들어오고, 팽팽히 잡아당겼다가 다시 놓고, 흥분했다가 졸도하고,  연결했다가 끊는 몸의 움직임만이 있는   실존의 자리”이다. 이처럼 창의적 전략으로서 ‘몸-쓰기’는 사유를 위한 미학이 아니라, 오히려 접촉을 즐기는 ‘행위의 미학’이다. 낯섦과 교차하면서 부러짐을 겪는 ‘불연속의 미학’이다. 각종 계기와 질료의 ‘불연속 그 자체에 관한 미학’이다. ‘발생의 여지를 만드는 미학’이다.13)

“쓰는 것이 있게 하라, 몸에 관해서가 아니라, 몸 자체를. 육체성이 아니라, 실제 몸을. 몸의 기호나 이미지, 암호가 아니라, 여전히 몸을.”이라는 짧은 낭시의 제안은 이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낸다. 요컨대, 글쓰기는 ‘끝과 끝이 서로 접촉하게 하는 것’, 글쓰기가 몸의 기호가 되거나 몸이 기호가 되도록 만드는 대신, ‘몸에 가 닿는 것’, ‘몸을 건드리는 것’, 그리고 접촉 그 자체가 글쓰기 안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미(sens)라는 비육체적인 것(incorporeal)으로 ‘몸’과 ‘몸’이 접촉하도록 하는 일, 그렇게 ‘의미가 하나의 터치(une touche)가 되도록 만드는 일’인 것이다.14)

“나는 접촉하지 않는 글쓰기가 과연 가능한지 알지 못한다. 보고서나 발제문 류의 글이 아니고서야 글쓰기는 그 본질상 몸과 접촉한다...(중략)...나는 몸에 모종의 자취들이 기록될 수 있다거나, 반대로 몸이 문자들에 엮여 들 수 있다는 황당한 이야기로 경계에 관한 궤변을 늘어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와 몸의 접촉은 글쓰기의 의미를 몸의 살갗과 신경으로부터 분리하는 절대 경계를 따라가며 일어난다.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는 바로 거기가 접촉이 일어나는 장소다. 도려내고 무늬를 넣고 문신을 새기고 상처를 낸 ‘기록된 몸들(corpus ecrits)’은 제 위에 새겨진 부호들의 영광스러운 흔적이기에 소중하고, 그렇기에 그 부호들처럼 간직되고 유지될 수 있는 ‘몸’들이다.”15)

‘몸의 지향성’에 관한 인식을 토대로     낭시가 제안하는 글쓰기는 어쩌면 글 그 자체가 아니라 글쓰기를 통한 접촉의 흔적일 것이다. 글쓰기를 통한 ‘몸의 지향성’은 접촉의 방식, 즉 일종의 추진, 충동, 누르기, 인상, 표현, 또는 흔들기 따위일 것이다.16)

그리고 이런 접촉 그 자체는 우리 모두가 이미 경험으로 잘 안다. 실재하지만,     단지 물질적이지 않을 뿐이다. 낭시가 ‘몸’과 ‘글쓰기’를 통해 제안하는 모종의 전략으로서 ‘몸-쓰기’가 제공하는 미학적 단서가 어쩌면 그의 이 짧은 질문에 압축되어 담겨 있지 않을까?  

“몸을 향해 쓰라. 작가가 하는 일이 그것 말고 다른 것일 수 있는가? 그러면 그것은 존재를 향해, 또는 스스로를 건네는 존재를 향해 보내질 것이다. 사유가 그것 말고 대체 무엇일 수 있는가?”17)

 

 

1)Nicolas Bourriaud (1999) Relational Aesthetics, Les Presse Du Reel, pp.28-29

2)Bourriaud, Ibid., pp.29-30 

3)Bourriaud, Ibid., p.32

4)Merleau-Ponty, 류의근, Ibid., pp.522-525

5)타자의 시선에 이미지의 볼모로 잡힌 몸: 김종갑 (2004) 『타자로서의 몸, 몸의 공동체』 건국대학교 출판부, p.28

6)Merleau-Ponty, 류의근, Ibid., p.529 

7)Merleau-Ponty, 류의근, Ibid., p.533 

8)조광제 (2005) 『몸의 세계, 세계의 몸』 이학사, p.388 

9)프란츠 카프카 『변신. 시골의사: 황제의 전갈』 전영애, 민음사, 1998

10)Merleau-Ponty, 류의근, Ibid., pp.539-540

11)Merleau-Ponty, 류의근, Ibid., pp.543-545  

12)Jean-Luc Nancy (1992) Corpus 『코르푸스』 김예령, 문학과지성사, 2012, pp.16-17 

13)Nancy, 김예령, Ibid., p.26

14)Nancy, 김예령, Ibid., p.9

15)Nancy, 김예령, Ibid., pp.14-16

16)Nancy, 김예령, Ibid., pp.156-157

17)Nancy, 김예령, Ibid., p.22

SNS 기사보내기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

하단영역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