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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으로 남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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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작 다큐 시리즈 <고대의 아포칼립스>(Ancient Apocalypse)에서 탐사 보도 기자인 그레이엄 행콕(Graham Hancock)은 약 1만 2000년 전 지구에 고도의 문명이 존재했다는 가설을 내세운다. 이것은 사학계에서 지금으로부터 6천 년 전(B.C.4000) 인류의 첫 문명이 등장했다고 결론 내린 정설과 큰 차이가 있다. 그레이엄은 마지막 빙하기의 끝자락에 대홍수가 발생하며 해수면이 120m 상승했고, 그 과정에서 대륙의 많은 부분이 가라앉고 생명체들이 쓸려나가면서 당시에 있던 문명도 같이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선사시대의 인류에 대한 기억을 상실했다고 주장하는 그는 30년에 걸쳐 전 세계를 돌며 기존 이론에 반박할 증거를 찾아다닌다. 주류 고고학자, 역사학자들은 그를 사이비 고고학자, 유사 과학자로 부르며 그가 제시하는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의 연구를 배척한다. 그레이엄은 흥미롭고, 설득력을 지닌 단편적 증거들을 제시한다. 인도네시아의 ‘구눙 파당’은 현무암 주상 절리를 쌓아 만든 피라미드 형태의 건축물 유적이다. 그곳에서 BC500년의 문화층과 BC5200년의 문화층이, 더 아래쪽에서는 훨씬 오래된 11600년 전(BC9600)에 생긴 문화층이 발견되었다. 여러 개의 문화층이 같은 곳의 다른 깊이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것은 페루에 있는 4700년 전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는 피라미드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이곳의 수렵 채집민들은 빙하기 이후 사라지기 전 아시아 본토와 이어져 있던 순다랜드(Sundaland)에서 풍요롭게 번성했다. 수렵 채집민들이 이 언덕에 살았던 시기는 7000년 전(B.C.5200년)이고 당시에는 이런 건축물을 건설할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빙하기 동안에 인도네시아에 고도의 문명이 번성했다면? 순다랜드가 바다에 잠기면서 문명의 흔적도 같이 잠긴 것이라면? 이런 가설을 세운다면 어떻게 인도네시아에 11600년 전의 유적이 남아 있는지에 대한 답이 가능해진다. 유럽, 아프리카, 중동 사이에 자리하는 섬, 몰타에 ‘가르 달람’이라는 동굴이 있다. 이곳에는 동물 뼈와 화석 등 몰타의 선사시대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동굴 석순의 층에서 빙하기 층을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그 층에서 두 개의 특별한 치아가 발견되었다. 네안데르탈인의 치아이다. 이것은 고고학자들이 몰타에 처음 인류가 도달한 시기는 7900년 전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달리 몰타에 훨씬 오래된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멕시코의 ‘촐룰라 대피라미드’는 마트로시카처럼 피라미드 내부에 또 다른 피라미드가 있다. 고고학자들은 촐룰라 대피라미드의 완공 시기를 서기 1200년으로 공식화했지만, 이후 그 안에서 서기 800년경의 피라미드와 서기 300년경의 피라미드, 그리고 B.C.500년의 피라미드가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이것이 17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만들어진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 수메르 문명은 약 6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존재했던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튀르키예 유적 ‘괴베클리 테페’가 발견되면서 이것이 11600년 전(B.C.9600년)에  세워진 것임을 고고학자들도 인정했다. 현재 지구에서 공식적으로 가장 오래된 거석 구조물이다. 바퀴가 발명된 시점이나 동물을 가축화한 시점보다도 이전에 세워진 것이다. BC9600년은 마지막 빙하기가 물러가기 시작하던 시기로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여전히 진흙 오두막에 살던 원시 수렵 채집민이었다. 10톤씩이나 나가는 거석을 어떻게 들어 올리고, 다듬은 석조 바닥 위에 세우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레이엄은 이런 거석 구조물을 생각해 내고 건축할 정도로 발전한 문명이 이미 이전에 있었던 것이라고, 다른 문명이 만들어낸 유산이라고 주장한다. 전 세계의 고대 문명 전설에는 지구를 집어삼킨 대홍수가 등장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전설에서도 지구가 낡고 더러워져 창조신 데바타가 대홍수를 일으켜 지구의 생명체를 쓸어버린다. 마지막 남은 두 인간은 가장 높은 산에 숨는다. 멕시코의 촐룰라 대피라미드는 거인족의 작품으로서 당시 거인족이 살았는데 비의 신 틀랄록이 분노하여 내린 비와 대홍수에 그들의 삶이 파괴된다. 인도의 전설에는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마누라는 어부가 등장하고, 멕시코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 케찰코아틀은 대홍수 이후 동쪽에서 온 이방인으로 멕시코 연안에 상륙하여 주민들에게 농작과 사육법, 건축, 천문학, 예술을 가르쳐주고 떠난다. 잉카의 창조신 비라코차는 거대한 호수에서 나타나 현지인들에게 석조 작품을 만드는 법을 알려준다. 폴리네시아 전설의 마우이는 바다에서 땅을 끌어올려 섬을 창조하고, 주민들에게 석기 사용법과 음식 조리법을 가르쳐준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대홍수 이후 인간에게 불의 비밀을 알려준다. 대홍수라는 전지구적 전설, 이것은 약 12800년 전 마지막 빙하기의 끝 무렵, 전 세계 거의 모든 곳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대변동, 즉 대홍수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그레이엄은 이것이 설화가 아닌 실제로 벌어진 일에 대한 기억이라고 주장한다. 전설, 신화의 이야기가 마지막 빙하기 때 실제로 일어난 홍수와 화재 등으로 사라진 고도의 문명이 남긴 생존자를 묘사한 것일 수도 있다는 그의 이야기는 꽤 그럴듯하게 들린다. 빙하기에 있던 잃어버린 고도의 문명이라는 가설은 우리가 오랫동안 사실이라고 믿었던 정설에 구멍을 낸다. 다른 가능성을 고려조차 하지 못하도록 막고, 배척하고, 닫는 학계에 틈을 낸다. 근간이 흔들린다고 해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못 본 척하지는 말자. 사실도 아닌 가설에 근간이 흔들릴 정도면 이미 정설도 완전할 수 없음을 내부에 갖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정복자, 승자의 기록이므로 말살되거나 배제되어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것이 훨씬 더 많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되지 못하고 전설로 구전되어 오는 것에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없었던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문명이 존재했다면 그것이 더 멋지고 흥분되는 일 아닌가. 이미 끝난 연대 정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설명하기 힘들다고 밀어내기만 할 일은 아니다. 언제든지 또다시 대홍수가 지구를 쓸어내릴 수도 있다. 모든 뿌리가 흔들릴 수도 뿌리채 뽑혀나갈 수도 있다. 차라리 디지털 문명을 한 번쯤 쓸고 가도 좋겠다. 다음의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수렵과 채집이 가장 본연적인 삶임을 가르쳐주어도 좋겠다. 해와 달과 별자리를 보면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을 기릴 수 있는 단순함이 나쁘지 않은 삶인 것을 전해주어도 좋겠다. 그러나 인간은 선하지 않아서 다시 다른 부족을 점령하고 말살하겠지만. 계급을 만들고 착취하고 정복하려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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